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부터 오는 권세 (마21:23-27)
본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여기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련을 당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진리를 배워 순종하려고, 그래서 구원을 잘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그 하시는 일을 도전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권위있는 역사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고하는 소위 그 당시의 종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히려 외식과 위선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영광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런 종교 타락이 모순되게도 오늘 교회에서도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훼방하는 이런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마21:23)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다시말하면, 네가 누구관대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성전에서 마음대로 상을 뒤엎고, 호통을 치는 일을 하느냐 예루살렘 도시를 소동시키는 이런 일을 하느냐 병자들을 고치며, 이상한 교훈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대한 날카로운 질문은 예수님의 그 권위의 종류와 출처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지게 하려고 하는 처음 부터 미리 계획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답변을 우물쭈물하시면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사역은 사람에게서 나온 권위라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모독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만일 예수님께서 이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권위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네가 하나님이냐하며, 신성모독죄로 걸어서 고소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함정 가운데에 하나에라도 빠지게 해서 저들의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아주 간교하고 야비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에 지혜롭게 대응하신 주님의 지혜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원수들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의 지혜를 구하면 무슨 말할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21:24)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하시고는 (마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흉악한 의도를 아시고, 그들에게 역질문으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고 대답하자니, “그러면 왜 세례요한을 죽였느냐” 하여 백성들이 저들을 돌로 칠 것이고, 또 “세례요한의 권세는 사람에게서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으니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답을 못하므로 결국은 간접적으로 요한의 회개하는 세례가 하늘로 부터 온 것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요한의 증거가 참된 것인데, 그 증거했던 내용인 “그리스도의 권세가 바로 하늘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침묵했지만, 그로서 결국 저들 스스로 증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예수님은 빠지지 않았고, 도리어 저들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하늘로 부터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 있고, 또 땅에서 나온 권세가 있는데, 너희들이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고서 무슨 권세로 누가 허락했는가 묻지마는 실은 너희들이 땅에 속한 권세, 잘못된 교권주의, 권위로 월권하고 있는것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저들에게 있는 기득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볼까봐 예수님을 정죄하고 시험하고 죽이기 까지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마다 교권주의는 다 있습니다. 이 교권주의자들이 어떤 중심으로 이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인본주의요,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기와 권위를 더 중요시 했습니다. 뻔히 알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하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고, 훼방하는 이 악한 일을 하므로 멸망했습니다. 이들은 진실이 없었습니다. 만일 저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라면 끝까지 그대로 주장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이요, 인본주의자입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자기들 할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육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두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세례요한의 사역을 내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례요한은 그들과 한 시대의 사람이지만, 저들과는 달랐습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영광과 권위, 자신들의 유익만을 생각했을 때에도,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영광을 위해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하라는 사명을 띄고, 자기보다 육개월 뒤에 이 세상에 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세상에 외치고, 증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중심이 이것인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과연 선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자라는 인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친히 세운 또 자기만을 그렇게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 뒤에 혜성같이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그를 따를 때에도 그는 여기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도리어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고, 또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나 그분은 성령님으로 불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제자들을 따르게 했습니다. 또 자신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쇠하여야할 것이고, 주님과 주님의 하시는 사역은 흥하여야하리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그 깨달음대로 진실되게 주장하므로 롯왕에게 목 베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말씀한 것은 그들의 권위주의와 세례요한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권위로 행한 것을 대조적으로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연 바른 영적인 지도자입니까 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땅에서 세운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하는 소위 권위주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권위로 세움을 입은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마3:7)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어떤 권위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권위와 그 사명을 위하여 백성들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권위로 섬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들과 같은 권위주의, 교권주의는 우리가 버려야합니다. 세례요한 같이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섬기는 일을 행해야합니다. 또 우리는 이 말씀을 중심해서 권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구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권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이 권위에 대하여 모르면 치우치기 쉽습니다. 요즘은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시대입니다. 무엇인가 질서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하여는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청소년들의 유행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좋은 머리털을 왠 염색을 그렇게 하는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합니다. 흰색 노란 색, 붉은 색.푸른색. 옷도 원래 청바지는 작업복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그 간편한 옷을 입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천이 해어지고 그래서 기름 묻은 그대로, 떨어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것인데, 정신이 나간 청소년들이 다 떨어진 외제 청바지를 새 청바지 보다 더 비싼 돈 주고 사니까, 이제 옷 장사들은 일부러 새 옷을 탈색하고 천에다 구멍을 내고 바지가랭이는 찢어서 질질 끌고 다니게 합니다. 옷도 이제는 재봉선이 밖으로 나오도록 거꾸로 입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유행으로 보면 안됩니다. 유행도 따를 것이 있고 따르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모든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들을 갑갑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오늘 입니다만 이것은 정로가 아니요, 탈선입니다. 이것은 정신문화들에 사단의 역사가 들어와서 문화가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성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파괴행위입니다.
우리 기독학생들은 이런 타락한 세대를 본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본 받아야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시대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세대가 아니라, 다 예수 세대입니다. 영원하신 진리가 되신 예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예수 마음으로 살아야 모든 세대차 뿐 아니라, 지역감정, 모든 문화의 장벽 까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이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공연히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역사를 방해하는 마귀의 미혹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이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우리들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인, 가정, 정부, 회사, 학교,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이 모든 권위가 무너지면 우리 신앙생활도 무너집니다. 신앙의 근거가 권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권위의 근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주제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하여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존재합니다. 이런데 이 권위의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혼돈과 암흑과 무질서를 성령님의 역사로 빛으로 질서있게 정돈하셨습니다. 타락한 천사가 이 질서를 깨뜨리려했는데, 인류시조가 이 마귀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하므로 죄악이 우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이 고귀하고 거륵한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지고, 마귀의 형상을 닮은 타락된 본성인 불순종, 거역의 본질과 본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인가 권위에 순종하는 삶은 바보 같이 여겨지면서, 그 권위들을 비판하고, 또 도전하는 것이 지성같고, 그래야 인간같은 삶을 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꾀운 이후에 인간에게 온 타락한 부패성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엇인가 거역하고, 분노하고, 반항적인 것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직까지 그 속에 파괴하는 악령의 요소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나가는 것은 오히려 이런 타락된 요소를 원수인줄 알아 뽑아 내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생긴 쓴 뿌리로 인하여 항상 반항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늘 불만의 시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그 성격을 고치지 않는 한, 그 시각을 순종의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하지 못합니다. 이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게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가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글복하라”고 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선한 권세 뿐 아니라, 악행하는 권세에 대해서까지도 우리는 그 권위는 인정하여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정부와 사회구조나 모든 경제 구조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들에게 대하여 말씀하기를 “너희에게 잘해주는 좋은 주인뿐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권위에 대하여 도전, 부정하는 일이 있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잘못하는 권위로 인하여 너희에게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래서 그 권위에게 순교 당할지라도 그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묘합니다. 우리에게 재림신앙이 종요하기 때문에 잘못된 재림신앙을 가진 휴거파들을 만들어서 재림을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교리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파 같은 이단을 만들어서 우리 구원관에 대하여 흔들고 구원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 권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마귀는 권위 비슷한 권위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권위주의는 버려야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버리면 안됩니다. 권위가 없으면 모든 질서가 파괴됩니다. 세상적인 권세, 마귀의 권위주의의 권세가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권위로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일 대통령 선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권과 의무를 행사해야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이 권위를 주셨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하라” 했습니다. 가정의 영적인 지도력은 남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잘 안되는 가정은 이 면에 힘을 써야합니다. 아내의 신앙이 먼저 시작되었고, 또 아내가 항상 열심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 가정의 목표는 내 남편이, 우리 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믿음의 호주가 되어야 바로되는 것인줄 알고 힘을 써야합니다. 아내가 신앙에 한 걸음 뒤로 물러가서 남편을 앞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남편의 영적인 권위를 세워주어야합니다. 남편들, 아버지들은 이를 위해 힘을 써야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누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바로 행하여서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리 가정의 머리가 되기를 힘써야합니다. 이 가정에 마귀가 주는 세속적인 권위주의가 들어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인 영적인 권위로 가정을 남편이, 아버지가 호주가 되어 다스릴 때에 우리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질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권위를 학교에, 직장에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배운 권위의 순종으로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께 순종해야합니다. 잘 못하는 선생님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순종을 먼저 배워야합니다.
질서를 무너뜨리면 우리의 삶이 무너집니다. 직장인들도 그렇습니다. 그 직장의 권위에게도 그 상전에 대하여 주께 하듯하라고 성경은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삶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럼 불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순결하여야합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아야합니다. 반항이 아니라, 잘못되었기 때문에 뒤집는 것이 아니라, 내게 책임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진실하게 살다가, 진실을 말하다가 손해도 보고, 어려움도 당하고, 미움도 당해보고, 그러다가 쫒겨나기도 하고 순교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에 대해서 무너뜨리는 일은 죄악입니다. 소리지르는 능력보다도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는 바꾸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워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승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도 이 권위를 주셨습니다. (살전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살전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는 어떤 권위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높아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책임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목사가 대통령을 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먼저 영적 지도자된 사람이 권위주의를 버려야합니다. 세속적인 권세를 쓰는 것을 교회에서 막아야합니다. 교회에서는 땅에서부터 오는 권세는 베격해야합니다. 세상적으로 잘 났고, 권세있고, 영향력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득세한다면 그것을 교회가 아닙니다. 하늘로 부터 오는 권세를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권위,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권위가 교회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을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들고 어리고, 잘났고, 못났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데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영적인 권위를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 권위를 무너뜨리면 하나님께서 그를 잡고서 하시고자하는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권위에 대하여 순종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은 교회가 세상적인 권세, 땅에서 오는 권세를 가지고 교권, 권위주의로 역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본문의 말씀에서 권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국가, 가정, 교회, 학교, 직장, 군대등에 대하여는 그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권위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불순종, 거역의 품성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세상의 권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순종을 하지만, 이것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오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는 마귀적인 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세속적 권위주의는 사라져야합니다. 실은 세상에서의 권위는 다 지나가는 것이요, 다 헛된 것입니다. 이를 교회에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세상 정권에 이용 당해 정권에 앞잡이가 되거나, 또는 이 세상 정권을 이용하려고 해도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영적인 권위는 하늘로 부터, 곧 하나님께로서 세우신 권위입니다. 이것이 크고 거룩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 같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권위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해야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영광이나 이름은 사라지고, 쇠해져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주님께 쓰임을 받는 자 되는 줄 알아야합니다. 특히 교회의 영적인 권위에 순종을 해야합니다. 비록 지도자가 연약하고 어릴지라도 세상적으로 부족할지라도 그를 하나님께서 무리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웠으면 그 무리는 그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여야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목회자이기에 제게 대하여만 순종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은 교역자에게 순종하여야합니다. 그러나 교역자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만 해도 권위로 세운 기관과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도자가 된 사람은 권위주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만을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이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인 아버지가, 남편이 그 권위를 가지고서 가족들 위에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천국은 섬기는 자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그 가정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또 “섬긴다”고 하니까 남편이 돈 많이 벌어오고, 집에 있으면서 설겇이 해주고 빨래하고, 아이들 보고 하는 것을 섬기는 것으로 알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 가지는 것이 그 가정에서 모든 가족에게 평강과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잘 섬기는 것이 어디있습니까 목사가 교인을 섬기는 것은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 교인들을 권위를 가지고 제 맡은 일에서 바로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권위를 가지고, 자기 위치에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이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권위를 알고 바로 사용하고, 또 순종합시다. 우리가 성령님께 간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권위를 깨달게 해주시고, 우리 안에 모든 반항하고, 거역하는 성품을 뽑아 주시기를 간구해야합니다. 주님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이 온유와 겸손과 순종의 걸음으로 점점 변화를 입어나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권위를 가지고서 세상의 악과 싸워서 이기고, 의로 승리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질문은 예수님께 진리를 배워 순종하려고, 그래서 구원을 잘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그 하시는 일을 도전하고 훼방하기 위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권위있는 역사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고하는 소위 그 당시의 종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이렇게 됩니다. 오히려 외식과 위선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들의 영광을 더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이런 종교 타락이 모순되게도 오늘 교회에서도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령님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들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훼방하는 이런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마21:23)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다시말하면, 네가 누구관대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 성전에서 마음대로 상을 뒤엎고, 호통을 치는 일을 하느냐 예루살렘 도시를 소동시키는 이런 일을 하느냐 병자들을 고치며, 이상한 교훈을 가르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대한 날카로운 질문은 예수님의 그 권위의 종류와 출처를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지게 하려고 하는 처음 부터 미리 계획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답변을 우물쭈물하시면 결국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사역은 사람에게서 나온 권위라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무리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모독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만일 예수님께서 이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로서 나온 권위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네가 하나님이냐하며, 신성모독죄로 걸어서 고소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함정 가운데에 하나에라도 빠지게 해서 저들의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아주 간교하고 야비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 말씀에 지혜롭게 대응하신 주님의 지혜를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원수들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의 지혜를 구하면 무슨 말할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승리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21:24)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하시고는 (마21:25)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흉악한 의도를 아시고, 그들에게 역질문으로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고 대답하자니, “그러면 왜 세례요한을 죽였느냐” 하여 백성들이 저들을 돌로 칠 것이고, 또 “세례요한의 권세는 사람에게서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으니 백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답을 못하므로 결국은 간접적으로 요한의 회개하는 세례가 하늘로 부터 온 것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요한의 증거가 참된 것인데, 그 증거했던 내용인 “그리스도의 권세가 바로 하늘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침묵했지만, 그로서 결국 저들 스스로 증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그들이 파 놓은 함정에 예수님은 빠지지 않았고, 도리어 저들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하늘로 부터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 있고, 또 땅에서 나온 권세가 있는데, 너희들이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고서 무슨 권세로 누가 허락했는가 묻지마는 실은 너희들이 땅에 속한 권세, 잘못된 교권주의, 권위로 월권하고 있는것이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은 저들에게 있는 기득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볼까봐 예수님을 정죄하고 시험하고 죽이기 까지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시대마다 교권주의는 다 있습니다. 이 교권주의자들이 어떤 중심으로 이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인본주의요, 자기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기와 권위를 더 중요시 했습니다. 뻔히 알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부정하고, 예수님의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고, 훼방하는 이 악한 일을 하므로 멸망했습니다. 이들은 진실이 없었습니다. 만일 저들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진리라면 끝까지 그대로 주장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세를 따르는 사람들이요, 인본주의자입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자기들 할 말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육신의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더 크고 두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세례요한의 사역을 내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례요한은 그들과 한 시대의 사람이지만, 저들과는 달랐습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영광과 권위, 자신들의 유익만을 생각했을 때에도,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영광을 위해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의 일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평탄케하라는 사명을 띄고, 자기보다 육개월 뒤에 이 세상에 오신 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세상에 외치고, 증거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의 중심이 이것인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으며,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았습니다. 과연 선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온 자라는 인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친히 세운 또 자기만을 그렇게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예수라는 청년이 자기 뒤에 혜성같이 나타나므로 사람들이 그를 따를 때에도 그는 여기 주님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도리어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했고, 또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나 그분은 성령님으로 불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소개하면서 제자들을 따르게 했습니다. 또 자신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쇠하여야할 것이고, 주님과 주님의 하시는 사역은 흥하여야하리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그 깨달음대로 진실되게 주장하므로 롯왕에게 목 베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말씀한 것은 그들의 권위주의와 세례요한의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권위로 행한 것을 대조적으로 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과연 바른 영적인 지도자입니까 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땅에서 세운 권위를 가지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하는 소위 권위주의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권위로 세움을 입은 영적인 권위를 가진 자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가지고 (마3:7)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어떤 권위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받은 권위와 그 사명을 위하여 백성들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권위로 섬기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이 대제사장들과 같은 권위주의, 교권주의는 우리가 버려야합니다. 세례요한 같이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섬기는 일을 행해야합니다. 또 우리는 이 말씀을 중심해서 권위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구원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권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이 권위에 대하여 모르면 치우치기 쉽습니다. 요즘은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시대입니다. 무엇인가 질서나 보편적인 가치에 대하여는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청소년들의 유행만 봐도 그렇습니다. 공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좋은 머리털을 왠 염색을 그렇게 하는지, 아프리카 사람들이 하는 짓을 합니다. 흰색 노란 색, 붉은 색.푸른색. 옷도 원래 청바지는 작업복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그 간편한 옷을 입고, 열심히 일하다보니 천이 해어지고 그래서 기름 묻은 그대로, 떨어진 그대로 입고 다니는 것인데, 정신이 나간 청소년들이 다 떨어진 외제 청바지를 새 청바지 보다 더 비싼 돈 주고 사니까, 이제 옷 장사들은 일부러 새 옷을 탈색하고 천에다 구멍을 내고 바지가랭이는 찢어서 질질 끌고 다니게 합니다. 옷도 이제는 재봉선이 밖으로 나오도록 거꾸로 입는 것이 유행이랍니다. 여러분 이것을 유행으로 보면 안됩니다. 유행도 따를 것이 있고 따르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장난입니다. 모든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로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들을 갑갑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오늘 입니다만 이것은 정로가 아니요, 탈선입니다. 이것은 정신문화들에 사단의 역사가 들어와서 문화가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기성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요,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파괴행위입니다.
우리 기독학생들은 이런 타락한 세대를 본 받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본 받아야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느시대나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세대가 아니라, 다 예수 세대입니다. 영원하신 진리가 되신 예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예수 마음으로 살아야 모든 세대차 뿐 아니라, 지역감정, 모든 문화의 장벽 까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도 이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공연히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역사를 방해하는 마귀의 미혹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는 이들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우리들도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인, 가정, 정부, 회사, 학교,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이 모든 권위가 무너지면 우리 신앙생활도 무너집니다. 신앙의 근거가 권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권위의 근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주제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하여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존재합니다. 이런데 이 권위의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혼돈과 암흑과 무질서를 성령님의 역사로 빛으로 질서있게 정돈하셨습니다. 타락한 천사가 이 질서를 깨뜨리려했는데, 인류시조가 이 마귀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불순종하므로 죄악이 우주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에게는 이 고귀하고 거륵한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지고, 마귀의 형상을 닮은 타락된 본성인 불순종, 거역의 본질과 본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무엇인가 권위에 순종하는 삶은 바보 같이 여겨지면서, 그 권위들을 비판하고, 또 도전하는 것이 지성같고, 그래야 인간같은 삶을 사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꾀운 이후에 인간에게 온 타락한 부패성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무엇인가 거역하고, 분노하고, 반항적인 것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아직까지 그 속에 파괴하는 악령의 요소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나가는 것은 오히려 이런 타락된 요소를 원수인줄 알아 뽑아 내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생긴 쓴 뿌리로 인하여 항상 반항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늘 불만의 시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그 성격을 고치지 않는 한, 그 시각을 순종의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올바로 하지 못합니다. 이 권위와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게 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가 움직이는 원리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글복하라”고 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선한 권세 뿐 아니라, 악행하는 권세에 대해서까지도 우리는 그 권위는 인정하여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정부와 사회구조나 모든 경제 구조를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들에게 대하여 말씀하기를 “너희에게 잘해주는 좋은 주인뿐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 권위에 대하여 도전, 부정하는 일이 있으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잘못하는 권위로 인하여 너희에게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래서 그 권위에게 순교 당할지라도 그 권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귀는 교묘합니다. 우리에게 재림신앙이 종요하기 때문에 잘못된 재림신앙을 가진 휴거파들을 만들어서 재림을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교리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원파 같은 이단을 만들어서 우리 구원관에 대하여 흔들고 구원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 권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마귀는 권위 비슷한 권위주의를 만들었습니다. 권위주의는 버려야합니다. 그러나 권위를 버리면 안됩니다. 권위가 없으면 모든 질서가 파괴됩니다. 세상적인 권세, 마귀의 권위주의의 권세가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시는 권위로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열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내일 대통령 선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권과 의무를 행사해야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이 권위를 주셨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하라” 했습니다. 가정의 영적인 지도력은 남편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잘 안되는 가정은 이 면에 힘을 써야합니다. 아내의 신앙이 먼저 시작되었고, 또 아내가 항상 열심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우리 가정의 목표는 내 남편이, 우리 아버지가 우리 가정에 믿음의 호주가 되어야 바로되는 것인줄 알고 힘을 써야합니다. 아내가 신앙에 한 걸음 뒤로 물러가서 남편을 앞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남편의 영적인 권위를 세워주어야합니다. 남편들, 아버지들은 이를 위해 힘을 써야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누구 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바로 행하여서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우리 가정의 머리가 되기를 힘써야합니다. 이 가정에 마귀가 주는 세속적인 권위주의가 들어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인 영적인 권위로 가정을 남편이, 아버지가 호주가 되어 다스릴 때에 우리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질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권위를 학교에, 직장에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학생들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배운 권위의 순종으로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께 순종해야합니다. 잘 못하는 선생님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지 우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순종을 먼저 배워야합니다.
질서를 무너뜨리면 우리의 삶이 무너집니다. 직장인들도 그렇습니다. 그 직장의 권위에게도 그 상전에 대하여 주께 하듯하라고 성경은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의 삶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럼 불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순결하여야합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아야합니다. 반항이 아니라, 잘못되었기 때문에 뒤집는 것이 아니라, 내게 책임이 있는 줄 알고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진실하게 살다가, 진실을 말하다가 손해도 보고, 어려움도 당하고, 미움도 당해보고, 그러다가 쫒겨나기도 하고 순교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위에 대해서 무너뜨리는 일은 죄악입니다. 소리지르는 능력보다도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는 바꾸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워하고 투쟁하는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가 되는 것으로 승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도 이 권위를 주셨습니다. (살전5: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살전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는 어떤 권위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높아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책임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목사가 대통령을 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먼저 영적 지도자된 사람이 권위주의를 버려야합니다. 세속적인 권세를 쓰는 것을 교회에서 막아야합니다. 교회에서는 땅에서부터 오는 권세는 베격해야합니다. 세상적으로 잘 났고, 권세있고, 영향력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득세한다면 그것을 교회가 아닙니다. 하늘로 부터 오는 권세를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는 권위, 하나님의 말씀의 영적인 권위가 교회의 권위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을은 디모데에게 “네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이가 들고 어리고, 잘났고, 못났고,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데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영적인 권위를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 권위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이 권위를 무너뜨리면 하나님께서 그를 잡고서 하시고자하는 일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권위에 대하여 순종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젊은 자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맡은 교회가 세상적인 권세, 땅에서 오는 권세를 가지고 교권, 권위주의로 역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들은 본문의 말씀에서 권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국가, 가정, 교회, 학교, 직장, 군대등에 대하여는 그 권위를 세우신 하나님 권위로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불순종, 거역의 품성은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세상의 권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순종을 하지만, 이것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오면 안됩니다. 그러면 이는 마귀적인 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세속적 권위주의는 사라져야합니다. 실은 세상에서의 권위는 다 지나가는 것이요, 다 헛된 것입니다. 이를 교회에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세상 정권에 이용 당해 정권에 앞잡이가 되거나, 또는 이 세상 정권을 이용하려고 해도 교회는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영적인 권위는 하늘로 부터, 곧 하나님께로서 세우신 권위입니다. 이것이 크고 거룩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 같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권위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해야합니다. 자신의 명예나 영광이나 이름은 사라지고, 쇠해져야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주님께 쓰임을 받는 자 되는 줄 알아야합니다. 특히 교회의 영적인 권위에 순종을 해야합니다. 비록 지도자가 연약하고 어릴지라도 세상적으로 부족할지라도 그를 하나님께서 무리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웠으면 그 무리는 그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여야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목회자이기에 제게 대하여만 순종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교인들은 교역자에게 순종하여야합니다. 그러나 교역자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만 해도 권위로 세운 기관과 직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도자가 된 사람은 권위주의가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만을 사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세웠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요, 오히려 이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인 아버지가, 남편이 그 권위를 가지고서 가족들 위에 독재자로 군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천국은 섬기는 자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가지고 그 가정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또 “섬긴다”고 하니까 남편이 돈 많이 벌어오고, 집에 있으면서 설겇이 해주고 빨래하고, 아이들 보고 하는 것을 섬기는 것으로 알면 안됩니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하겠지만,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고 가지는 것이 그 가정에서 모든 가족에게 평강과 신뢰를 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잘 섬기는 것이 어디있습니까 목사가 교인을 섬기는 것은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것이 교인들을 권위를 가지고 제 맡은 일에서 바로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권위를 가지고, 자기 위치에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이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합니다. 권위를 알고 바로 사용하고, 또 순종합시다. 우리가 성령님께 간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권위를 깨달게 해주시고, 우리 안에 모든 반항하고, 거역하는 성품을 뽑아 주시기를 간구해야합니다. 주님 같이 우리의 모든 삶이 온유와 겸손과 순종의 걸음으로 점점 변화를 입어나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 권위를 가지고서 세상의 악과 싸워서 이기고, 의로 승리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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