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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종 (마20:20-28)

본문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위대한 사람들, 또는 집권자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되겠다고 나선 여러 사람들이 이 말씀의 좋은 실물 교재가 되겠습니다만, 이들은 남을 지배하고, 명령을 내리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남들보다는 대단히 잘 났습니다. 세상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 같아서 자신만만하고, 자기를 신뢰하고 자랑합니다. 또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있고, 그 야망을 이루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기백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일을 맡게되면 밤을 세우고 밥을 굶더라도 이루고 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웅 대접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여 따릅니다. 앞 길에 대하여 자신만만하고, 또 실제 능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을 살펴보면, 세상에 잘나고 위대한 사람들이란 대체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중심이기 보다는 사람 중심, 자기 중심입니다. 또 외적으로는 언제나 정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 같고, 고상한 것을 앞 세우는 것 같지만,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면에 치중합니다.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광 보다는 자기 영광이요, 자기를 드러내는 일을 잘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은 3년 가까이를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의 인생관, 가치관은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세상적이고, 정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그 목적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그 목적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했습니까 얼마나 신앙생활 하기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과 같이 하면서도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시는 여러분,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오늘 저녁 이 시간 왜 이 자리에 까지 나왔습니까 여러분들의 신앙의 동기와 목적을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제자들과 같은 동상이몽의 결과를 낳을 뿐 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아직 자기가 죽지 않고, 여전히 자기 중심이고, 여전히 세속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도 하고 있다면, 아니 세속적인 것을 목표해서 신앙생활까지 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목표가 아직 세속적인 것이면, 열심, 충성 보다 더 시급한 것이 이 목표부터 수정해야합니다. 모든 고장이 여기에서 납니다. 오늘 교회의 타락이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이 있을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은 후에, 삼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유언적인 말씀을 하시는 주님 앞에 제자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아주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이 십자가 고난에 대한 말씀을 세 번 하시는데, 한 번은 베드로 신앙고백 후에 했습니다. 그 때는 베드로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고 예수님을 만류하다가 사단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또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때에 이 말씀을 하셨는데, 그 때는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는 근심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기시면서 말씀하실 때에는 이 제자들은 관심도 없고, 이 고난을 앞두고 계신 주님 앞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애기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지금 우리가 볼 때에 어떻게 이다지도 엉뚱하고 이해 못할 행동을 할까 안타깝지 않습니까 왜 이렇습니까 이 제자들이 삼년을 따라 다녔지만,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대로 자신의 가치관, 신앙의 목표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심지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그 때에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는데, 그 마지막 장면에서도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독립됩니까 묻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살펴봅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섭섭하게 했습니까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마20: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 세베대의 두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인데, 이들은 예수님과 육신적으로 이종 사촌입니다. 그 어머니인 살로메라고 다른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이모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탁을 합니다. 이들은 아마 친척이니까 특별히 예수님이 이 부탁을 멸시치 않을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에 한 아들은”
그런데 이는 살로메, 곧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혼자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실 대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했습니다. 이 때에 “저희는” 누구겠습니까 바로 그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두 아들의 요청으로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치맛바람입니다.
그런데 그들 뿐이 아닙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20: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저들도 그렇게 원하고 있는데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들도 예수님께서 자기들도 높여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이들은 마치 지금 목숨을 거두고 있는 아버지 죽음 앞에서 유산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20: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여기에 주님께서 마시려는 잔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고난의 잔이요, 죽음의 잔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들은 주님의 잔을 마실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이기적인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구한 것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도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고 구하기도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인데 그 기도를 세속적인 것,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있느냐 했을 때에 이들은 말씀하시는 그 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할 수 있나이다 했습니다. 영적으로 깨지 못하면, 믿음의 눈으로 영원한 것을 가치로 두지 않는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성경의 말씀을 듣든지 읽든지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육의 생각으로는 이 말씀들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한다고 말한 것이 사단이 되기도 하고, 십자가의 원수도 되기도하여 주님께 물리침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실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가 얼마나 됩니까 또 인간의 지식이 뛰어난 것을 자랑하고 신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인간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존재에 대하여 아는 것이 얼마나 되며, 시간적으로 아는 것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더욱 하나님에 대하여 평가를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도 다 보지 못하는 그 지식으로 어떻게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깨닫기나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까 우리는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엄청난 소리를 들을 귀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물며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의 음성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제자들을 한심하게 보시지는 않았습니다. 유치한 제자들이건만, 그들에게 대하여 냉소적으로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주님과 같은 잔을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과연 너희가 내 잔을 마시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이들이 도망할 일도 아시면서도 그래도 그 후에 다시 돌이켜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같이 자신들도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미리 보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잔을 마실 수 있다고하지, 그러나 내 좌 우편에 앉을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해서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늘나라에 높은 자리에 앉을 것으로 생각하지도 말라. 너희들이 어떻게 나를 따라 다녔다고 해도 그것으로 세상 권세같은 것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마실 잔은 너희 위에 높아지는 것, 섬김을 받는 왕이 되는 잔이 아니다. 내가 마실 잔은 고난의 잔이요, 섬김의 잔이다. 섬기는 것이다. 섬기므로 목숨까지 내어 놓는 것이다. 이를 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큰 자이다. 으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이 뜻을 알지도 못하고 내 잔을 마실수 있다고 하는도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마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합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질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꾸 높은 자리에 올라 가려고 애쓰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권력에의 유혹은 마약보다 더 끊기 어렵기 때문에 저렇게 대권에 실패한 사람들이 체면 불구하고 또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정반대입니다. (마20:26)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것이 하나님나라, 교회의 질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나서는 사람, 설치는 사람,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종이 되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하늘나라에서도 영광이 있고, 존귀함이 있습니다. 이 세상 권력 같이 권세를 휘두르고, 능력을 과시하며, 자기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교회 안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봉사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직분이 있든지 없든지 존경을 받습니다. 직분을 세울 때에 섬기는 사람을 세워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세워지면 아주 그 교회는 세상 냄새가 납니다. 직분자들은 자신이 잘났기 때문에 세움을 입은 것이 아니라,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를 끝까지 가질 때에 그 하는 일에 향기가 납니다. 아무리 일을 많이하고 이리 저리 설쳐도 교만히 행하고 자세하면 그만 썩은 냄새가 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나에게 어떤 유익한 점이 있어서 나를 세운 것이 아니다. 나는 나홀로는 무익한 사람이라 부족한 자라 하는 것을 알고, 끝까지 종으로 섬기는 자의 자리로 낮아질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우리가 새벽기도에서 사무엘상을 통하여 다윗과 사울에 대하여 배웠습니다. 사울은 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까그가 다윗 보다는 신장도 크고 용감한 자요, 모든 이스라엘 가운데 잘난 자였습니다. 그가 작은 자로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 이스러엘의 왕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고난 다음에 그만 착각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이 있는줄 알고, 높아지고, 대우 받으려고 하고 하는 데서 떨어졌습니다. 다윗은 사울 보다 못한 정도가 아니라, 목동이었습니다. 아버지도 형제들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다윗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은 어떤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그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허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앞에 겸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왕이라는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겸손히 충성했으면 얼마나 존귀한 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교만해 졌을 때에 작은 자가 아니요, 섬기는 자가 아니요, 다스리는 자로 군림했을 때에 하나님께 버림 받아서 왕이라는 직분 때문에 그는 불행했습니다. 오늘 우리 직분자들이 이를 조심해야합니다. 섬기는 직분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섬김을 받는 위치, 어른의 위치로 알면 직분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됩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를 신임하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 교회에 가장 존경받으며, 영광된 자입니까 세상의 관점에서 말하면 안됩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사람에게 전도를 하니까, “교회도 돈있어야 합디다. 돈 없는 사람은 대우하지 않고 세상에 가진 자들이 대우 받는 것이라면 교회나 세상이나같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 안타까왔습니다.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장로됩니까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 신일교회는 그렇지 않아야겠습니다. 어떤 분들을 여러분들이 세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많이 가진 자가 있어서 그를 세운 일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교회에 겸손히 충성하시는 분들을 이번에 다 세운 줄 압니다. 얼마나 순수합니까이 순수함을 직분자들이 더럽혀서는 안되겠습니다. 실망을 시켜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질서가 교회에 들어오면 절대로 안됩니다. 세상의 높은 사람이 교회에서 대접을 받고, 세상에서 부자면 교회에서 부자이고 한다면 그곳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는 권세 있는자이든, 없는 자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낮아지는 것이 바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으뜸이 될 수록 종이 되어 섬기며, 남 모르게 희생하고 남모르게 고생하고, 남모르게 고생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남모르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있어야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에서 변화되어서 이 모습으로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많이 했다면, 우리에게서 점점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직분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능력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여러분들에게 달란트를 은사로 주셨습니다. 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 구하면 지혜도 풍성히 주십니다. 문제는 무엇이 요구됩니까 종이 되어야합니다. 종은 섬깁니다. 겸손히 충성합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종과 같이 살아 간자를 주님께서는 영원한 것으로 위로하시고 상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섬긴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신 것은 우리를 섬기는 데의 절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 기준으로 교회를 보면 안됩니다. 하늘나라는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를 맛보려면 섬기는 일을 하면 됩니다. 억울한 말을 들어도 섬기는 종은 참습니다. 애매한 고난을 당해도 섬기는 종은 참습니다. 궃은 일, 어려운 일에 나서지 않는 때이지만, 섬기는 종은 이런 곳에 서 있습니다. 영광스런 곳, 대우 받는 곳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늘 진곳, 소외된 자들에게 가 있습니다. 낮은 데로 임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우리들 다 낮은 자리로 내려 앉읍시다. 더 낮아져야합니다. 더 죽어져야합니다. 아직도 자기가 살아서 움직이지 않습니까 모든 일에 주님을 생각하면서 섬기는 자로서 참읍시다. 모든 고난을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히 당합시다. 어디까지 앉아져도 주님 생각하면서 자꾸 낮아집시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 있습니까 자기의 약한 것만 자랑합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자랑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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