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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6:4)

본문

오늘 본문은 우리 믿는 부모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단 한 절의 말씀에 불과하지만, 귀한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의 가정에는 징계라는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제 멋대로 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을 경악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 김교수란 사람의 부친 살해사건, 지금도 계속되는 엄청난 사건들의 이유를 분석하면 그 초점은 그들의 가정에서 부모가 그들을 바로 양육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결론지워집니다. 이는 현대교육학자들의 책임이 무척 큽니다. 그들은 진화론적인 사고에서 성선설에서 시작합니다. 아이들을 징계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모든 일을 자율적으로 하도록 가르쳐야한다. 그래서 책망 보다는 어쨓든 칭찬하고, 그들의 눈 높이에서 이해하고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입니다. 엄하고 무섭게 징계하기만 했던 이전의 교육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한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여 뚜렷한 자기 정체성은 살려주었지만, 책임 없는 자율만 강조되어 겉잡을 수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비윤리적인 행위도 얼마든지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그렇게 좋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부패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가르치지 않으면, 징계하지 않으면 저절로 잘되고 바로 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가만히 두면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리듯이 저절로 타락되고 갈수록 포악해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매를 드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 매로써 징계를 아니할 수 없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전에 농경사회에서의 모든 자녀교육은 가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학교를 세우고 학교에 자녀들을 위탁했지만, 오늘 학교는 갈수록 지식전달의 목적외에는 없다 할만큼 이제 학교에서의 참다운 인간을 만드는 교육은 포기된 상태입니다. 선생은 있지만, 스승은 참 귀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쾌쾌묵은 고서같이 보여서 덮어두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펼쳐야합니다. 기독자의 인간교육, 인성교육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지도를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하라고 하십니까 본문에서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징계를 인정하지 않는 가정교육이 잘못된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아이들은 어리고, 어리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그들에게 어릴 때에 가르치지 않으면 그 아이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를 포기하기 않아야합니다. 성경에서 훈계와 징계의 필요성과 징계가 실시되어야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징계가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가, 상당히 혼란을 가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이 징계를 지나치게 사용했습니다. 올바른 성경적인 방법을 시행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저희들의 한 소유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혹한 징계를 했습니다. 자녀들은 가축이 아니기 때문에 매로 일관해서는 결코 바로 양육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율법주의의 가정에서는 현대인들의 타락과 부패를 정죄, 심판하면서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극단적인 징계를 취합니다. 그런 징계는 차라리 안하는 것 보다 못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바른 방법으로 징계하지 않는다면 징계는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지나친 징계 가운데 자란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이 대학진학이나, 사회진출을 하는 나이 쯤 되어서 그 몸이 자유를 얻게 되므로 세상을 보게 될 때에 그들은 이 세상의 화려한 유혹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불신가정의 자녀들보다 더 깊이 유흥과 향락에 빠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됩니다. 이렇게 어릴 때에는 율법적으로 자녀를 교육하다가 나이 먹고 부모의 품 밖에 나가면 제 마음대로 하지만, 잔소리하다가 하다가 그 자녀가 이제 징계할 나이도 지나고, 탈선할 대로 다 어긋났을 때에 이제는 자녀양육 이라는 그 자체를 포기하고 자녀를 세상에 방임해 버립니다. 또 어떤 가정은 어릴 때부터 아이들은 자율적으로 지도하는 것이 좋다 합니다. 저들은 낳기만하면 다 알아서 제 갈길을 찾게 되어있다는 교육학자들의 가르침을 받아서 한 때, 자율, 자율, 얼마나 많이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고 마음대로 길러진 그 자율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오늘 무서운 타락한 세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얼마나 무서운 위기가 도래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균형잡힌 징계를 성경은 말씀합니다.
부모들부터 이 성경에서 가르치는 지혜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양육을 받아야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들의 하는 자녀양육이라는 중요한 과업은 실패하고 말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인생의 지혜를 구해야하는데, 부모들부터 자녀 양육에 대한 가르침도 성경에서 받아야합니다. 부모부터 자녀 양육법을 성경에서 배우고 또 성경으로 자녀를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으로 교육하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온전한 사람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부터 믿어야합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자녀를 양육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엡6: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누가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마는 이 말씀은 부모들이 먼저 자녀들을 바로 가르칠 책임이 있는 것을 말씀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부모에게 양육의 책임을 말씀합니다. 이 세대는 점점 악하고 속이는 때가 되어서 옳고 바른 진리의 말씀은 자신을 살리고 복되게 하는 말씀이지만,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 사욕을 따라 가려고 하는 때입니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했습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하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의 교육과 전도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말씀으로 가르치는데,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는 일을 할 때에 듣든지 아니듣든지 항상힘쓰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오래참으심으로 가르치시고,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같이 우리들도 우리들의 자녀들 양육을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들이 암만 듣지 않으려도 해도 그들을 양육할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그 가정의 부모에게 주신줄 알아야합니다. 끝까지 양육해야합니다.
둘째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우리를 양육하실 때에 우리가 곁길로 가면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징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권면이나, 책망이나, 징계의 채찍을 드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 자녀들을 지도하는 데에 징계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징계라고하면 매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교훈과 권면과 책망과 채찍을 말합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징계를 하되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라’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 자녀를 격분하게 말라, 너희 자녀가 화나게 하지 말라. 너희 자녀를 화나게 하는 것이 징계의 목적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들을 징계하는 것은 양육의 목적이지, 그의 인격을 짓밟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가 자녀를 화나게 해서 징계가 되지 않는 때입니까
1.부모가 자기 감정을 억제 못할 때-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먼저 억제하지 못하고 징계할 때에 자녀들의 인격을 짓밟는 일이 됩니다. 이는 부모된 자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늘 직면하는 매우 현실적인 위험을 지적합니다. 부모된 자신부터 이런 잘못을 저지른다면 자녀의 훈계에 성공 못할 뿐 아니라, 부모에 대한 격한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분노와 원망만을 낳게 됩니다. 이러면 차라리 징계 않는 것 보다 더 악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런 실패를 경험해 본 부모는 다시는 징계를 포기하여 양육을 망칩니다. 부모된 우리가 먼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면, 자신의 노여움을 제어할 수 없다면 진정한 징계의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자아를 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사람을 징계하는 것은 분쟁을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길거리에서 자기 분에 참지 못해 부르르 떨면서 자녀를 마구 때리며 징계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그 자녀의 모든 잘못의 원인은 그 부모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가운데서 징계가 먹혀들어 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은 술취하지 말고,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라고 말씀합니다. 술취한 사람 같이 감정 억제를 못하고 격해지고, 분별 못하는 상태에서는 징계가 안됩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을 때에 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을 때에 자기 통제도 가능하고, 교육도, 훈계도 됩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2. 또 그 부모가 징계하는 경우가 변덕스럽지 않아야합니다. 부모의 예측불허의 변덕은 징계받는 자녀로 하여금 혼란을 가져오게 합니다. 자신을 지도하는 부모의 심령상태를 아이들은 살핍니다. 짐승도 그 주인의 마음을 읽는다고 하는데 어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분별못하겠습니까 옳고 그른 것의 확실한 판단을 부모가 내려주어야합니다. 똑같은 행위를 가지고, 어떤 때는 칭찬을 해서 그 아이가 그것이 부모가 기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계속했는데, 동일한 사건을 어떤 때는 그 부모가 변덕스러워서 징계한다고하면 그 아이에겐 혼란을 가져다 주게됩니다. 부모는 그 아이가 그렇게 순종을 하든지 안하든지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가에 대하여는 분명한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만일 부모라도 자녀에게 실수한 행위가 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자녀 앞에서도 용서를 구할 것은 구해서 그 가정에 진리가 바로 서야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징계를 받을 때에 제가 무엇 때문에 징계를 받는지를 확인시켜 주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녀들이 분노하게되고 그 징계가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역효과를 냅니다. 부모 자신들이 믿음으로 살 때는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주일이니, 텔레비 보는 일이나, 공부하는 것도 하지말라”해서 그 아이가 어릴 때에 잘 순종합니다. 그래서 종종 칭찬을 받았는데, 어떤 때는 그 부모자신이 신앙에 힘이 떨어져서 주일에 교회도 안 가고 텔레비나 보고 앉아 있고, 그 자녀에게 성적이 떨어지니 오늘은 가지말고,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라 한다면, 그 아이는 어떤 교훈을 따르겠습니까 아이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자녀들이 노여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행동이 일치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품도 변덕스럽지 않고, 우리들의 행동이 말과 다른 엉뚱한 행위를 하지 않을 때에 징계가 바로됩니다. 아이들은 어리석습니다. 부모하는 대로 따라합니다. 또 이 세대는 자신에게 좋으면 옳은 것이고, 제게 싫은 것은 다 나쁜 것으로 인식하는 악한 세대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정로가 무엇인가 먼저 가르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런 때에라도 부모가 실수했지만, 하나님께 회개하는 자세를 가지면 그 자녀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이런 외식되고 잘못된 행위를 해도 하나님이 보시지 않고,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면 그 자녀에게 독약을 먹이는 것이 낫습니다.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습니다.
3. 또, 부모가 징계하더라도 그 때의 형편에 대하여 잘 못하거나 자녀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서는 자녀로 분노케합니다. 훈계하는 부모의 징계가 자녀의 어리고, 이리석음을 이해 못하거나, 그 상황을 들어보기도 전에 부모가 마음대로 단정을 짓고, 자기 기준에서 징계부터 할 때에 그 자녀는 훈계와 책망을 듣지 않게되고, 반발합니다. 이말씀은 그들의 잘못하고, 죄악된 행위를 무조건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약함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자녀들은 세대차를 주장하면서 부모님들의 몰이해를 분노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는 징벌을 가하려는 욕심에서 아주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을 요구하기도하고, 그것을 그 자녀가 이루지 못했을 때에 흥분하고 어떤 해명도 듣지 않고, 징계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결코 부당하거나 불합리하거나,무리해서는 안됩니다.
4.또 부모들은 결코 이기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마치 자신의 소유인줄 알고 제 마음대로 자녀를 만들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잊고, 제 욕심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누가 자기 자식을 공부시킬 부모가 있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라도 자신의 자녀에게 글을 가르치기는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애착심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부모가 감정을 억제 못하기 때문에 손이 올라가고 급기야 그 공부는 끝장나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자녀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기업이요, 선물인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들은 후견인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해야하고, 우리들이 무엇을 도울 것인가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때에 자녀에 대한 지나친 애착, 과잉보호의 부작용으로 마마보이가 나오게됩니다. 어떻게 귀한 인격을 우리가 낳고 기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자녀가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자녀는 동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내가 낳았다고해도 고귀한 그 인격은 내것이 아닙니다.자녀들의 인격을 인정해야합니다. 자녀소유욕, 우리들은 이것에서 벗어나야합니다.이럴 때에 우리는 내 자녀나, 다른 집의 자녀나 다 귀하게 여겨지고, 하나님의 소유로서 소중한 인격의 가치를 알게됩니다. 괜히 섭섭하고, 자녀를 원망하고, 지나친 기대를 하고, 제가 못이룬 꿈을 그 아이를 통해서 성취하려는 못난 부모 때문에 얼마나 아이들이 분노합니까 이런 부모 때문에 결혼도 제대로 못하고, 가정을 이룬 자녀들 조차 죄를 짓는 것 같은 마음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4. 그러나 옳은 징계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분노하고, 거부하는 자녀를 겁을 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먼저 고쳐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징계는 지나치게 가혹해서는 안됩니다. 신앙 좋은 부모들이 주위의 개탄할만한 타락현상을 보고 비판하면서 겪는 위험성이 이것입니다. 징계는 잔혹해서는 안되고, 언제나 사랑으로 해야합니다. 인격을 업신여기고, 학대를 하는 징계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정당한 이유, 정당한 기회, 정당한 징계는 그 아이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게합니다. 그러나 가혹하고, 인격을 짓밟는 징계는 그 아이로 하여금 영원히 그 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지존파 일당의 청년들이 경찰들의 자상하게 대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자백했고,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사형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푸는 수단, 부모들이 사회에서 받은 억압을 자녀에게 푸는 수단으로 징계를 사용할 위험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목회자가 교인에 대해서 이럴 위험도 많습니다.
셋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양육해야합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했습니다. 먼저 징계의 필요성을 인정해야합니다. 잘못된 징계, 가혹한 징계는 안하는 것 보다 더 악영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제 믿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주의 교양으로 훈계해야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는 교양으로 양육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본문의 ‘교양’은 교육, 훈련, 징계의 의미를 가집니다. 자녀를 징계해서 그 잘못을 교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훈계’는 말씀으로 자녀를 교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主의’ 교양과 훈계를 하라= ‘주 안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육하시는 그 교양과 훈계로써 네 자녀를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를 어떻게 양육하십니까 오래 참으심으로 양육합니다. 우리를 대하되 하나님은 천년을 하루 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참으심으로 기어이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생각합시다. 우리가 아이를 기르면서 참지 못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아이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한다든지, 형편없는 행위를 할 때에도 일단은 내 감정대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교육적으로 생각하면서 참아야합니다. 당장 무엇을 결판낼 듯이 해서 바로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의 아이의 행위를 보아도 나를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바로 징계하는 것은 주의 교양이 아닙니다.주님의 참으심을 생각합시다. 우리들의 징계와 교훈은 그 동기가 언제나 사랑이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양육하십니다. 당장에는 죽을 것 같은 벌 같이 우리를 징벌하셔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동기로서 하셨기 때문에 패역하고 목이 곧은 우리라도 후에는 깨닫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까 매를 들어도 사랑하므로 드는 매에는 자식들이 반감을 가지지 않고, 회개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격분하는 미움의 감정을 그 매에 실으면, 살 속깊이 박혀서 부모를 저주하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시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희생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가 깊이 박혀 있는 것은 그들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감사하며 사은하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희생없는 부모를 누가 공경하겠습니까 오늘에 자녀들만 개인주의 된 것이 아니라, 부모들도 자녀에게 대해서 개인주의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 부부가 더 중요하지 자녀는 키워봐야 소용없다. 이런 부모에게 자녀가 훈계, 징계를 받지 않습니다. 주님께 우리가 헌신하고, 훈계와 징계라도 달게 받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의 희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권면하시고, 때로는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를 사랑하면 권면과 책망을 아끼지 않아야합니다. 힘이 들고, 귀찮아도 가르치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잠6:20)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잠13: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진정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먼 길로 갈 때에 가시로 담으로 막으시고, 때로는 채찍을 때리심으로 징계해서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주의 교양과 훈계로써 사랑으로, 오래참음으로, 교훈과 책망을 하고, 징계할 때에 그 영혼을 음부에서 음녀의 꾀는 미혹에서 건질것이요,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초달하지 못하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그 영혼을 아끼지 아니하는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못된 가혹한 징계로, 우리의 감정적인 분노로,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불합리, 무리로 인하여 아이들을 노엽게하여 망치는 결과를 맺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먼저 성령님의 충만을 힘입고, 우리 하나님아버지께서 자녀되는 우리들에게 오래참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희생으로, 교훈과 책망과 징계로서 우리를 양육하듯이 우리 아이들에게 교육한다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우리 아이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이 막중한 양육의 책임을 우리 부모들에게,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우리를 양육하시는 그 교양과 훈계로써 자녀 양욱을 할 때에 우리들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우리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인격자로 양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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