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충성스러운 서머나 교회 (계2:8-11)

본문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위치한 소아시아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입니다. 서머나 도시는 무역의 중심지였기에 부유하고 번창한 도시였으며 로마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했기에 로마 중앙정부로부터 큰 배려를 받았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데 앞장섰던 대표적인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예수님이 이들을 사단의 무리라 하실 정도로 그들은 정치와 결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악 조건의 상황속에 있던 서머나교회는 참으로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왜냐하면 책망은 하나도 없었고 칭찬만 받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께 위로받은 교회라는 뜻이요,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교회라는 뜻이요, 예수님께 격려를 받은 교회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우리 예수님의 위로와 인정과 격려하심을 함께 받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 먼저 서머나교회가 받은 위로는 어떤 위로입니까 (9절) 9절에 보니까 "궁핍과 환란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느교회를 막론하고 로마의 중앙정부로 부터, 혹은 유대의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심한 신앙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가 이 편지를 받은 시점은 그 환란란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 핍박에 있어서 네로와 쌍벽을 이루던 바로 도미티안 황제였습니다. 그는 선왕 네로가 세운 기독교 말살정책을 확대해서 조직적으로 진행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술 더떠서 자기를 신격화시켜 로마 식민지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자기를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이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이 숭배정책에 제일 먼저 정면으로 부딪친 자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투옥 당하거나 화형 당하거나 짐승에게 던져 지거나 톱으로 켜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극한 환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신앙탄압이 그들의 경제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사회적 진출이 막혔고 매매가 금지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관리들의 묵인하에 반대자들이 기독교인의 재산을 공공연하게 약탈하여 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이러한 사정 때문에 너무나 어렵고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이들이 환란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한 앞으로도 계속해서 환란을 당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나 저나, 혹은 교회에,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내맘대로 죄짓고 살다가 어려움을 만난다면 그런대로 이해하겠는데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대도 온갖 근심과 걱정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여러분,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내인생은 왜 이모양인가" 하며 신세타령을 해서도 안됩니다. "복이 있니 없니" 복타령을 해서도 안되고, 팔자 타령을 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니까 내가 당하는 크고 작은 모든 어려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요 또한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잠시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참새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피값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인데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 환란이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려움 있을 때마다 이는 잠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그 환란을 통해서 반드시 이루어 질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위로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진리는 하나님은 환란을 허락하시는 것만으로 그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경만 하시지 아니하십니다. 그 환란중에 함께 거하시며 환란을 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위로의 말씀이 서머나 교회 교인들에게 극렬한 환란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을 만한 충분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위로가 바로 9절 말씀입니다. 9절 말씀에서 목적어를 빼면 "내가 아노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아신다는 말씀인데 그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 입니까 8절에 보니까 처음이요 나중되신 예수님이라 하셨습니다. "처음과 나중"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역사를 시작하셨고,역사를 종결지으시며 뿐만아니라 그 역사를 섭리하는 "나 예수가 안다"는 뜻입니다.바로 "내가 안다"는 이 말씀한마디에 서머나교회 교인들은 믿음가운데 굳게 설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조금만 참는다면 교회와 여러분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히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 온갖 환란을 당하고 투옥당하고 순교당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극한 궁핍가운데 있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 한 마디에 서머나 교인들은 이것들을 다 이기고 남음이 있는 큰 위로가 그들의 마음에 넘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칠때도 있고 피곤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려다 보면 손해 보거나 어려움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처음이요 나중되는 나 예수가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지켜보고 있느니라" 라고. 이 말씀에 서머나교인들처럼 큰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서머나교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 없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예수님께서 알아주시는 신앙의 절개와 의지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적 삶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위해 쏟은 수고를 절대로 모르는체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 아십니다. 그리고는 여러분을 위로해 주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고 서머나교인들 처럼 새힘을 얻으셔서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에 더욱 힘쓰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이기선 목사님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일경이 고문을 할때마다 '주님은 저 위해 피흘러 돌아가셨는데 저도 고문을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며 고문을 견뎌내었습니다. 어느날 일경이 물었습니다. "영감, 천황 폐하가 기독교를 믿으면 죽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물음에 이기선 목사님은 "천국법도 지키고 국법도 지키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둘 다 지킬 수 있단 말이요"라는 물음에 이 목사님은 "하나님이 예수믿으라 했으니 예수 믿고, 천황이 죽으라 했으니 죽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순교적 신앙정신이 낳은 훌륭한 고백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2. 서머나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인정은 무엇입니까 (9) 서머나교회는 외부적으로 볼 때는 지질이도 가난하고 참으로 볼품없고 비천하게 보인 교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그리했고 자신들이 볼 때도 그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실상은 부요한 자니라"라고 인정하십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보면 재미있는 비교가 나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을 사단의 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하는 의미는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고 율법을 운운하고 종교적 행위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참으로 신실한 것 같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저들의 정체는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이 아니라 실상은 사단의 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보셨을 때 과연 서머나교인들과 같은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자칭 기독교인이요 실상은 사단의 회라는 심판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어느쪽이 우리의 실상입니까 가진것이 없고 좀 가난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실 때 우리는 결코 가난한자가 아닙니다. 실상은 믿음이 부요한 자인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고 좀 무식해 보여도, 비천해 보여도 예수님이 보시기에 존귀한 자입니다. 과연 이렇게 인정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말끝마다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말하고 주여 주여하지만 "실상은 나를 불신하고 있구나! 혼자 진실된 것 같지만 실상은 거짓된 자 로구나! 혼자 깨끗한 것 같이 하지만 실상은 구더기와 같구나! 혼자 봉사하고 충성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구나! 신앙의 연륜이 오래고 교회의 직분을 맡아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의 큰 일군이요 지도자이지만 실상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넘어지게 하는 자 로구나!" 이러한 책망을 듣지 아니하겠는지.한 번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엄숙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어떠한가 내가 나보기에 어떠한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주님 보시기에 내 실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하여 실상은 부요한 자로, 실상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로, 실상은 적은일에도 충성하는자로, 실상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 인정받게 되시기기를 바랍니다.
3. 그럼 서머나교회에게 주신 권면의 말씀은 무었입니까 (10)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죽는 순간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이요 죽는 한이 있어도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대개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하면 잘사는가" 에 있습니다. 왜 기를 쓰고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합니까 자녀들이 빌어먹지 않고 잘살게 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왜 아침부터 밤 늦게 까지 분주하게 뛰어 다닙니까 잘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보면 "얼마나 잘사는데 있느냐"라고 말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어떻게 하면 잘 죽느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잘살아 보았자 7-80년이지만 잘 죽어야 영원한 미래를 복되게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순간이라고 고백하면서 잘사는 일에만 관심있고 잘죽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면 이는 거짓된 신앙고백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연세 드신 어른들을 보면 "어떻하면 잘 죽을까" 하며 걱정하시는 분도 있긴 있습니다. "고생하지 말고 죽어야 할텐데. "갑자기 죽지 말아야 할텐데." 유언을 못하니까 갑자기 죽어도 안되고 자식들에게 페가 되니까 오래동안 병석에 누워 있어도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3일만 누웠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복은 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들이 장례치루기가 힘드니 한여름이나 한겨울에 죽어서는 안되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요일날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금요일에 죽으면 주일에 장례를 치루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토요일에 죽어서 주일에 성도들의 조문을 받고 월요일에 장례를 치루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역자를 생각해서 화요일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분도 있다고 합니다. 일주일 중 화요일만이 교역자가 예배에 부담없이 장례절차를 치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죽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언제 죽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죽음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가지 충성할 수 있어야 할터인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도록 죽어야 할터인데."하는 것을 의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요, 죽는 시간까지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엄습한다고 해도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요, 죽을 각오를 가지고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천당'으로 유명한 최봉석목사님은 1939년 6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2차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갔습니다. 40일 금식기도가 끝난후의 최목사님은 산송장이었습니다. 병 보석으로 나와 병원에서 15일간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가지 못하고 1944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최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시기전 '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나를 오라신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뿌린 피와 흘린 땀 위에 한국교회는 세워졌습니다. 오늘까지 한국교회가 역사의 격동과 격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피와 땀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죽도록 충성한 다음에 오는 상급 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바로 죽을 때 까지 충성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어떻게 책임져 주십니까 8절에 보니 예수님을 죽었다가 살아나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면 바로 이 부활의 영광에 동참시켜 주신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도 주신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세상에 있을 때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담보로 한 상급이기에 하늘나라에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최고 귀한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주님도 우리를 위해 하늘나라에서 최고의 것을 아끼지 아니히시고 주시는 것이 바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면류관은 죽도록 충성한자에게만 주어지는 상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죽도록 충성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 앞에 서는 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신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습니까 잘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잘 죽을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진실한 성도의 태도입니다. 물론 영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영생을 믿는 우리에게는 잘 죽을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잘 죽기 위해서 잘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머나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상고하며 우리 신앙을 세가지로 점검해 보았습니다.
첫째, 내 현재 생활이 예수님이 알아주실만한 신앙의 행위인가
둘째, 주님 보시기에 내 실상은 어떠한가
셋째,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만큼 죽을 준비를 잘하며 살고 있는가
이 세가지 말씀을 무기로 한번 영적 싸움을 싸워보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서머나교회 교인들이 받았던 위로와 인정과 격려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5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