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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 길에서 생긴일 (눅24:25-35)

본문

본문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동행하고 계시는데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 한체로 절망을 안고 엠마오로 향해 나아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이러한 영적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먼저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매사에 동행해 주시는데도 이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더 나아가서는 절망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주님께서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내가 가는 삶의 길목에 동행하고 계시지 않는데도 주님이 동행하는 줄로 착각하다가 엄청난 실수를 일으키는 입니다.
3) 그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닌데도 주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행하다가 주님의 뜻과는 너무 멀리 떠나있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라고 하는 마을로 내려가는 두제자를 보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한 사람은 글로바요 또한 사람은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두인물에 대해 주석가들과 신학자들은 정확하게 누구라고 규정을 짓고 있지는 못하지만 두 가지 해석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해석은 그들이 12사도에는 들지 못했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를 지켜본 사도 그룹에 속한 자들이라는 해석과, 두번째 해석은 부부였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길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가다가 집에 주님을 모셨다는 기록이 이를 밑바침하여 주고 있습니다. 여하튼 그들은 누구이든 예루살렘을 벗어나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 지역 까지는 약 7마일 정도의 거리로서 보통 사람이 걷는 걸음으로 2시간 남짓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왜 이들이 이곳으로 가고 있을까요 그들이 제자그룹에 속해 있는 자라는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3년 반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밖에는 세상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고 따른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21절 기록을 보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완전하게 믿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흘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 처형 되어진 예수님을 보고 자기의 소망과 기대감이 완전히 무너져 기쁨 대신 슬픔을 안고, 소망 대신 절망을 안고, 능력 대신 무능력을 안고, 엠마오 길로 내려가고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있지만, 믿는 동안에 자기가 상상할 수 없었던 어떤 일이 믿음의 앞길에 나타나면, 이처럼 뒤돌아서서 엠마오 길로 향해 버리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는 사실입니다.
실재로 세상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할 지라도 자신의 마음속으로 엠마오 길을 걸어보지 않은 성도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자기가 직접 보지 않는 일은 마음 속에 믿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문 앞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했노라고 증거를 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빈 무덤을 가 보았던 여인들이 부활을 전 했습니다. 그리고 33절 이하를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벌써 열한 사도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자들에게, 또 시몬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활이 믿어지지 않아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은혜를 받았는데, 다른 성도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변화를 받아 새로운 삷을 살고 있는데, 자신은 더디 믿는 마음 때문에 머리로는 수긍을 하고, 긍정을 하지만, 마음으로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바로 엠마오 길의 두제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가 먼저 믿었고, 남이 나중 믿었지만, 받은 은혜가 크다는 사실을 말할 때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입술로는 긍정하지만, 실지 마음으로 믿어지지 않고 수긍하지 못합니까 지금 그런 사람은 이미 엠마오의 길로 수마일이나 걸어와 버린 자입니다. 또한 그들은 바로 사흘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끔찍한 사건을 통하여 그들 가슴 속에 분노와 비애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내려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 사건을 목격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십자가의 사건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 마음속에는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과연 지성의 도시,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그리고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이 움직이고 있는 예루살렘 사회에 과연 양심이 살아있는 것일까 올바른 진리를 외치는 자는 저렇게 이단자가 되어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되 그것도 불법으로 침략하여 무력으로 인권과 주권을 짓밟고 있는 로마병정들에게 자기 동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 예수님을 내어주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이 땅에 약자는 설 땅이 없는 것이며 사회정의는 사라진지 오래이며 무엇이 신앙이며 무엇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무엇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신앙의 갈등과 모순이 그의 가슴 속에 느껴진 것입니다. 무엇이 애국이며 무엇이 불법인가하는 가치관의 혼동이 그의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고 보아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사소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면 교회가 이럴 수가 있느냐며 엠마오 길로 가려는 준비를 서두르는 사람도 적지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이럴 수 있느냐,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그것도 평신도도 아닌 직분자가 그럴 수 있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혹시 엠마오길로 가려하는 자는 없습니까 이와같은 마음이 이 두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악한 세상의 모습과 불의를 보고도 말 못하고 죽음이 두려워 떠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의 내면 때문에 자기 스스로의 울분과 격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의 소망이라는 확신마저 포기한 채 엠마오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어떤 일이 생겼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또 서로가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와 함께 더욱 오래 있고 싶어하는 일이 생겼습니다.(29) 본문 29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라고 말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풀어주신 성경의 말씀을 통해 심령에 변화가 온 것입니다. 그 놀라운 진리의 말씀을 더 듣고 싶어 열정적으로 메어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그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말씀이 놀라워 더 길을 가려하시는 것을 만류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는데 강권하여 모시고 갔다는 기록이 그와 함께 있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1) 막 1장에 나오는 문둥 병자가 고침받고 주님과 함께 오래있기를 원하였습니다.
2) 여리고 성의 소경 거지 바디메오가 그러하였습니다.
3) 베다니에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그러하였습니다.
4) 세금장이 삭개오가 그러하였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기를 요청했습니다.
둘째, 눈이 밝아져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31)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생활 속에서 급선무 되어져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예수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일입니다.
1) 스데반처럼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도 우리의 영안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2) 변화산에서 기도할 때의 베드로처럼 믿음의 눈이 열려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그리스도가 눈에 보여야 합니다.
3) 엘리사의 종 게하시처럼 눈이 열려 불말과 불병거와 영적 군사들이 우리 눈에 보여야 합니다.
4) 다메섹 도상으로 나아가는 사울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이 곳에 임재해 계시는 주님을 느껴야 합니다. 5) 모세처럼 눈이 열려 시내산 가시덤불의 불붙은 광경 속에서 하나님의 실존을 깨달아야 합니다. 뜨여지지 않는 우리의 눈을 위해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셋째, 그들 속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32) 이 두제자는 가는 길목에서 주님인줄은 몰랐으나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었습니다. 25절의 말씀을 보면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더디 믿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믿음에 이르는 속도가 너무 늦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줘도 마음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여러가지도 아닌 한가지를 믿는데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열리고 이젠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더디 믿어지는 상태를 벗어나 믿음에 이르는 속도가 빨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뜨거운 불일수록 물건을 태우는 속도가 빠르고 쉽게 태우듯이 쉽게 믿어지는 마음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말한다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의심을 가져다주는 불신앙이 완전하게 타 없어져버린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쉽게 믿지 못하는 더딘 마음이 있는데도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디 믿는 자신을 향해 자기 스스로 나는 매사에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지 않씀니까 자신은 이성적으로 사리분별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함부로 믿지 않는다며 더디 믿는 일을 스스로 추켜 세우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은혜로운 말씀이 귓전에 들려와도 입술로는 커녕 마음 속으로라도 아멘의 반응이 없는 자는 분명 마음이 뜨거워져야 할 사람입니다.
넷째,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습니다.(33)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는 많은 신앙인으로부터 부활 소식을 들었으나 믿지 못하던 그들이 엠마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난 후 당장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자기들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가 분명 오후였습니다. 거의 두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면 걷던 그 길을 다시 두시간이나 걸어야 했습니다. 밤이 지나고 다음 날, 날이 훤히 밝으면 가고자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열리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밤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외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이러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자기의 받은 은혜를 속으로만 삭이므로 고후6:1절 말씀처럼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결과를 드러내지 않고 나가서 외치는 은혜받은 자를 주님이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왜 이와같은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요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까닭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본문 속에서 몇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모든 성경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아니라 성경전체를 통한 진리의 흐름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만을 받아들이는 자는 신앙이 잘못되거나 이단사설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성경은 전체적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위험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전부의 흐름이 누구를 말하고 있는가를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어떤 사람이 보화만 사지않고 밭 전체를 샀듯이 성경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끔 이와같이 엠마오 도상에 놓인 신앙상태에 이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에 우리는 기도를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부르짖을 때, 기도하는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주며, 식어버린 우리의 영적 가슴을 뜨겁게 하며,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그리스도를 외칠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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