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의 가르심 (마25:31-46)
본문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인류 종말에 되어질 일들을 교훈하고 계신 말씀입니다. 24장에서는 마지막 때의 징조가, 25장에는 마지막 때 심판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 전도서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라”(전 12:14). 고 했습니다. 인생무상을 이야기한 전도서 기자의 경우에도 인간 만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 입니다.(히 9:27). 마태복음 기자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세 단계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처음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서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로 소리 없이, 조용하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영광스럽게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심판주로 오신다고 하셨다. 시편 기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예언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1-3).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가 관권에 의해 밧모섬에 강제 유폐되었던 사도 요한이 본 환상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요한은 크고 흰 옥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또 많은 책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늘나라의 책에 기록됩니다. 인간은 반드시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것 입니다. 이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역사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후세에 사람들은 우리를 무어라 평가할 것인가 투철한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은 사회를 바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역사가들이 무어라 평가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주님의 평가와 판단 입니다.
2. 주님은 양과 염소를 가르신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요즘 사회에서는 선악의 분별이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의 한계가 혼미해졌단 말입니다. 힘만 있으면 살아남고 힘이 없고 약하면 온갖 죄와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셔서 양과 염소를 반드시 다른 곳에 갈라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반드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육체로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날 것 입니다.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 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눅16:19-31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열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밖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헌데투성이가 되어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였는데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도 죽어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품에 나사로가 안겨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동안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으나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만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와 우리 사이에는 깊고 넓은 구렁이있어서 여기서 건너 갈 수도 없고 거기서 건너 올 수도 없다." 그러자 부자가 말했습니다. "
그렇다면 부탁입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에 보내어경고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의 다섯 형제만이라도 고통받는 이곳에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딱 잘라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가서 말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왕상14:1-18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자기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아내를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은 변장하고 실로에 가서 예언자 아히야를 만나시오. 그는 내게 왕이될 것이라고 말해 준 사람이오. 그에게 우리 아들이 어떻게 될지 물어 보시오. 그러면 그가 대답해 줄 것이오." 그래서 그녀가 실로로 갔는데 아히야는 그 때 나이가 많은 탓으로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그에게 오고 있다고 일러 주시고 또 그녀에게 대답할 말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아히야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여로보암의 부인, 다른 사람인 체하지 말고 들어오시오. 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테니 가서 남편에게 전하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는데 너는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나를 배반했다. 그래서 네 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소. 이제 당신이 집에 들어가면 아들이 금방 죽을 것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슬퍼하며 장사지내게 할 것이오. 그러나 여로보암의 가족 중에서 묘실에 장사되는 사람은 이 아이 하나뿐일 것이오." 이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돌아가 집에 들어서자 그 아이가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장사지내고 슬퍼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 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은 분명히 상급을 주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였기에 임금님이 준비한 나라의 주인이 된단 말인가 이에 임금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갈수록 오리무중 이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임금님을 대접했으며 돌보아 준 일이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서로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는가 먼저 여러분은 주님이 시장하실 때 먹을 것을 드렸는가 어느 날, 주님께서 아침 일찍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가 너무 시장하셔서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습니다.(마21:18-19). 그러나 그 나무는 시장하신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었는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잎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언제 우리 곁을 지나가실 지 알 수 없습니다.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대접했던 아브라함처럼(창 18장) 우리는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오. 벳새다 광야에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시던 주님은 얼마나 피곤하고 시장하셨을까 그렇다고 해서 수제자 베드로가 걱정했는가 아니면 막내 요한이 생각해 주었는가 아니면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 잡수실 것을 걱정했는가
그런데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렇게 배가 고픈데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신 주님은 얼마나 시장하실까…. 그는 자기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다. 벳새다 광야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한 사람은 이 아이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기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곤할 테니 바다를 건너가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피곤한 것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들만 쉬겠다고 피곤해 지치신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결과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닌가 우리 배에 왜 풍랑이 이는지 생각해 보셨는가 우리 가정에 왜 풍랑이 이는지 아는가 우리 사업에 왜 풍랑이 이는지 아는가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이다. 또한 여러분은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드렸는가 다윗이 불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을 때이다(삼하 23:13-17). 다윗은 갈증이 났습니다. 갑자기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이 생각났습니다. 그곳은 다윗의 고향 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적진 불레셋 진영 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였을 때 누가 나갔는가 군장의 두목 아디노(8절)가 갔는가 세 용사인 엘르아살이 갔나 아니면 삼마가 갔는가 아니다. 이름도 없는 무명의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고 들어가 물을 길어 왔습니다. 다윗은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 누가 물을 떠다 드렸는가 열두 제자는 이미 도망쳤습니다. 남아 있던 여인들도 멀리서 울고만 있을 뿐 아무도 물을 떠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9:28-29를 보자. 군인 중 한 명이 예수님의 목을 축여 주었습니다. 주님이 내 것을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아무 소리 않고 기쁨으로 드렸습니다.(눅19:28-35). 마리아는 이미 정혼한 몸이었으나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하였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처녀가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일입니다. 남편에게 파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꺼이 헌신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만약 주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쓰시겠고 한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만약 주님께서 내 시간을 요구하시고, 주님께서 내 재능을 요구하신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질 때 대신 짊어진 사람이 누구인가 열두 제자들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먹은 5천 명 장정이었는가 아닙니다. 시골 청년 구레네 사람 시몬 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렇게 헌신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짐승입니다. 염소가 양의 흉내를 내 보지만 결국 그 본성이 드러나고 납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1. 주님이 심판의 보좌에 앉으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마 25:31). 처음에 오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한 구유에서 목수였던 요셉의 아들로 소리 없이, 조용하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 영광스럽게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심판주로 오신다고 하셨다. 시편 기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예언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우리 하나님이 임하사 잠잠치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시 50:1-3).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가 관권에 의해 밧모섬에 강제 유폐되었던 사도 요한이 본 환상도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20:12). 요한은 크고 흰 옥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습니다. 또 많은 책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삶은 하늘나라의 책에 기록됩니다. 인간은 반드시 그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 것 입니다. 이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역사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후세에 사람들은 우리를 무어라 평가할 것인가 투철한 역사 의식이 있는 사람은 사회를 바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역사가들이 무어라 평가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주님의 평가와 판단 입니다.
2. 주님은 양과 염소를 가르신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 25:32-33). 요즘 사회에서는 선악의 분별이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의 한계가 혼미해졌단 말입니다. 힘만 있으면 살아남고 힘이 없고 약하면 온갖 죄와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셔서 양과 염소를 반드시 다른 곳에 갈라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반드시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에는 우리가 육체로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날 것 입니다.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 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눅16:19-31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열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대문 밖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헌데투성이가 되어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였는데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습니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도 죽어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품에 나사로가 안겨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동안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으나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만 겪었다. 그래서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너와 우리 사이에는 깊고 넓은 구렁이있어서 여기서 건너 갈 수도 없고 거기서 건너 올 수도 없다." 그러자 부자가 말했습니다. "
그렇다면 부탁입니다. 나사로를 제 아버지 집에 보내어경고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저의 다섯 형제만이라도 고통받는 이곳에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딱 잘라 말합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들에게 가서 말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왕상14:1-18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자기 아들 아비야가 병들자 아내를 불러 말했습니다. "당신은 변장하고 실로에 가서 예언자 아히야를 만나시오. 그는 내게 왕이될 것이라고 말해 준 사람이오. 그에게 우리 아들이 어떻게 될지 물어 보시오. 그러면 그가 대답해 줄 것이오." 그래서 그녀가 실로로 갔는데 아히야는 그 때 나이가 많은 탓으로 눈이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그에게 오고 있다고 일러 주시고 또 그녀에게 대답할 말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아히야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여로보암의 부인, 다른 사람인 체하지 말고 들어오시오. 이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줄 테니 가서 남편에게 전하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는데 너는 우상을 만들어 섬김으로 나를 배반했다. 그래서 네 가족은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소. 이제 당신이 집에 들어가면 아들이 금방 죽을 것이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슬퍼하며 장사지내게 할 것이오. 그러나 여로보암의 가족 중에서 묘실에 장사되는 사람은 이 아이 하나뿐일 것이오." 이에 여로보암의 아내가 돌아가 집에 들어서자 그 아이가 즉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장사지내고 슬퍼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 하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은 분명히 상급을 주십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어리둥절 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였기에 임금님이 준비한 나라의 주인이 된단 말인가 이에 임금님은 분명히 말씀해 주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갈수록 오리무중 이었습니다. 언제 우리가 임금님을 대접했으며 돌보아 준 일이 있었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서로 묻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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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했는가 먼저 여러분은 주님이 시장하실 때 먹을 것을 드렸는가 어느 날, 주님께서 아침 일찍 베다니를 떠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가 너무 시장하셔서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찾으셨습니다.(마21:18-19). 그러나 그 나무는 시장하신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었는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잎만 무성할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언제 우리 곁을 지나가실 지 알 수 없습니다.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대접했던 아브라함처럼(창 18장) 우리는 항상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십시오. 벳새다 광야에서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시던 주님은 얼마나 피곤하고 시장하셨을까 그렇다고 해서 수제자 베드로가 걱정했는가 아니면 막내 요한이 생각해 주었는가 아니면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 잡수실 것을 걱정했는가
그런데 어린아이가 예수님을 걱정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이렇게 배가 고픈데 하루 종일 말씀을 전하신 주님은 얼마나 시장하실까…. 그는 자기의 도시락을 주님께 드렸다. 벳새다 광야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었지만 예수님을 생각한 사람은 이 아이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기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피곤할 테니 바다를 건너가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피곤한 것은 제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자신들만 쉬겠다고 피곤해 지치신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결과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닌가 우리 배에 왜 풍랑이 이는지 생각해 보셨는가 우리 가정에 왜 풍랑이 이는지 아는가 우리 사업에 왜 풍랑이 이는지 아는가 그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이다. 또한 여러분은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드렸는가 다윗이 불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을 때이다(삼하 23:13-17). 다윗은 갈증이 났습니다. 갑자기 다윗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이 생각났습니다. 그곳은 다윗의 고향 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적진 불레셋 진영 입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였을 때 누가 나갔는가 군장의 두목 아디노(8절)가 갔는가 세 용사인 엘르아살이 갔나 아니면 삼마가 갔는가 아니다. 이름도 없는 무명의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고 들어가 물을 길어 왔습니다. 다윗은 차마 그 물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은 주님이 받으셔야 했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목이 마르다고 하실 때 누가 물을 떠다 드렸는가 열두 제자는 이미 도망쳤습니다. 남아 있던 여인들도 멀리서 울고만 있을 뿐 아무도 물을 떠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9:28-29를 보자. 군인 중 한 명이 예수님의 목을 축여 주었습니다. 주님이 내 것을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했는가 나귀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 마디에 아무 소리 않고 기쁨으로 드렸습니다.(눅19:28-35). 마리아는 이미 정혼한 몸이었으나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하였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처녀가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일입니다. 남편에게 파혼 당하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셨을 때 기꺼이 헌신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만약 주님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쓰시겠고 한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만약 주님께서 내 시간을 요구하시고, 주님께서 내 재능을 요구하신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쓰러질 때 대신 짊어진 사람이 누구인가 열두 제자들이었는가 아니면 예수님에게 떡을 얻어먹은 5천 명 장정이었는가 아닙니다. 시골 청년 구레네 사람 시몬 이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렇게 헌신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양과 염소는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짐승입니다. 염소가 양의 흉내를 내 보지만 결국 그 본성이 드러나고 납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실 때가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나는 과연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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