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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한 엄격하자 (막9:38-50)

본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우선순위를 확실히 해 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들의 몸, 즉 육신을 위한 삶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건강과 질병의 문제, 쾌락과 안일의 문제, 명예와 존경의 문제 등을 제일 우선의 문제로 삼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보다 더 우선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러분! 지옥은 결코 관념과 이상의 장소가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다. 이 지옥의 형편에 대하여 성경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는 곳”(마 25:30)이라 하였고,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며,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는 곳”(막 9:48)이며,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면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고통 스러운 곳”(눅 16:24)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무서운 고통이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된다. 그래서 남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케 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그 육체의 일부를 절단함이 낫다고 하셨다. 즉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길을 방해하고, 도리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과감히 제거해 버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발이나 손이라도 찍어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눈이라 할지라도 뽑아 버리라고 엄히 명령하신다.
1. 범죄하는 손 오늘 본문 말씀은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가고 죄를 끊으면 영생,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대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다. 죄에 대해서 우물쭈물하다가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범죄하는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범죄하는 눈을 뽑아 버리라는 말은 실제로 지체(손, 발, 눈)를 절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단호하게 죄를 끊어 버리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는 일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일의 방해 요인이 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철저하고 단호한 방법을 제시하셨다. 사실상 육신의 생명은 평균적으로 백년을 넘지 못하지만 영혼의 생명은 영원한 세월을 살기에, 영생을 얻기 위한 노력은 처절할 수밖에 없다. 손은 모든 일을 직접 행하는 지체이다. 즉, 욕심을 실행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찍어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실제로 육체의 일부를 절단할 것을 명령하신 것은 아니다. 악의 근본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엄격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
지옥은 히브리어로 ‘힌놈의 골짜기’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아하스 왕 이후 몰록의 신에게 아이를 불태워 바친 곳이다(왕하 6:3; 21:6; 대하 28:3; 렘 2:23; 7:31). 그 제사의 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타서 꺼지지 않았다. 후에 요시야 왕이 이 가공할 불을 중단시켰다(왕하 23:10). 이후 이곳은 사람의 배설물과 쓰레기 또는 짐승의 시체를 버려서 불태우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흰놈의 골짜기는 오래 전부터 지옥의 불과 형벌의 모형이었다. 영생의 귀중함과 지옥 형벌의 무서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성도에게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손의 지체를 죄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세상에서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는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죄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톱니바퀴와 같다. 지금은 옷소매 정도나 새끼 손톱 정도만 톱니에 끼어 있다고 하더라도 잠시 후면 곧 거대한 지옥의 톱니바퀴 속으로 주체할 길 없이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죄의 모습을 지닌 모든 것들을 속히 잘라 내야 한다. 아무리 돈의 가치가 중요하지만 우리의 생명과 바꿀만큼 소중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손이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직업과 취미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영혼과는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위해 그러한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때가 오면 지체없이 잘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부분에 집착하다가 전부를 놓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한다.
2. 범죄하는 발 인간의 지체 중 발은 직접 행동하는 지체로서 죄를 실행하는 데 쓰여지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범죄하는 발을 찍어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육신이 죄 짓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즉시 중단하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요구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죄의 보상으로 육체를 상해하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마 5:29-30). 범죄하는 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깊이 새기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지체인 ‘발’을 죄짓는 데 사용해서는 안됨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도 흠과 티가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신다(살전 5:23). 성도들은 발뿐만 아니라 육신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합당한 도구로 유익하게 사용하여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방해하며 성도의 영혼을 지옥에 이르게 하는 죄에 대하여 예수님은 엄격한 교훈을 주셨다. 사실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은 너무나 처절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육체적 대가를 치루더라도 죄는 근절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죄’는 매우 파괴적인 권세를 지닌 것이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오히려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죄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골 3:5). 성도들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엄격한 교훈을 상기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방법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병든 부분만 잘라 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체를 완전히 끊어 버리라는 것이다. 죄의 톱니에 빠진 부분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번지기 전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방법으로 완전히 잘라 내야 한다. 영적 생활에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남김 없이, 미련없이 잘라 버려야 한다.
우리가 죄악의 통로를 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친구를 끊는 것은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외면과 그로 인한 고독의 고통을 수반하며, 취미를 끊는 것은 내 생애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 가는 것 같은 아픔을 수반하고, 혈연 관계를 끊는 것은 자신의 근원이나, 또다른 자신의 분신과 단절하는 비통함을 겪게 된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나를 인정하는 것들을 내가 믿는 예수로 인해, 천국 소망으로 인해 끊어야 하는 것은 연약한 우리로서는 많은 갈등과 정신적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단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 것이요, 결국은 사탄의 장난감이 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결단과 극복을 쌓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대적하는 위치에 있는 것 모두를 가차없이 끊어 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하고 영생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교훈에 입각해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적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성도의 생명, 즉 영생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시 32:5; 51:3-4; 119:11; 롬 6:6-8; 딤전 5:22; 히 12:1,
4). 우리는 육적인 삶을 제어해야 한다. 육적인 모든 것을 제어할 때 영적인 회복이 이루어지고 영생의 길을 얻게 된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섞여 있는 상태에서는 영적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육의 소욕을 죽여서 영혼을 살찌우는 삶을 성도는 살아야 한다.
3. 범죄하는 눈 범죄하는 눈은 빼어 버리라는 이 말씀과 관련하여 어떤 성경 해석 학자는 ‘손은 소유욕, 발은 행동 욕구, 눈은 욕정 욕구를 의미한다’고 했다. 성경은 눈과 관련하여 부당하고 추한 욕구를 비유로 인간의 죄된 본성을 표현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전 1:8),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잠 21:4),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요일 2:16) 등 눈이란 외적 사물에 대한 내면적 욕구를 의미하는 용례로 비유되었다. 그래서 유대교의 랍비들도 ‘눈과 마음은 범죄의 중매자이다’라고 했고, ‘눈은 음욕의 시종이다’라고도 했다. 그래서 눈을 인간의 모든 부당한 욕구의 상징으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으로 범죄하는 눈은 빼어 버리라고 하셨다. 우리 지체 중에서 눈은 과히 큰 지체는 아니다. 그러나 단추구멍 같이 작은 눈이라 할지라도 눈이 보는 시계(視界)의 범위는 크다. 산 위에서는 작은 눈으로 한 도시까지도 볼 수 있다. 눈은 이처럼 많은 것을 보지만 사실상 눈 그 자체로는 선택의 권한이 없다. 눈은 단순히 볼 뿐이며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지목하여 보도록 의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주관적인 차이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 욕심의 대상이 들어왔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이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며,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눈을 빼내어도 그 죄악 자체는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狂悖)라”(막 7:21-23)고 하셨다. 흘기는 눈까지도 눈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통하여 들어오는 죄악을 붙드는 육의 중심을 제어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미술가는 여체를 그리면서도 미의 환상만 볼 뿐이 듯이 위대한 신앙인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서 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우리의 눈 속에 숨은 들보를 속히 빼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은 모두 그 속에 죄를 가지고 있다. 그 죄가 우리 눈으로 하여금 실족케 한다. 만일 눈이 실족할 때마다 눈을 빼어 버린다면 누가 온전한 눈을 한쪽인들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 육체의 눈은 귀중하게 본존하여야 한다. 그러나 날마다 나를 실족시키는 속 눈은 빼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마음의 상징으로 말씀하시고, 그 악한 정욕을 제하라는 의미로 교훈하셨다. 예수님께는 눈을 ‘인간의 편견’(마 7:4)이나 ‘인간의 양심’(마 6:22)으로 비유하셨다. 실재로 계 3:18에서는 타락한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내게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셨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눈을 빼어 버리라는 오늘 본문 말씀은 죄악의 욕구를 따라 행동하지 말고, 진리의 말씀 안에서 회개를 결단하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는 죄악과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성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때 ‘죽은 자’가 되었으니 육체의 욕구를 복종시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운 타협의 말로 사람을 만족시키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고자 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부드러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나 죄에 대하여서는 단호하게 잘라 버릴 수 있는 결단을 겸하여야 한다.
4. 실족케 하는 자에 대한 심판 예수님께서는 현세에서 사탄적이며 동물적인 욕구를 따라 사는 죄인들이 받을 대가를 ‘죽지 않는 구더기’, ‘불로서 소금 치듯하리라’는 말로 비유했다. ‘죽지도 못하고 고통받아야 할 구더기’의 처지가 곧 지옥의 참상이라는 교훈이다. 구더기는 파리의 유충이다. 우리는 천한 죽음을 흔히 파리 목숨으로 비유한다. 예루살렘 성문 밖 ‘게헨나 골짜기’라는 쓰레기 터에는 늘 구더기가 들끓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천한 구더기들도 결코 죽음당하지 않는 곳이 지옥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없는 곳이 왜 고통스러울까요 성경의 죽음이라는 개념은 곧 ‘단절’을 의미한다. 육체와 영혼이 단절되는 것이 곧 육에의 죽음이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이 영적 죽음이다. 사멸이 아니라 관계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개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가 지속되는 삶이 곧 영생이요 천국의 삶이라면, 그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되고 죄악과 영원히 함께 해야 할 삶이 곧 지옥의 삶이요, 영벌의 삶인 것이다. 추하고 역겨운 죄악과 영원히 함께 해야 하는 고통, 자신의 삶과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화평과 소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삶의 고통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왜 ‘구더기’를 비유로 들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구더기는 땅에서 가장 추한 곳에 거하는 생물이라는 점과 관련해 생각해야 한다. 썩고, 곪고, 더러운 곳에 거하는 것이 구더기인데, 그것은 후에는 탈바꿈하여 그 형체가 변화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구더기가 형체도 못 바꾸고 지옥에서 그대로 ‘구더기’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성경은 인간의 부활을 증거한다.
그런데 그 부활 후의 형체가 그 삶의 결과로 인해 천한 형체로 변형된 사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참상을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하리라”(49절)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비유로 상징하는 지옥의 고통은 해석하기가 매우 난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옥에 대한 성경의 다른 곳의 증언과 비교하여 살펴 볼 때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있다. ‘불’과 ‘소금’은 밝히고, 침투하는 성질이 있다. 불은 외부를 밝혀 주는 성질이 있으며, 소금은 그 내부에 배어드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이 불로 소금 치듯하리라는 의미는 각 사람의 숨겨진 죄악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밝혀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고 했다. 거짓된 자에게는 자신의 치부가 세상에 속속들이 드러나는 일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또 교만하고 거만한 자가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밝혀지는 일처럼 괴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지옥은 불의자의 위선과 무지와 죄악이 속속들이 드러나는 수치의 고통을 당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불과 소금의 또다른 성질은 ‘속속들이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불은 모든 물건들을 속속들이 태워 버린다. 물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살아날 기회를 주지만 큰 불 속에서는 살아날 재간이 없다. 또 소금은 그 내부에 속속들이 스며 들어 파고 든다(약 5:3). ‘구더기’ 같은 미물들은 불과 소금에 치명적이다. 지렁이, 구더기, 미꾸라지와 같은 생물에 소금을 뿌려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러므로 불로서 소금 치듯하리라는 말씀은 죄의 대가에 대한 형벌의 고통을 전인적으로 빠짐 없이 받을 것을 암시해 준다. 현세의 불행과 고통에는 그래도 피할 구석의 여지가 있다. 육체와 물질의 고통과 재난은 그 마음의 위로로서 견딜 수가 있다. 그러나 지옥은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영원한 고통만이 있을 것이다(눅 16:24). 우리의 몸은 지금 어느 부분만큼 죄의 톱니에 빨려 들어가 있는가 무디어져 가는 현대인의 가슴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화인들린 이들처럼 죄를 합리화시켜 자신도 모르게 죄의 톱니 속에 말려 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해서는 이미 죄 속에 끼여든 부분을 잘라 내야 한다.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잘라 버리는 민첩함도 요구된다. 왜냐하면 오래된 상처일수록 유익하기는커녕 도리어 썩어서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납니다”라는 동요처럼 우리의 결단은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때 우리의 결심은 약해지고 흔들리게 된다. 신앙의 결단은 결심한 즉시 즉각적인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그것이 다시금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방법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즉시로 순종한 것과 같이 우리의 결단은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과단성이 있어야 한다. 벧전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가슴에 품었던 비장한 칼, 즉 하나님의 말씀의 칼, 성령님의 칼, 기도의 칼을 가슴에 품고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의 눈을 빼고,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손과 발을 찍어 버리는 결단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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