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을 통하여 얻은 교훈 (히12:3-13)
본문
여러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여러 가지 훌륭한 교훈을 배울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역사의 교훈을 바로 배우고, 들을 줄 압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역사속에 나타난 비극을 되풀이당하기가 쉽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9년전에, 북한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남한을 기습 공격하여 6.25 동란을 일으켰습니다. 6.25 사변 비극에서 우리의 슬픈 역사는 이렇게 집계되어 있습니다. 국군 전사자가 146,837명, 유엔군 전사자가 36,837명이며, 부상자는 국군이 717,003명, 유엔군이 11,580명이요 실종자가 국군이 43,572,유엔군이
1,554명이었고, 우리의 학도의용군이 352개교에서
2,020여명이 희생당 했으며 납치자가 84,532명,행방불명된 자가 30
3,212명,부상자가 229,625명, 전쟁 미망인이 5십만명, 고아가 5만9천명이요, 남쪽으로 넘어온 피난 민이 618,000명이었습니다. 이같은 비극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한계 상황은 전쟁과 병마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처럼 전쟁과 병마와 죽음은 우리모두가 예방하지 못할 때 비극적인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년 전 출애룹의 고통을 오늘도 되색이면서 이 지구상에서 꿋꿋하게 생존하여가는 민족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6.25의 고난을 뼈저리게 체험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황페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난 의지력과 투지를 가진 저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Kierdegaard)는 "내가 고통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suffer, therefore I am.)"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흑암중에서도 끝까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우리가 때때로 징계를 받으나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 징계를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랠프 사크만은 사람이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네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개인의 죄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친다든지 윤리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둘째, 집단적인 죄악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기타 공공사회의 집단적인 죄로 인해 무죄하고 연약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셋째, 실수로 말미암은 고통입니다. 교통사고와 같이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당합니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고통입니다. 자연의 지혜로 인한 고통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의 깊은 뜻과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1우리가 평안하고 즐거운 때는 우리에게 귓속말로 말씀하시고, 2열심히 일할 때는 보통말로 말씀하시고, 3고통과 시련중에서는 고함을 질러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잘못해서 수면제를 먹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계속해서 잠만 자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에게 데려가니 의사가 보고는 "이 아이가 앞으로 4시간 이상을 더 자게 되면 죽게 될테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깨워야만 합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꼬집고 때려서 마침내 깨워 살려냈습니다. 그대로 두면 영원히 잠에 빠져 죽어버리기 때문에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잠을 깨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새로운 뜻과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련을 통하여 얻은 교훈"라는 제목으로 몇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시련을 통해서 보다 큰 은혜를 깨닫고 됩니다. 옛날 우스 땅에 모든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 자녀들이 있었고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건강했고 정직했으며 명성도 높아서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하루는 폭풍이 불어와 지붕이 무너져서 10명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재앙으로 수천 마리나 되는 가축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던 그에게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슴니다.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바로 욥 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실지니이다"(욥1:21)라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욥과 같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항상 찔리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간질병이라고도 하고, 또 안질병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침받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9)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찔리는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받아야 합니다.
2.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새로워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차원높은 인격을 얻게 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위대한 학교에서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17) 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과거의 모든 망상은 다 사라져 버리고 강한 의지와 투지와 지혜와 소망과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엔나의 어느 음악교수가 노래를 잘 부르는 한 학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칭찬할 만한 좋은 성대를 가지고 있소.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그에게 너무 친절했소. 어느 땐가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다면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가 될 것이오."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신앙인은 모두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 인격이 다듬어진다는 말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겸손해지고, 너그러워지며, 아량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교훈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라는, 민족주의를 지고의 이상으로 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그 동네에 아주 똑똑한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인집의 요강을 아침마다 깨끗이 닦아 놓았습니다.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이 청년에게 학자금을 주고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로 보내서 공부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교향인 오산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한번은 졸업반 학생들이 그 선생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머슴살이했던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시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시오." 고난과 시련의 역경 속에서 인격은 단련되는 법 입니다.
3.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합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뢰할지어다"(사50:10). 티 피어슨 목사(1837-1911)가 제지 공장을 견학했을 때, 더럽고 낡은 넝마 조각들이 좋은 품질의 하얀 증권 용지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정의 과정이 끝에 쌓인 아주 더러운 넝마 더미와 또 다른 쪽 끝에 쌓인 깨끗하고 흠하나 없는 하얀 종이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더러운 넝마 조각들이 이렇게 새로운 모양으로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을 겪는 것인가! 산산조각으로 찢기고 … 모든 때가 빠질 때까지 표백제로 표백되며, 되풀이해서 씻고 또 씻고. 마치 우리의 더러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통해 깨끗해지는 것과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성경은 '시련의 공장을 거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 앉은 욥, 사자굴에 있는 다니엘, 외로운 밧모섬에 있는 요한, '육체의 기사'를 가진 바울, 또 히브리서 11장 35-40절에 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 이와 같은 시련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더 견고케 합니다. 예레미야 38:1-13을 보면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의 역사적 정황은 예루살렘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바벨론의 주력 부대가 애굽 전선으로 이동한 틈을 탄 잠깐의 공백기이거나 아니면 애굽 전선에서 승리한 바벨론의 주력 부대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된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겪는 혹독한 시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준비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진 예레미야(1-6)는 왕을 지키는 근위대 뜰로 옮긴 뒤로(37:21) 예레미야는 약간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에 백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때를 이용해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메시지를 네 명의 고위 방백들이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훌로서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칼, 기근, 혹은 재앙으로 죽을 것이며 바벨론으로 탈주한 자들만이 살아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유일한 소망은 항복하는 것뿐 이라는 것이었습니다(렘21:3-10). 그 방백들은 시드기야왕에게 가서 불길한 예언을 한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예레미야가 반역적이고도 불길한 예언을 하여 군인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실망시키며 낙담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안일을 더 생각하는 시드기야가 처음에는 예레미야를 보호하는데 동의했다(렘37:18-21)할지라도 이제는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그들의 간청에 반대할 수 없다는 어설픈 변명을 합니다.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데리고 가 시위대의 뜰에 있는 바위를 파서 만든 큰 구덩이에 넣었습니다. 그는 진흙탕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전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전파될 경우 그 이웃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격리되는 아픔이 올 것이 예상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벳멜렉의 상소로 예레미야가 구출됨(38:7-13) 대다수의 많은 동포들은 그가 죽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극적으로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왕궁을 돌보는 내시인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황급히 왕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고합니다. 여기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한 방백들의 특별한 계획을 몰랐거나 그들이 이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립니다. 죽음 앞에서 예레미야를 극적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배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것은 키와 닻입니다. 키는 배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랑이 일어날 때에 내려야 할 닻입니다. 닻이 없으면 배는 풍랑에 밀려 파손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환난중에 믿음의 닻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믿음의 닻을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 굳은 신앙 가운데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1,554명이었고, 우리의 학도의용군이 352개교에서
2,020여명이 희생당 했으며 납치자가 84,532명,행방불명된 자가 30
3,212명,부상자가 229,625명, 전쟁 미망인이 5십만명, 고아가 5만9천명이요, 남쪽으로 넘어온 피난 민이 618,000명이었습니다. 이같은 비극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한계 상황은 전쟁과 병마와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처럼 전쟁과 병마와 죽음은 우리모두가 예방하지 못할 때 비극적인 마침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년 전 출애룹의 고통을 오늘도 되색이면서 이 지구상에서 꿋꿋하게 생존하여가는 민족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6.25의 고난을 뼈저리게 체험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황페한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난 의지력과 투지를 가진 저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Kierdegaard)는 "내가 고통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I suffer, therefore I am.)"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하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흑암중에서도 끝까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을 치하하고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는 우리가 때때로 징계를 받으나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그 징계를 통하여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설교가 랠프 사크만은 사람이 인간이 고통받는 이유를 네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개인의 죄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친다든지 윤리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둘째, 집단적인 죄악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혹은 기타 공공사회의 집단적인 죄로 인해 무죄하고 연약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셋째, 실수로 말미암은 고통입니다. 교통사고와 같이 다른 사람의 실수로 말미암아 내가 고통을 당합니다.
넷째, 불가항력적인 고통입니다. 자연의 지혜로 인한 고통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지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의 깊은 뜻과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루이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1우리가 평안하고 즐거운 때는 우리에게 귓속말로 말씀하시고, 2열심히 일할 때는 보통말로 말씀하시고, 3고통과 시련중에서는 고함을 질러서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잘못해서 수면제를 먹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이는 계속해서 잠만 자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에게 데려가니 의사가 보고는 "이 아이가 앞으로 4시간 이상을 더 자게 되면 죽게 될테니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 깨워야만 합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꼬집고 때려서 마침내 깨워 살려냈습니다. 그대로 두면 영원히 잠에 빠져 죽어버리기 때문에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잠을 깨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때때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잠을 깨우는 새로운 뜻과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시련을 통하여 얻은 교훈"라는 제목으로 몇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시련을 통해서 보다 큰 은혜를 깨닫고 됩니다. 옛날 우스 땅에 모든 복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열 자녀들이 있었고 가축을 많이 기르고 있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건강했고 정직했으며 명성도 높아서 주위의 모든 사람이 부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하루는 폭풍이 불어와 지붕이 무너져서 10명의 자식들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재앙으로 수천 마리나 되는 가축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건강하던 그에게 악창이 나서 기와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고통을 당하게 되었슴니다.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바로 욥 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런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실지니이다"(욥1:21)라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우리도 고난과 시련 속에서 욥과 같이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항상 찔리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것을 간질병이라고도 하고, 또 안질병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침받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그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9)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찔리는 가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받아야 합니다.
2.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을 세우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새로워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차원높은 인격을 얻게 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위대한 학교에서 연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17) 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과거의 모든 망상은 다 사라져 버리고 강한 의지와 투지와 지혜와 소망과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엔나의 어느 음악교수가 노래를 잘 부르는 한 학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학생은 칭찬할 만한 좋은 성대를 가지고 있소. 지금까지 그의 인생은 그에게 너무 친절했소. 어느 땐가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온다면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성악가가 될 것이오." 위대한 예술가,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신앙인은 모두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그 인격이 다듬어진다는 말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12:11) 눈물의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겸손해지고, 너그러워지며, 아량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교훈입니다. 평안북도 정주에 오산학교라는, 민족주의를 지고의 이상으로 삼는 학교가 있었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옛날 그 동네에 아주 똑똑한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했지만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는 주인집의 요강을 아침마다 깨끗이 닦아 놓았습니다. 주인은 이 청년이 머슴살이를 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이 청년에게 학자금을 주고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로 보내서 공부 시켰습니다. 마침내 그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교향인 오산에 내려와 오산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머슴살이하던 사람이 선생님이 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한번은 졸업반 학생들이 그 선생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머슴살이했던 그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시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시오." 고난과 시련의 역경 속에서 인격은 단련되는 법 입니다.
3.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게 합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뢰할지어다"(사50:10). 티 피어슨 목사(1837-1911)가 제지 공장을 견학했을 때, 더럽고 낡은 넝마 조각들이 좋은 품질의 하얀 증권 용지로 변하는 것을 보고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공정의 과정이 끝에 쌓인 아주 더러운 넝마 더미와 또 다른 쪽 끝에 쌓인 깨끗하고 흠하나 없는 하얀 종이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더러운 넝마 조각들이 이렇게 새로운 모양으로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큰 시련을 겪는 것인가! 산산조각으로 찢기고 … 모든 때가 빠질 때까지 표백제로 표백되며, 되풀이해서 씻고 또 씻고. 마치 우리의 더러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통해 깨끗해지는 것과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성경은 '시련의 공장을 거친'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 앉은 욥, 사자굴에 있는 다니엘, 외로운 밧모섬에 있는 요한, '육체의 기사'를 가진 바울, 또 히브리서 11장 35-40절에 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순교자들. 이와 같은 시련은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을 더욱 더 견고케 합니다. 예레미야 38:1-13을 보면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의 역사적 정황은 예루살렘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바벨론의 주력 부대가 애굽 전선으로 이동한 틈을 탄 잠깐의 공백기이거나 아니면 애굽 전선에서 승리한 바벨론의 주력 부대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된 기간으로 추정됩니다. 이때 선지자 예레미야가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을 전하는 것 때문에 겪는 혹독한 시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준비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진흙 구덩이 속에 던져진 예레미야(1-6)는 왕을 지키는 근위대 뜰로 옮긴 뒤로(37:21) 예레미야는 약간의 자유를 가질 수 있었기에 백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 때를 이용해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메시지를 네 명의 고위 방백들이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훌로서 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칼, 기근, 혹은 재앙으로 죽을 것이며 바벨론으로 탈주한 자들만이 살아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의 유일한 소망은 항복하는 것뿐 이라는 것이었습니다(렘21:3-10). 그 방백들은 시드기야왕에게 가서 불길한 예언을 한 예레미야를 죽이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예레미야가 반역적이고도 불길한 예언을 하여 군인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실망시키며 낙담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안일을 더 생각하는 시드기야가 처음에는 예레미야를 보호하는데 동의했다(렘37:18-21)할지라도 이제는 그의 생명을 찾는 자들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이 그들의 간청에 반대할 수 없다는 어설픈 변명을 합니다.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데리고 가 시위대의 뜰에 있는 바위를 파서 만든 큰 구덩이에 넣었습니다. 그는 진흙탕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전해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전파될 경우 그 이웃이나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격리되는 아픔이 올 것이 예상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벳멜렉의 상소로 예레미야가 구출됨(38:7-13) 대다수의 많은 동포들은 그가 죽기를 원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극적으로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왕궁을 돌보는 내시인 에벳멜렉은 예레미야의 위급한 상황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황급히 왕에게 가서 모든 사실을 고합니다. 여기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기 위한 방백들의 특별한 계획을 몰랐거나 그들이 이렇게까지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죽기 일보 직전에 있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립니다. 죽음 앞에서 예레미야를 극적으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배에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그것은 키와 닻입니다. 키는 배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랑이 일어날 때에 내려야 할 닻입니다. 닻이 없으면 배는 풍랑에 밀려 파손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환난중에 믿음의 닻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믿음의 닻을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망하지 아니하고 더 굳은 신앙 가운데 승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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