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청결케하신 예수님 (마21:12-17)
본문
이 사건은 고난주간의 첫째 날인 월요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은 두 번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공생애 초기에 있었고, 이 시간 읽은 본문의 예수님 공생애 사건 마지막, 십자가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또 성전을 정결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번이나 정결하게 하셨습니까 성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절대시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성전생활을 잘못했습니다.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또 지도자들은 이 성전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권을 챙기는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이 무엇인 것을 알아야하고, 예수께서 십자가로 대속을 다 이루신 이후인 신약시대에 성전생활은 어떻게하는 것인가를 교훈하시려는 목적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또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성전의 건물을 중히 여김보다 내적인 성전을 말씀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외적인 행위보다도 중요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과 하나님과의 사귀는 교제의 생활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성전생활이 귀한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보이는 성전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헤롯이 지은 아름다운 성전을 보이면서 말했을 때에 이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보니까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성전 안에 어떤 자들이 있었습니까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자과 돈 바꾸는 자들 또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먼저 왜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하는지 그 배경을 알아봅시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데 대해서 주님께서 분노하신 것으로 해석을 하면 아닙니다. 여기에 성전 안은 성소나, 지성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곳인데 이방인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뜰은 제사드리는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의 뜰은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문제는 지금 이방인의 뜰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에는 일년에 한번 씩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빈손으로 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전세를 내어야했고, 또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와야합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 매매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옵니다. 이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 제물을 자기 집에서 부터 가져와야하는데, 문제는 그 먼곳에서부터 가지고 올 수가 었습니다. 또한 가지 문제는 그들은 랍비에게 이 짐승이 흠이 없다는 검인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부터 제물을 끌고 오면 자연 그 짐승이 약해지고, 상처를 입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 있는 제도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파는 짐승을 사서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정말 흠없는 제물을 준비시키려고 했다면 왜 주님께서 책망을 하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로비활동을 합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자기 집에서 부터 끌고 오는 제물은 무조건 흠을 잡아서 통과를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전안에 양과 소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게 되는데 그 값은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종교행위에 이런 부패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환전하는 장사들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시대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는 로마사람들의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로마의 돈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로마나 이방인들을 종교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만든 세겔이라는 돈만을 성전 안에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남자들은 성전세를 냅니다. 일년에 반세겔의 돈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달러 환율 문제로 어려운데 그 때에 로마 돈을 세겔로 바꾸는데 그들은 엄청난 환율로 계산해서 세겔로 바꾸었습니다. 한 마디로 쓰지 못할 돈을 만들어서 로마 돈을 바꾸어 자기들의 부를 축척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환전상들의 책상을 들러 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에 주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강도의 굴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교회 안에 이 상업주의, 물질주의가 들어오면 그 즉시로 강도의 굴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짐승이나 비들기를 사고 파는 일 자체에 대해서 잘못된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도들이 처음 만들어 질 때에는 대개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세워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바뀌고,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세속적이고 인간의 악이 들어오면서 그 제도가 부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양을 바치지 못하고 비둘기를 바쳐야하는 가난한 자들을 종교적이고. 거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제사의 이름으로 착취한 것입니다. 교회에 이기적인 인간의 야심이 들어가면, 물욕적인 욕심이 들어가면, 외식적이고, 인본적인 것이 들어가면 그 교회는 곧 썩게 됩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분노가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 교회를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심사해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무엇 보다 자신은 자기가 정평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면서 또 우리 그리스도인 자신이 성전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인 성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겨야할 우리에게 과연 예수님이 들여다 보시면 우리들도 분노하셔서 우리들을 책망하시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자리를 뒤 엎으실 만한 잘못이 없습니까 요즘 교회의 현실도 살펴보면 세상과 비슷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상보다 못하여 욕을 듣는 일도 있습니다. 세상이 숫자를 좋아하듯이 교회도 숫자를 좋아합니다. 세상이 돈을 좋아하듯이 교회도 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권력있는 사람들을 대우하듯이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적당한 술수를 쓰듯이 교회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흥한 교회가 있으면 성공한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신일교회는 이 말씀에서 예외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깨끗해야합니다. 우리 교회 부터 깨끗해야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깨끗해야합니다. 나 부터 살펴야합니다. 우리교회에는 우리들에게는 주님께서 분노하실만한 그런 장사꾼 같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요소가 과연 없습니까 신앙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이용하여 세상 것을 채우려하는 기복주의는 없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씨를 우리 교회 현관에 크게 봍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 교회 교인 누구라도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처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업은 거창하게 못할지라도 큰 교회로 부흥은 시키지 못할지라도 우선 하나님께 예배가 있는 교회,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이럴 때에 그 교회가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결입니다. 성경공부로 지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하면, 성결한 삶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남편이 그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잘 해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그 잘못이 다른 여자를 하나 데리고 있다면 그 어떤 것을 주는 것도 다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큰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고,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중심을 다하여 드리는 예베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않으면 크면 무엇합니까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하는 교회로 성장한다면 얼마나 좋지만 그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으로 일시 부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과연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가 않으시는가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이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마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 절망하는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일도 이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속한 가정들 중에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사고와 질병,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아직 내 가정에는 이런 어려움이 없으니 상관없다하고 무관심하고 안심하시는가 몰라도 어쩌면 내일은 또 내게, 우리 가정에 이런 어려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기 때문에 어려움 당한 지체들을 볼 때에 자신의 일로 보고 살피는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럴 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으로 절망하여 있는 가정이나 형제를 보고서 자신도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은 도와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자신 부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믿음을 가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찾아가서 위로를 해 주어야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오히려 더 시험들도록 만들어서 더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가 먼저 이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을 돕는 방법은 이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체감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을 최상으로 돕는 것입니다. 이것도 못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형제라고 하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이 뭘 돕는 것이 되는가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는 역사가 기도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매일 맡은 직분과 양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눈이 어두어서 앞을 보지 못하여 믿음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 신앙의 걸음이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자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고서 이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예배 공동체, 기도 공동체,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소경들의 눈이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눈이 소경된 자들도 그 눈이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원시치 못하여 어두운 데 있는 형제들의 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게하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심의 그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또 육신의 다리에 병들어 저는 자들이 고쳐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원하는 것은 신앙의 걸음을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앞만 보고서 달려갈 수있는 자들로 저는 다리를 고쳐주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 기적이 예배때 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기적이 기도할 때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병들이 고쳐질 때에 우리들에게 있는 육신의 약한 병들도 가 낫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하나님께로 회복될 때에 우리의 모든 외적인 얽히고 섥힌 문제들까지도 다 해결될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거룩한 성전인 교회임을 잊지맙시다. 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을 만들지 맘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을 만들어야합니다. 인간 사교의 장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사회의 어떤 정치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들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했던 사업들도 그 사업주의로 나갔을 때에 얼마되지 않아 속화되고 부패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하는 곳을 만듭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를 만들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상한 심령들, 세상에 죄악에서 마귀에게서 상처받은 심령들이 위로 받고, 사랑을 경험하고, 치료함을 받는 교회가 됩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끗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두어져 가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태워져야하고, 녹아져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은 두 번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했을 공생애 초기에 있었고, 이 시간 읽은 본문의 예수님 공생애 사건 마지막, 십자가 지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에 또 성전을 정결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두번이나 정결하게 하셨습니까 성전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성전을 절대시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성전생활을 잘못했습니다.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고, 또 지도자들은 이 성전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이권을 챙기는 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이 무엇인 것을 알아야하고, 예수께서 십자가로 대속을 다 이루신 이후인 신약시대에 성전생활은 어떻게하는 것인가를 교훈하시려는 목적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또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성전의 건물을 중히 여김보다 내적인 성전을 말씀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외적인 행위보다도 중요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과 하나님과의 사귀는 교제의 생활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 성전생활이 귀한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보이는 성전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이 헤롯이 지은 아름다운 성전을 보이면서 말했을 때에 이 성전은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보니까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성전 안에 어떤 자들이 있었습니까 성전 안에는 매매하는 자과 돈 바꾸는 자들 또 비둘기 파는 자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먼저 왜 이런 사람들이 있어야하는지 그 배경을 알아봅시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전 안에 있는데 대해서 주님께서 분노하신 것으로 해석을 하면 아닙니다. 여기에 성전 안은 성소나, 지성소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곳인데 이방인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뜰은 제사드리는 사람들만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의 뜰은 대제사장만 들어갑니다. 문제는 지금 이방인의 뜰에서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에는 일년에 한번 씩 예루살렘으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들이 빈손으로 오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전세를 내어야했고, 또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와야합니다. 이 때문에 본문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첫째로 , 매매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찾아옵니다. 이 희생의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필요합니다. 이 제물을 자기 집에서 부터 가져와야하는데, 문제는 그 먼곳에서부터 가지고 올 수가 었습니다. 또한 가지 문제는 그들은 랍비에게 이 짐승이 흠이 없다는 검인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부터 제물을 끌고 오면 자연 그 짐승이 약해지고, 상처를 입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 있는 제도가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파는 짐승을 사서 준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정말 흠없는 제물을 준비시키려고 했다면 왜 주님께서 책망을 하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로비활동을 합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자기 집에서 부터 끌고 오는 제물은 무조건 흠을 잡아서 통과를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성전안에 양과 소나 비둘기를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게 되는데 그 값은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종교행위에 이런 부패가 있었습니다.
둘째로, 환전하는 장사들입니다. 그 당시는 로마시대이기 때문에 일반 사회에서는 로마사람들의 돈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로마의 돈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리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도 로마나 이방인들을 종교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만든 세겔이라는 돈만을 성전 안에서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남자들은 성전세를 냅니다. 일년에 반세겔의 돈을 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달러 환율 문제로 어려운데 그 때에 로마 돈을 세겔로 바꾸는데 그들은 엄청난 환율로 계산해서 세겔로 바꾸었습니다. 한 마디로 쓰지 못할 돈을 만들어서 로마 돈을 바꾸어 자기들의 부를 축척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환전상들의 책상을 들러 엎으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장사꾼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에 주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강도의 굴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교회 안에 이 상업주의, 물질주의가 들어오면 그 즉시로 강도의 굴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돈 바꾸는 제도 자체에 대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짐승이나 비들기를 사고 파는 일 자체에 대해서 잘못된 것으로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도들이 처음 만들어 질 때에는 대개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서 세워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이 바뀌고, 중심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어느새 세속적이고 인간의 악이 들어오면서 그 제도가 부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양을 바치지 못하고 비둘기를 바쳐야하는 가난한 자들을 종교적이고. 거룩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제사의 이름으로 착취한 것입니다. 교회에 이기적인 인간의 야심이 들어가면, 물욕적인 욕심이 들어가면, 외식적이고, 인본적인 것이 들어가면 그 교회는 곧 썩게 됩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분노가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 교회를 점검해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심사해 보아야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아야합니다. 무엇 보다 자신은 자기가 정평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면서 또 우리 그리스도인 자신이 성전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인 성전,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겨야할 우리에게 과연 예수님이 들여다 보시면 우리들도 분노하셔서 우리들을 책망하시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자리를 뒤 엎으실 만한 잘못이 없습니까 요즘 교회의 현실도 살펴보면 세상과 비슷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세상보다 못하여 욕을 듣는 일도 있습니다. 세상이 숫자를 좋아하듯이 교회도 숫자를 좋아합니다. 세상이 돈을 좋아하듯이 교회도 돈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권력있는 사람들을 대우하듯이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세상이 적당한 술수를 쓰듯이 교회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서 부흥한 교회가 있으면 성공한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신일교회는 이 말씀에서 예외인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이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깨끗해야합니다. 우리 교회 부터 깨끗해야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깨끗해야합니다. 나 부터 살펴야합니다. 우리교회에는 우리들에게는 주님께서 분노하실만한 그런 장사꾼 같은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요소가 과연 없습니까 신앙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이용하여 세상 것을 채우려하는 기복주의는 없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이 글씨를 우리 교회 현관에 크게 봍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 교회 교인 누구라도 들어와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처소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업은 거창하게 못할지라도 큰 교회로 부흥은 시키지 못할지라도 우선 하나님께 예배가 있는 교회,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이럴 때에 그 교회가 성장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교회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결입니다. 성경공부로 지식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고, 열심히 몸으로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하면, 성결한 삶이 우리에게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남편이 그 아내에게 모든 것을 다 잘 해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흠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그 잘못이 다른 여자를 하나 데리고 있다면 그 어떤 것을 주는 것도 다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큰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고,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 중심을 다하여 드리는 예베일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않으면 크면 무엇합니까 우리 교회가 성장하고 부흥해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하는 교회로 성장한다면 얼마나 좋지만 그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방법으로 세속적으로 일시 부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과연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가 않으시는가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이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마21: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 절망하는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능력으로 고쳐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할일도 이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에 속한 가정들 중에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사고와 질병,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아직 내 가정에는 이런 어려움이 없으니 상관없다하고 무관심하고 안심하시는가 몰라도 어쩌면 내일은 또 내게, 우리 가정에 이런 어려움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기 때문에 어려움 당한 지체들을 볼 때에 자신의 일로 보고 살피는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럴 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으로 절망하여 있는 가정이나 형제를 보고서 자신도 믿음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은 도와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자신 부터 시험에 들지 않도록 믿음을 가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찾아가서 위로를 해 주어야할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오히려 더 시험들도록 만들어서 더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가 먼저 이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을 돕는 방법은 이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체감하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려움을 당한 가정들을 최상으로 돕는 것입니다. 이것도 못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형제라고 하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이 뭘 돕는 것이 되는가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는 역사가 기도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매일 맡은 직분과 양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소경과 저는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눈이 어두어서 앞을 보지 못하여 믿음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그 신앙의 걸음이 갈팡질팡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자들에게 힘과 소망을 주고서 이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예배 공동체, 기도 공동체, 선교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소경들의 눈이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눈이 소경된 자들도 그 눈이 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하는 원시치 못하여 어두운 데 있는 형제들의 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게하시고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심의 그 소망이 무엇이며,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또 육신의 다리에 병들어 저는 자들이 고쳐지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원하는 것은 신앙의 걸음을 좌우로 치우침이 없이 앞만 보고서 달려갈 수있는 자들로 저는 다리를 고쳐주시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이 기적이 예배때 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 기적이 기도할 때마다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병들이 고쳐질 때에 우리들에게 있는 육신의 약한 병들도 가 낫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하나님께로 회복될 때에 우리의 모든 외적인 얽히고 섥힌 문제들까지도 다 해결될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 거룩한 성전인 교회임을 잊지맙시다. 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을 만들지 맘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을 만들어야합니다. 인간 사교의 장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사회의 어떤 정치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들이 처음에는 좋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했던 사업들도 그 사업주의로 나갔을 때에 얼마되지 않아 속화되고 부패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하는 곳을 만듭시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를 만들어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상한 심령들, 세상에 죄악에서 마귀에게서 상처받은 심령들이 위로 받고, 사랑을 경험하고, 치료함을 받는 교회가 됩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깨끗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두어져 가는 세상의 빛입니다. 우리가 썩어가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태워져야하고, 녹아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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