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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마21:1-11)

본문

오늘은 교회력에 따라 종려 주일이고, 다음 주일까지의 한 주간을 고난 주간 또는 수난 주간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처럼 마지막 생애를 극적으로 멋있게 끝마친 분은 인류 역사상 찾아 볼 수 없으며, 다시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이 마지막 극적인 장면의 서론으로 우리의 구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 아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자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눅 19:30), 많은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지르기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니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했다.
1.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 당시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사람들은 여리고에서 출발하여 베다니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상적인 여정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순서가 뒤바뀌어 등장한다. 이는 예수의 입성을 다른 순례자와 같은 반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입성 그 자체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감람 산은 예루살렘 동편을 건너 남북으로 약 10리 길이나 되는 동산으로 감람나무가 많아서 이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벳바게는 그 정확한 위치를 기술하기는 어렵지만 예루살렘과 베다니 사이에 있는 듯하며 그 이름은 “무화과의 집”이란 뜻이다. 성경 어디에도 이곳 이외에는 지명으로 등장치 않고 있다.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를 보여 주고 있는 본문은 구세주이고 만왕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입성을 위한 행렬 준비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두 제자를 보내셨다는 것에 대한 별다른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의 관례에 따르면 심부름꾼을 보낼 때는 언제나 둘씩 짝지어서 보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귀를 빌어 오도록 지시하는 일에서 우리는 매사에 철두철미한 그리스도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특히 “누가 쓸 것인가” 하는 예견되는 장애물에 대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방법 제시는 지금도 그가 행하도록 명하신 것을 우리가 행할 때에 우리의 언행 심사를 적극적으로 돕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결론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은 승낙없이 남의 나귀 하나도 사용치 않으시려는 공의로운 한 단면을 직시해 볼 수 있다. 공생애 3년을 통하여 일찍이 들어보지 않은 예수의 강권적 언행을 대하게 된다. 임금은 왕권을 발동하여 아무 것이나 징발할 수도 있는 분이다(삼상 8:17). 이제 예수는 자신이 만물의 “주님”이시므로(막 12:37) 하찮은 새끼 나귀 따위 한 마리를 징발하는데, 어떤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됨이 없는 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 자체가 이미 계시된 구약의 예언 성취의 시작일진대 하찮은 나귀 새끼 한 마리 가져 온 사건 전개에서까지 예수는 철저하리만큼 예언 기법을 동원한다. 본문에서는 두 제자들이 막상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후발 설명을 생략하고 다만 이 사건을 예언의 완성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나귀 동원이 주된 테마라기보다는 예루살렘 입성에 따른 한 지엽적인 사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의 말씀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어 예수가 앞일을 환히 내다보시는 분임을 명료하게 설명한다(막 11:5-6). 본문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두 행동의 결과, 즉 심부름 떠나는 제자들과 나귀 주인의 행동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정확한 자초지종의 설명이 없이 가서 끌어오라는 일방적인 어투인고로 그 과정에서의 갈등이 연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말씀대로” 준행한 것이나, “주께서 쓰시겠다”는 한 마디만으로 자기의 재산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주인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의 원리와 헌신의 실증이 되었다. 나귀의 주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니, 아낌없이 주님께 바쳤다. 그 누가 와서 나귀를 팔라고 해서 주고, 그 어떤 권력자가 나귀를 뺏으려 한다고 뺏기겠으며, 또 자식이나 부모, 아니면 친척이 달라고 한들 주겠는가 그러나 주님이 쓰신다 하니 그렇게 정성으로 기른 나귀였지만 아낌없이 기쁜 마음으로 바쳤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이 필요하고 주님께서 쓰신다고 할 때, 몸도 시간도 물질도 정력도 재능도 아낌없이 바치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구약 스가랴 9장의 내용에 있는 바와 같이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예루살렘에 왕이 입성하는데, 그 왕은 겸손하여서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극적인 행동을 통하여 자신이 왕이시라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것은 세계의 왕과는 다른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세계의 권세를 가진 왕이라면 군마를 타고, 창검을 가진 군인들이 뒤따라야 하는데, 여기에는 창검 대신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을 뿐이다. 이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 초라한 모습이며 나약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한 짐승, 흠모할 만 하거나 아름다운 것도 전혀 없는 모습이다. 무장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서 어찌 불의한 사회를 정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백성들은 기대를 예수님께 걸었다. 많은 질병을 고쳐 주시고 수많은 권위들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던 예수님이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성껏 모셨다. 말씀대로 나귀를 끌고 와서 그들의 겉옷을 깔았다. 제자들까지도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의 입성이 이제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군중들도 승리의 상징이 되는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깔고 흔들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승리할 것이며, 예루살렘에서 유대의 왕이 될 것이며, 유대 나라는 독립할 것이며, 로마 세력은 물러갈 것이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국은 곧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승리의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앞뒤를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창검이 들려 있지 않았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과 종려나무 가지를 든 백성들, 이것이 “첫 번째 종려주일”, 즉 예루살렘 입성의 모습이었다. 백성들은 하나같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다. “호산나”의 본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이다.
그런데 후대에 “만세”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메시야 만세”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의 나라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는 한 마디로 “메시야에 대한 감격의 칭호”이요, 드디어 메시야, 구원자가 오신다는 외침이다. 이 외침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 이 환호성 속에는 위대하고 찬란했던 옛 왕국의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그리고 길고 긴 고난의 역사가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리들은 역사의 환호이며 감격이다. 한편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옛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이삭의 등에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사지로 끌고 가는 모습과 같다. 많은 군중들이 그를 환영하고 앞서며, 뒤서며 따르지만, 몇 날이 지나면 지금의 환호성과 같은 큰 소리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고 아우성을 칠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롭고 괴로운 걸음이었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은 겉으로 낙심하지도 아니하고, 용기를 가지고 그 행렬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예수님은 이 데모의 행렬이 이 죄악의 세상을 승리로 이끄는 길임을 확신하고 용기를 가졌다. 요 16:33에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속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심히 고독한 것 같지만 그 심령은 한없는 하늘의 영광으로 차 있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반응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 기간으로써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과 또 전국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큰 인파로 온 거리는 메워져 있었다. 무리들은 옛날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던 전날 밤에 있었던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난에서, 이스라엘의 집이 그 재난을 면하고 놀라운 해방을 맞이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늘 옛날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예수님은 베다니에서부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 옷을 벗어 나귀 등에 깔고, 또 무리들은 그들의 옷을 길에 깔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예수님의 행차를 환영하였다. 이 예수님의 행차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오늘의 상황으로 바꾸어 생각하여 보자. 예수님은 작은 조랑나귀 새끼에 걸터 앉으시고, 제자와 무리들은 앞뒤에 따르며 수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그 때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 든 순례자의 수는 약 250만 명이 달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이 행렬은 베다니에서 시작할 때는 별 것이 없었으나 도성에 가까워지면서 그 수는 엄청난 숫자로 늘어났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 성이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종려 주일은 이렇게 예루살렘 성에 큰 소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큰 소동을 불러일으키게 한 장본인이 되는 분이 누구인가 과연, 예루살렘의 모든 불의를 쓸어버리고 왕이 될 자인가 백성들이 생각했고 기대하고 있는 대로 행할 자인가 아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며 평화의 주이시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 때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기 나름대로 받아들이므로 소동이 나게 되며 혼란이 생기게 된다. 예수님의 입성 때문에 로마 당국은 민중 반란을 염려하게 되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분노한 나머지 악의를 품게 되었다. 헤롯의 추종자들은 권력이 탈취당할 것을 두려워했고,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대망의 메시야를 맞게 되어 기뻐하였다. 이러한 감정의 엉뚱한 착각 속에서 큰 소동이 생긴 것이다. 나사렛 예수, 과연 그는 누구인가 사람이 타락한 이후 그는 여인의 후손, 아브라함의 자손, 모세와 같은 선지자, 이새의 뿌리, 다윗의 자손 등으로 암시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제기되어 온 것이었으므로, 성령님으로 잉태된 자, 죄에서 구원할 자로 구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의하면, 이 사람이 누구냐에 대하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11절)라고 대답했다. 때때로 백성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가까울 수가 있다. 이 대답이 완벽한 것은 아닐지라도 틀린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본 까닭은 무엇인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렸을 때에도 그랬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정상으로 고쳐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까지 하였으니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나셨도다”고 아니할 수 없었다. 그 이후 백성들은 제자들이 듣고 말한 대로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성전의 주인이시며, 성전을 세우시는 분이다.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시다. 생사 화복의 주관자요,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능력의 근본이 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주님께서는 자기를 버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고난의 길을 가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는 이번 고난 주간에 깊은 깨달음과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이처럼 예수님의 최후의 사역은 여러 가지 반응을 나타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야만 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예수님을 잡은 무리들이 있는 예루살렘에 고난을 받기 위하여 가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왔기 때문이며, 선지자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은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한 길이며, 온 인간의 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이 사역을 위하여 나귀를 타시고 영광의 도성에 입성하셨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므로 시작되었다.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며 영광의 행진인 동시에 고난의 기록이다.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중 최후 고난의 한 주간의 기사가 복음서마다 약 3분의 1을 차지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입성은 승리의 입성이었다. 종려나무 가지가 하늘을 가리우고 겉옷이 땅 위에 깔려 그의 발길을 덮었다. 백성들의 환호성과 호산나의 소리는 온 성을 진동시켰다. 그 어떤 개선 장군도 이렇듯 열광적인 환영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입성은 십자가의 고난과 속죄의 메시야 상을 이루는 과정으로서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슥 9:9). 예수는 군마 대신 나귀를 타고 창검 대신 종려나무를 흔들며 군인들의 나팔 소리보다 아이들의 노래로 입성하였으니 평화의 왕이셨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들은 환성을 질렀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축복을” 무리들은 예수를 왕으로 영접했다. 호산나는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도우소서”란 뜻이다. 이 말은 어려운 고통중에 중에 빠진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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