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2:1-11)
본문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테일러라는 사람의 큰 농장에 짐이라는 소년이 일자리를 찾아 왔다. 주인 테일러 씨는 짐 소년에게 일자리를 주었다. 짐은 여름 내내 땔나무를 준비하고, 소를 맡아 키우고 부지런히 일을 잘했다. 그 동안 밥은 부엌에서 먹고 잠은 건초를 저장하는 창고에서 잤다. 일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 소년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안 주인은 “너같이 돈도 없고, 장래성이 없는 사람에게 나의 딸을 맡길 수 없다”고 냉정히 말했다. 짐은 아무 말도 없이 자기의 소유물을 챙겨 가지고 그 농장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농장 주인 테일러 씨는 건초 창고를 부수고 새로운 시설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옛날에 짐이 자던 창고 한구석 기둥에 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파서 새기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거기에 새겨놓은 이 소년의 성명은 ‘제임스 A. 가필드’ 였다. 제임스 A. 가필드라는 이름은 바로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약 100년전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허름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원고 뭉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출판사 사장은 그 원고를 보지도 않고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 비용을 부담한다 해도 출판 못한다고 박대했다. 그 남자는 말하기를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 데요.” 그 말을 듣은 출판사에서는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바로 톨스토이였다. 그러나 너무 늦어 버렸다. 그 출판사와는 인연이 끝났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사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교회에까지 이런 사고 방식이 침투해 있다는 데 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왜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되는 지를 함께 상고하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는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의 외부적인 빈부 귀천에 따라서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영혼을 마치 상품의 가격으로 취급하여 의복이나 그 사람의 소유 정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차별 대우란, 그 사람이 돈이 많다던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던가, 권력가나 유명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에게 굴복하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보시는 바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동일한 심판 아래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하여 말했으며, 행 10:34에서 베드로가 깨끗한 동물과 깨끗치 못한 동물을 넣은 보자기의 환상을 본 후에 깨달은 교훈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특징은 그의 공명 정대함이며, 공의로우심이며, 완전한 공평 무사함이다.
2-4절에서 야고보는 교회에 나오는 두 종류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손에 금반지를 끼고 있다. 다른 또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달리 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초라한 옷을 입었으며 보석으로 꾸미지도 못하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였으나 교회만은 신분의 구별이 없이 주인과 노예가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법적으로 노예는 사람이 아닌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회에서는 예배 집례자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들어오거나 부자가 들어올 때 하나님보다 사람의 신분을 중요시 여겨 예배 도중에 예배가 중단되는 예가 있어 야고보는 이 점을 강조하여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멸하지 않으신다. 33년간의 공생애를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마 15:22-28을 보면 가나안 어느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제자들을 통하여 그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 여자는 겸손한 태도로 재치있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여자의 믿음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딸을 즉시 고쳐 주셨다(마 15:22-28).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개는 부정한 동물이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가리켜 “개”라고 표현하시므로써 차별을 나타내셨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돌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을 언급하신 것이다.
눅 9:51-56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인들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어 어떤 사마리아 마을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기를 원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꾸짖으셨으며, 그들 모두는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 감정에 결코 동참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은혜는 똑같이 자비로 뿌려짐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여행하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요 4:5-26).
여행으로 인해 지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수가성으로 간 사이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그 사이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놀라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기회를 포착하여 하나님을 증거하셨으며, 자신이 메시야임을 인정하게 하시기까지 하셨다. 또한 행 8:26-39에 보면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의 사막길에서 만난 빌립과 에디오피아인의 이야기가 있다. 한 흑인이 병거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 이 때 성령님이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빌립은 “그것은 안됩니다. 그 사람은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라는 그 에디오피아인의 초대를 흔쾌히 수락하여 그와 함께 앉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설명해 주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빌립은 거리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에디오피아인에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세례를 주었다. 성경의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는 그 어떤 편애하심도 전혀 없으신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증명해 준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그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신 10:19; 레 19:33-3
4).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으시는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다. 신 10:17에서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9-11)고 하였다. 신앙과 행위는 이율적으로 피차 모순성이 있지만 서로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신앙은 독립적이지만 성도의 선행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행위가 동반되지 아니하는 신앙은 자기 기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할 때에 참된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때에 부자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는 지상의 행복이 있다. 이는 그의 심중에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은 물론이고 신약의 대부분이 윤리적 교훈에 대한 케리그마인 것이다.
마 5:17-18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나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요 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롬 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갈 2:16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시간과 업적이나 그의 공로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가 제한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복잡한 여건들이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 편에 못 박힌 강도가 그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 즉시로 구원을 얻은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 덩어리인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므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이같이 우리도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자가 될 때에 이웃의 실수와 잘못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실수가 잦고 쉬 범죄하는 자신을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할 때에 성도들은 이웃을 쉽게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에 짐이 자던 창고 한구석 기둥에 짐이 자기의 성과 이름을 파서 새기어 놓은 것을 발견하였다. 거기에 새겨놓은 이 소년의 성명은 ‘제임스 A. 가필드’ 였다. 제임스 A. 가필드라는 이름은 바로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 이름이었던 것이다. 지금부터 약 100년전 모스크바의 한 출판사에 허름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원고 뭉치를 가지고 들어왔다. 출판사 사장은 그 원고를 보지도 않고 그런 원고는 얼마든지 굴러다니고 있고 비록 그 사람이 출판 비용을 부담한다 해도 출판 못한다고 박대했다. 그 남자는 말하기를 “나는 대중이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썼는 데요.” 그 말을 듣은 출판사에서는 “당신은 누구요”라고 물었다. 그 남자는 바로 톨스토이였다. 그러나 너무 늦어 버렸다. 그 출판사와는 인연이 끝났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사실 세상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교회에까지 이런 사고 방식이 침투해 있다는 데 있다.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왜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안되는 지를 함께 상고하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는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의 외부적인 빈부 귀천에 따라서 차별 대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영혼을 마치 상품의 가격으로 취급하여 의복이나 그 사람의 소유 정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차별 대우란, 그 사람이 돈이 많다던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던가, 권력가나 유명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에게 굴복하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보시는 바는 이방인도 유대인도 동일한 심판 아래에 있다고 사도 바울은 확신하여 말했으며, 행 10:34에서 베드로가 깨끗한 동물과 깨끗치 못한 동물을 넣은 보자기의 환상을 본 후에 깨달은 교훈은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특징은 그의 공명 정대함이며, 공의로우심이며, 완전한 공평 무사함이다.
2-4절에서 야고보는 교회에 나오는 두 종류의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손에 금반지를 끼고 있다. 다른 또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달리 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초라한 옷을 입었으며 보석으로 꾸미지도 못하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분명했던 시대였으나 교회만은 신분의 구별이 없이 주인과 노예가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법적으로 노예는 사람이 아닌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교회에서는 예배 집례자가 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주인이 들어오거나 부자가 들어올 때 하나님보다 사람의 신분을 중요시 여겨 예배 도중에 예배가 중단되는 예가 있어 야고보는 이 점을 강조하여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차멸하지 않으신다. 33년간의 공생애를 이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보내신 예수님께서는 결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마 15:22-28을 보면 가나안 어느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제자들을 통하여 그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냉정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하였고,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그 여자는 겸손한 태도로 재치있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여자의 믿음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딸을 즉시 고쳐 주셨다(마 15:22-28).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개는 부정한 동물이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가리켜 “개”라고 표현하시므로써 차별을 나타내셨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돌보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을 언급하신 것이다.
눅 9:51-56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인들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적대감이 있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어 어떤 사마리아 마을에서 자신을 위해 준비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일로 인해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멸하기를 원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를 꾸짖으셨으며, 그들 모두는 다른 마을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 감정에 결코 동참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에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은혜는 똑같이 자비로 뿌려짐을 알 수 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여행하는 도중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요 4:5-26).
여행으로 인해 지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음식을 사러 수가성으로 간 사이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그 사이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여자는 놀라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기회를 포착하여 하나님을 증거하셨으며, 자신이 메시야임을 인정하게 하시기까지 하셨다. 또한 행 8:26-39에 보면 예루살렘과 가사 사이의 사막길에서 만난 빌립과 에디오피아인의 이야기가 있다. 한 흑인이 병거를 타고 가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고 있었다. 이 때 성령님이 빌립에게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빌립은 “그것은 안됩니다. 그 사람은 다른 인종에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라는 그 에디오피아인의 초대를 흔쾌히 수락하여 그와 함께 앉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을 설명해 주고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빌립은 거리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그 에디오피아인에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세례를 주었다. 성경의 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께는 그 어떤 편애하심도 전혀 없으신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증명해 준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종이나 국적에 관계없이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그를 학대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신 10:19; 레 19:33-3
4).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하시지 않으시는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다. 신 10:17에서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였다.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9-11)고 하였다. 신앙과 행위는 이율적으로 피차 모순성이 있지만 서로 불가분의 관련성이 있다. 성경은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킴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신앙은 독립적이지만 성도의 선행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행위가 동반되지 아니하는 신앙은 자기 기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할 때에 참된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할 때에 부자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는 지상의 행복이 있다. 이는 그의 심중에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고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구약은 말할 것도 없고 복음은 물론이고 신약의 대부분이 윤리적 교훈에 대한 케리그마인 것이다.
마 5:17-18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나 요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요 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롬 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다. 갈 2:16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다. 인간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시간과 업적이나 그의 공로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불완전한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가 제한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복잡한 여건들이 따를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 편에 못 박힌 강도가 그의 신앙을 고백하는 그 즉시로 구원을 얻은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모순 덩어리인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시므로 말미암아 구원의 자리에 올 수 있었다. 이같이 우리도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용납하고 인정하는 자가 될 때에 이웃의 실수와 잘못도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실수가 잦고 쉬 범죄하는 자신을 용납하셨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할 때에 성도들은 이웃을 쉽게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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