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의 자녀들 (엡6:4)
본문
우리는 지난 주일 오후에 우리들의 자녀들에 대하여 어떻게 양육할 것을 성경이 말씀한 것을 증거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엡6:4말씀에서 이름같이 우리들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아야합니다. 또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에 바로 양육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배시간과 학교, 동네, 가정에서 하는 모든 행실은 우리 교회에서 선포되는 진리를 반영하는 것이 됩니다. 만일 불신자들이 신자들의 가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서 자기들의 가정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들은 성경은 거짓이며,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도 거짓이며, 우리가 믿고바라보는 진리들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부모가 짊어져야할 중대한 책임입니다. 또한 이 시간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녀의 입장에 있는 우리 학생들은 이 책임이 있는 줄 알고 여호와 하나님께 욕이 되지 않도록 부모님들이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써 양육할 때에 그 말씀에 잘 순종하여야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가정이 바로 세워짐으로써 바로 우리 가정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곳이 되게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 자녀를 일차적으로 바로 양육할 것은 아무래도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낼 뿐 아니라, 아주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만 배우는데, 본 그대로 인격이 형성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이 책임을 함께 지도록 말씀하셨음을 증거하고자합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넓은 의미의 영적인 가족입니다. 교회에서 우리 자녀들이 보내는 시간은 일주간에 몇 시간, 혹 한 시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자녀들이 바로 양육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이 시간 말씀드리려합니다. 교회는 이 자녀교육에 대해 부모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또 부모들은 이런 교회를 언짢아하지 않고 교회에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있어야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서로 도와서 우리 자녀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시간은 예배시간입니다. 물론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제도는 아이들 신앙교육의 체계화를 위해 편의상 나온 제도입니다. 물론 주일학교는 아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장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주일학교하면, 유년주일학교, 중 고등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주일학교 보다 먼저 아주 어린 유아 자녀들이 부모들과 함께 대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 어린 유아자녀들을 바로 양육하겠습니까 이것도 말씀하신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하면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라도 어머니의 등에 업고서 예배에 참석시키려하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예배에 참석을 했으나 칭얼거리는 아이, 아니면 조금 자라면 마구 뛰어다니려고 해서 어머니는 그 아이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려워하는 것은 자기 아이 때문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교인들의 눈총입니다. “왜 아이를 저렇게 놔두느냐, 아이를 제 마음대로 키운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하면서 핀찬과 그 따가운 눈총에 그만 아기들 어머니는 아기들 때문에 교회 출석하는 일도 꺼리게됩니다. 말하기를 예배시간만 되면 엄마 옆에 붙어서 아무 소리 않고 예배 마치는 시간까지 잘 자는 아이들을 참 교육된 아이라고 합니다. 엄마가 기도많이 했다고 하며 칭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주간 기도하라고 구역장들이나, 주의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예배에 참석시켜야 제일 잘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시간에 잘 자게 하는 것이 제일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도 은혜를 받도록 해야합니다. 구약 성경에 여호수아 때 아이성을 함락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읽어주었습니다. 정말로 긴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맨 처음에 언급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유사들, 재판장들입니다. 그러나 (수8:35)에는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이스라엘 온 회중 가운데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장 아장 걷는 아이들도 그 회중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유다는 모압과 암몬의 동맹군에게 침략을 당합니다. 여호사밧왕은 즉시 국가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온나라에 금식을 선포합니다. 우다의 모든 성읍에서 온 사람들이 여호사밧 왕이 친히 큰 회중을 기도로 인도하는 성전으로 모여들었음을 발견합니다. (대하20:13)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이 때도 보면 유아들과 좀 더 나이든 많은 아이들이 예배하는 무리 중에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성전은 아이들에게 제한된 구역이 아닙니다. 그들도 어른들과 함께 기도하고 예배들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되었다가 그 땅에 돌아온 사람들의 예배를 드릴 때에 에스라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느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 말씀에도 남자, 여자 할 것없이 뭇 백성들이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들이 다 모였는데, 새벽부터 오정까지 그 율법책의 말씀을 읽기만 했는데도 그들에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위와 같은 말씀들은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어떤 중심으로 예배에 참여해야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아직 걸음도 걷지 못하는 어린 유아들, 말도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이들이 그 예배의 회중에 참여했을 때에 그 아이들을 그 예배 때에 졸게하려고 참석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어떻게 예배에 참여하겠는가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말씀하시길,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복음을 깨닫는데에 대해서도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더 잘 깨닫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 같은 자가 깨닫는다는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 문자 그대로 어린 아이가 더 잘 깨닫고 실행도 더 잘합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영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령님께서 감동시키지 않으면 어떤 세상의 학 박사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참여한 아이가 지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도 태교를 말하지만, 예수님을 뱃속에 품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갔을 때에 (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어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는데 주님은 누구의 희생을 받으셨습니까 어린아이입니다. 그가 몇살인지 모르지만, 좌우지간에 그 아이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찬송한 사람들도 아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교육의 편의상 주일학교, 학생회를 나누어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 대예배라는 것은 모든 우리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이번 5월 31일 주일 오전에야 우리는 비로소 대예배를 한번 드려 보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은 이런 취지에서 모든 중 고등부 학생들을 장년부 예배에 참여시켰습니다. 찬송가도 주일학교 때부터 같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중고등부를 이름도 이상한 중간반이라고 한 것은 이 학생들이 지금은 아직 어른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지만, 이들이 자라서 장년반 예배에 참석할수 있도록한다는 취지입니다. 주일학교와 장년부의 중간위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부교회서는 주일예배때는 장년부가 오전도 4000명, 오후도 3500명이상, 수요일도 2000명, 금요일도 2000명입니다. 새벽기도가 700명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을 업고 예배를 드리면서 때로는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누구하나 왜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예배를 방해하나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배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와야 하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 아이 때문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이를 바로 양육하도록 하실 것이고, 그 어머니의 구원도 바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유년주일학교에 예배 시간이라야 불과 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그 한시간이라도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중 고등부 학생들은 물론 주일학교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장년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알아야합니다. 어떤 교회는 토요일이나, 다른 요일에 학생회 모임을 가지고 마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실은 대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일에 우리 학생들이 지적으로도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더 열심이지 않습니까 어떠하든지 예배에 감격에 빠져야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 교회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예배에 참여하는 여기 주로 3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대하여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합니다. 유아실 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바깥이나,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송구스런 마음을 가지고 떠드는 아이, 우는 아이들이 있을 때에 그 어머니를 도와서 그 아이 때문에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에배를 바로 드려서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유년주일학교, 중, 고등부 학생들이 내 자녀가 아니라도 관심가지고 내 자녀들을 양육하는 이상으로 애정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이 모든 자녀 양육책임은 우리 가정과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양육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징계해야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할 때에 바로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 자녀를 일차적으로 바로 양육할 것은 아무래도 가정입니다. 가정에서 제일 시간을 많이 보낼 뿐 아니라, 아주 어릴 때에는 부모에게만 배우는데, 본 그대로 인격이 형성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이 책임을 함께 지도록 말씀하셨음을 증거하고자합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더 넓은 의미의 영적인 가족입니다. 교회에서 우리 자녀들이 보내는 시간은 일주간에 몇 시간, 혹 한 시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자녀들이 바로 양육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이 시간 말씀드리려합니다. 교회는 이 자녀교육에 대해 부모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야합니다. 또 부모들은 이런 교회를 언짢아하지 않고 교회에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가 있어야합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서로 도와서 우리 자녀들이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시간은 예배시간입니다. 물론 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가 있을 것입니다. 주일학교제도는 아이들 신앙교육의 체계화를 위해 편의상 나온 제도입니다. 물론 주일학교는 아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장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선은 주일학교하면, 유년주일학교, 중 고등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주일학교 보다 먼저 아주 어린 유아 자녀들이 부모들과 함께 대예배시간에 참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이 어린 유아자녀들을 바로 양육하겠습니까 이것도 말씀하신대로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하면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라도 어머니의 등에 업고서 예배에 참석시키려하는 것은 어머니로서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예배에 참석을 했으나 칭얼거리는 아이, 아니면 조금 자라면 마구 뛰어다니려고 해서 어머니는 그 아이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작 어려워하는 것은 자기 아이 때문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교인들의 눈총입니다. “왜 아이를 저렇게 놔두느냐, 아이를 제 마음대로 키운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하면서 핀찬과 그 따가운 눈총에 그만 아기들 어머니는 아기들 때문에 교회 출석하는 일도 꺼리게됩니다. 말하기를 예배시간만 되면 엄마 옆에 붙어서 아무 소리 않고 예배 마치는 시간까지 잘 자는 아이들을 참 교육된 아이라고 합니다. 엄마가 기도많이 했다고 하며 칭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일주간 기도하라고 구역장들이나, 주의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라도 예배에 참석시켜야 제일 잘한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시간에 잘 자게 하는 것이 제일 잘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아이도 은혜를 받도록 해야합니다. 구약 성경에 여호수아 때 아이성을 함락한 이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에배를 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들을 읽어주었습니다. 정말로 긴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맨 처음에 언급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유사들, 재판장들입니다. 그러나 (수8:35)에는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이스라엘 온 회중 가운데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장 아장 걷는 아이들도 그 회중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0장에서 유다는 모압과 암몬의 동맹군에게 침략을 당합니다. 여호사밧왕은 즉시 국가적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온나라에 금식을 선포합니다. 우다의 모든 성읍에서 온 사람들이 여호사밧 왕이 친히 큰 회중을 기도로 인도하는 성전으로 모여들었음을 발견합니다. (대하20:13)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이 때도 보면 유아들과 좀 더 나이든 많은 아이들이 예배하는 무리 중에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성전은 아이들에게 제한된 구역이 아닙니다. 그들도 어른들과 함께 기도하고 예배들렸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되었다가 그 땅에 돌아온 사람들의 예배를 드릴 때에 에스라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느8: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느8: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여기 말씀에도 남자, 여자 할 것없이 뭇 백성들이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들이 다 모였는데, 새벽부터 오정까지 그 율법책의 말씀을 읽기만 했는데도 그들에게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위와 같은 말씀들은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어떤 중심으로 예배에 참여해야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아직 걸음도 걷지 못하는 어린 유아들, 말도 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이들이 그 예배의 회중에 참여했을 때에 그 아이들을 그 예배 때에 졸게하려고 참석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어떻게 예배에 참여하겠는가 하지만,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말씀하시길,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 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 복음을 깨닫는데에 대해서도 (마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더 잘 깨닫는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 같은 자가 깨닫는다는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은혜주시면 문자 그대로 어린 아이가 더 잘 깨닫고 실행도 더 잘합니다. 여러분,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을 믿습니까 영이 있음을 믿습니까 성령님께서 감동시키지 않으면 어떤 세상의 학 박사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배에 참여한 아이가 지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하면 안됩니다.
세상에서도 태교를 말하지만, 예수님을 뱃속에 품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에게 갔을 때에 (눅1: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어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시는데 주님은 누구의 희생을 받으셨습니까 어린아이입니다. 그가 몇살인지 모르지만, 좌우지간에 그 아이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호산나 찬송한 사람들도 아이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교육의 편의상 주일학교, 학생회를 나누어서 예배를 드리지만, 이 대예배라는 것은 모든 우리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 이번 5월 31일 주일 오전에야 우리는 비로소 대예배를 한번 드려 보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은 이런 취지에서 모든 중 고등부 학생들을 장년부 예배에 참여시켰습니다. 찬송가도 주일학교 때부터 같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중고등부를 이름도 이상한 중간반이라고 한 것은 이 학생들이 지금은 아직 어른 예배에 참석하여 말씀을 깨닫지 못하지만, 이들이 자라서 장년반 예배에 참석할수 있도록한다는 취지입니다. 주일학교와 장년부의 중간위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서부교회서는 주일예배때는 장년부가 오전도 4000명, 오후도 3500명이상, 수요일도 2000명, 금요일도 2000명입니다. 새벽기도가 700명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을 업고 예배를 드리면서 때로는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누구하나 왜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예배를 방해하나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배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와야 하는 어머니들은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해야하는지 모릅니다.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으니, 아이 때문에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아이를 바로 양육하도록 하실 것이고, 그 어머니의 구원도 바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유년주일학교와 중고등부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유년주일학교에 예배 시간이라야 불과 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사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그 한시간이라도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중 고등부 학생들은 물론 주일학교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장년부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알아야합니다. 어떤 교회는 토요일이나, 다른 요일에 학생회 모임을 가지고 마는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실은 대예배에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일에 우리 학생들이 지적으로도 모자람이 없고, 오히려 더 열심이지 않습니까 어떠하든지 예배에 감격에 빠져야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우리 교회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예배에 참여하는 여기 주로 3여전도회 회원들에게 대하여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합니다. 유아실 조차 마련하지 못하여 바깥이나,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송구스런 마음을 가지고 떠드는 아이, 우는 아이들이 있을 때에 그 어머니를 도와서 그 아이 때문에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아이가 에배를 바로 드려서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협력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유년주일학교, 중, 고등부 학생들이 내 자녀가 아니라도 관심가지고 내 자녀들을 양육하는 이상으로 애정을 기울여야할 것입니다. 이 모든 자녀 양육책임은 우리 가정과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양육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징계해야합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서 양육할 때에 바로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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