질그릇 인생이지만 당신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고전4:7-10)
본문
당신은 질그릇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실패자를 찾으십니다. 에디슨은 전구 하나를 발명하기 위하여 육천번에서 일만번에 가까운 실험을 했습니다. 이 말은 일만번에 가까운 실패를 거듭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자는 어찌보면 일하지 않은 자입니다. 인간은 실패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거나 완벽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개혁자 칼빈은 인간은 전적 부패하고 타락한 무능력한 존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자들을 불러서 사명자로 변화시킵니다.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광야의 사람 모세가 그러했고, 갈릴리 어부 출신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당신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나라와 팔레스틴은 지정학상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일본과 중국과 쏘련과 미국이란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팔레스틴 도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이나 지중해 연안의 헬라와 로마와 같은 강국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산을 특수하게 관리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식민지 국가로 있었기 때문에 국가나 은행에 많은 돈을 저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일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귀중한 보배로 바꾸어 땅속에 묻어 둡니다. 묻어 둘 때 주로 질그릇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목기는 썩기 싶고, 철기는 녹이 잘 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서 보배를 가지고 가지 못하고 피난을 갔다가 그 보배를 잃어버릴 때 땅속에 묻어둔 보배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보물이 되고 맙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태복음 13:44)고 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보배와 질그릇은 무엇인가 보배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보배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권 혹은 주님이 주신 직분과 사명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은 죄된 인간적의 육체입니다. 더 광의적으로 말씀드리면 불완전하고 무가치하고 연약한 인간의 타락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에게 희망이 있는가 .
첫째: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라고 했습니다. 보배와 질그릇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질그릇으로는 보배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사건은 놀라운 계시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1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릇이란 그릇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그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서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금이 담기면 금그릇이라고 부릅니다.
2 가치의 변화입니다. 신분이 변함과 동시적으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그릇으로만 있을 때는 단돈 몇푼에 거래되는 것이 그 속에 보배가 담기면 엄청난 고가로 흥정이 됩니다.
3 용도의 변화입니다. 그릇은 속에 든 내용물에 따라서 놓일 장소가 달라집니다. 오물이나 쓰레기를 담으면 뜰이나 구석진 곳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배가 담기면 안방이나 장농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그 속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당신은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2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고 했습니다.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는 주인이 담아 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고 했습니다. 질그릇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통해서 덤으로 받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된 우리의 고백이 있다고 하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린도전서 15:10)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은 벳바게의 나귀새끼입니다. 왜 나귀새끼가 가는데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앞에서 호위하여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소리질러 호산나 하는가 나귀새끼의 등에 보배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보배입니다. 마게도니아 첫 성 빌립보 옥을 지키는 로마 간수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군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 변합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환란의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 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하고”(8-9) 보배를 소유한 자는 환란을 이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린 재앙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피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6:33)고 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여기싸이다란 말은 좁은 이란 말과 장소 란 말의 복합어로서 사방(every+side) 이란 말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로서 한곳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서 아람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가 사면초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크고 강한 자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는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고 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답답한 일이란 길 이란 말과 없다 란 말의 복합어로서 길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길이란 가능성을 말합니다. 길이 막힌 상태는 희망이 상실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배인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14:13)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핍박이란 성도에게 최고의 영예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1-42)고 했습니다. 꺼꾸러 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위인은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고 했습니다. 위인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를 잘 극복합니다. 당신은 영적인 오뚜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보배의 소유자는 결단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고 했습니다.
셋째: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왜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십자가만이 당신에게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사망권세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14장 4절에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죄와 마귀 권세를 주님의 십자가로 이깁니다(고린도전서 15:55-57).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든든히 붙잡읍시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로 부르실 때 제일 먼저 십자가 질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참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비상시국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원수 마귀입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 강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으라”(에베소서 6:10-11)고 했습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은 비상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온한 때는 보배를 금그릇에 담아서 장농이나 선반 위에 둡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 세상의 환란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영광의 하늘나라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고 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하는 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태어나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할 날이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당신이 소유할 최대의 보배요, 최고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 37-39)고 했습니다. 당신이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속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는 환란을 참고 인내하게 합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때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기는 썩기 싶고, 철기는 녹이 잘 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서 보배를 가지고 가지 못하고 피난을 갔다가 그 보배를 잃어버릴 때 땅속에 묻어둔 보배는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보물이 되고 맙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태복음 13:44)고 했습니다. 주님의 비유는 바로 이러한 배경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보배와 질그릇은 무엇인가 보배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더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보배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권 혹은 주님이 주신 직분과 사명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은 죄된 인간적의 육체입니다. 더 광의적으로 말씀드리면 불완전하고 무가치하고 연약한 인간의 타락성을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질그릇에 보배가 담겼다는 것입니다. 왜 당신에게 희망이 있는가 .
첫째:질그릇 속에 보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7)라고 했습니다. 보배와 질그릇이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질그릇으로는 보배를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사건은 놀라운 계시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1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릇이란 그릇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그 속에 담겨지는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서 신분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금이 담기면 금그릇이라고 부릅니다.
2 가치의 변화입니다. 신분이 변함과 동시적으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질그릇으로만 있을 때는 단돈 몇푼에 거래되는 것이 그 속에 보배가 담기면 엄청난 고가로 흥정이 됩니다.
3 용도의 변화입니다. 그릇은 속에 든 내용물에 따라서 놓일 장소가 달라집니다. 오물이나 쓰레기를 담으면 뜰이나 구석진 곳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나 보배가 담기면 안방이나 장농속으로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이나 그 속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당신은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2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복음 1:12)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7)고 했습니다.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는 주인이 담아 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라고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고 했습니다. 질그릇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질그릇은 보배를 통해서 덤으로 받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질그릇된 우리의 고백이 있다고 하면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린도전서 15:10)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당신은 벳바게의 나귀새끼입니다. 왜 나귀새끼가 가는데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앞에서 호위하여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소리질러 호산나 하는가 나귀새끼의 등에 보배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보배입니다. 마게도니아 첫 성 빌립보 옥을 지키는 로마 간수는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군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소유한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 변합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환란의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면,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 뜨림을 당하여 망하지 아니하고”(8-9) 보배를 소유한 자는 환란을 이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린 재앙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피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 16:33)고 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싸여도 싸이지 않습니다. 여기싸이다란 말은 좁은 이란 말과 장소 란 말의 복합어로서 사방(every+side) 이란 말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로서 한곳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엘리사가 도단성에서 아람군대에게 포위되었을 때가 사면초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더 크고 강한 자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는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열왕기하 6:16)고 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여기답답한 일이란 길 이란 말과 없다 란 말의 복합어로서 길이 없음을 가르칩니다. 길이란 가능성을 말합니다. 길이 막힌 상태는 희망이 상실된 상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배인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믿는 자에게는 길이 있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애굽기 14:13)고 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습니다. 핍박이란 성도에게 최고의 영예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사도행전 5:41-42)고 했습니다. 꺼꾸러 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위인은 어려운 위기를 잘 극복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고 했습니다. 위인은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를 잘 극복합니다. 당신은 영적인 오뚜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보배의 소유자는 결단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1-12)고 했습니다.
셋째: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읽을말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10) 왜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십자가만이 당신에게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사망권세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14장 4절에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이기며 나가세”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죄와 마귀 권세를 주님의 십자가로 이깁니다(고린도전서 15:55-57). “아들이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든든히 붙잡읍시다. 우리가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이란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로 부르실 때 제일 먼저 십자가 질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복음 16:24)고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만이 참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비상시국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군병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원수 마귀입니다. 마귀와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으로 무장해야 하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 강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을 입으라”(에베소서 6:10-11)고 했습니다. 보배를 질그릇에 담았다는 것은 비상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평온한 때는 보배를 금그릇에 담아서 장농이나 선반 위에 둡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이 세상의 환란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영광의 하늘나라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린도후서 4:16)고 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하는 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태어나 영화로운 천국을 소유할 날이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당신이 소유할 최대의 보배요, 최고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5, 37-39)고 했습니다. 당신이 비록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속에 보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보배는 환란을 참고 인내하게 합니다. 그리고 멀지 않은 때에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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