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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기쁨 그리고 사명 (요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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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주일을 지키게 된 것은 계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의 자발적 헌신에 의한 것이다. 물론 세례가 그 기원을 할례에 두듯이 주일의 뿌리를 안식일에서 찾을 수 있겠으나 구약의 안식일과 의미는 아주 다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무거운 짐이었다. 범하면 죽음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도 ‘안식일을 범하고 하나님에게 죽으면 갈 곳이 어디겠는가 차라리 안식일 지키다가 적의 손에 죽으면 하나님께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참 안식은 어디에 있는가 예수 안에 안식이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눅 6:5)이다. 그래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다. 이 예수 품안에 들어올 때 안식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 안식이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시 23:2)하시기에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히 4:8-11).
그런데 유대인들은 문자적 안식일에 매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주일은 기쁨의 날이었다. 희망의 날이요, 소생의 날이었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주일을 성수하라 하신 명령을 찾을 수 없으나 안식일의 멍에에서 해방된 성도들이 스스로 모여 감사함으로 예배하고 주를 섬기기 시작한 것이다. 왜 주일을 소중히 여겼을까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새벽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시고 두려움을 기쁨으로 변화시키셨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이다. 제자들에게 능력을 입히셔서 사명을 감당케 하신 날이다. 이 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기도하다가 하늘 문이 열려 계시록의 계시를 받았다(계1:10). 그래서 초대 교회는 자연스럽게 주일에 모이기 시작하였다(행 20:7, 고전 16:1-2).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준 선물은 무엇일까
1. 부활의 선물
첫째, 불안과 두려움에 있던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셨다. 부활의 소식은 들었으나 직접 보지 못한 제자들은 그 날 저녁 때까지 두려워하며 함께 모여 있었다. 이 때 부활하신 주님은 나타나셨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의 보통 인사말(마10:12)이지만 이 말씀은 단순하고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과 함께 그들에게는 마음에 평안이 넘쳐 흘렀다.
둘째, 근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기쁨을 주셨다. 예수님은 전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했으나 원수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변하였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뵈었을 때 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셋째,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17절) 하셨던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도 사명을 맡기시고 이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님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제자들에게서와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안을, 근심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쁨을, 낙심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명을, 그리고 무능한 자에게는 성령님의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2. 자리에 없었던 도마 부활하신 주님은 안식 후 첫날(즉 주일) 저녁에 제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확신과 평강과 기쁨을 주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이 놀라운 사건의 순간에 불행히 도마는 함께 있지 못했다. 여기에 비극이 있었다. 아무리 큰 은혜와 능력이 임한다 해도 함께 있지 않은 자에는 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고 하셨다. 이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5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성령님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약속대로 성령님 충만 받은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던 120명뿐이었다. 아마 계속 머물러 있다가 잠깐 나갔다 온 사람도 이 큰 은혜를 체험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8일 후 예수님은 도마가 있는 자리에 다시 찾아 오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확신을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도마의 신앙을 확인하여 이 시대의 도마가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도마의 믿음을 헤아려 보자.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첫째, 도마는 함께 있지 아니했다. 늘 함께 있던 자리에 세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안 계셨고 가룟 유다가 없었으며 도마가 함께 있지 않았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목매어 죽었으니(마 27:5) 이곳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도마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곳을 찾아오셨을 때 도마는 어디 있었는가 성경은 말한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예수님께서 잠깐 다녀가신 것이 아니라 한동안 말씀을 나누셨지만 그 때까지 오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자리를 떠난 것이다. 삼년 동안 따라다니다가 스승이 이렇게 갑자기 적에게 비참하게 죽고나니 허탈했을지도 모른다. 장래에 대한 염려, 앞으로의 처신 이런 것 때문에 산에 올라가 고민하다가 내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도마는 거기에 없었다. 이것이 비극이다.
그러므로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주신 평강을 얻을 수 없었고 “성령님을 받아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저녁이다. 후에 이 날 이 시간은 그리스도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시간이 되었다. 주일 저녁 주님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거기서 주님의 은혜, 평강, 성령님 충만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도마 같은 사람이 있다. 낮에는 함께 있었는데 저녁에는 함께 있지 아니한 사람 말이다. 그는 주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주님의 일꾼이 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주님의 일꾼으로 세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모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특별히 은혜의 시간인 주일 저녁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둘째, 도마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말이 믿어지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두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즉 믿어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을 것과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고 도마도 몇 번 들었다.
그런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베드로도 직접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다. 그러나 도마는 무덤에 달려가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제 3년 동안 함께 지내던 10명의 동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 환상을 보았거나 꿈을 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기의 머리를 더 믿는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상식으로 판단하여 이해되는 것만 믿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수많은 이적들을 보고 체험했다.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시고,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도망가며, 소경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온갖 이적을 다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 부활의 이적은 믿지 못했을까 결국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기 머리를 더 믿은 것이다. 똑똑한 것 같지만 대단히 피곤한 사람이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은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다. 다른 사람이 이해되는 것이 나는 이해 안될 때도 있고 내가 이해되는 일이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인간의 이해에 기초한다면 대단히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자기의 손을 더 믿는 경험주의자였다. 그는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으시는 주님을 경험했다. 오병이어 사건도, 나사로의 부활이나 온갖 병자의 치유도 다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예수님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니 이것은 경험치 못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을 고치고 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는데 누가 살린단 말인가
그러므로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던 것이다. 피곤한 사람이다.
인간의 경험은 대단히 제한적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말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발바닥에 홈이 패인 것을 보고 믿을 수는 없으니까. 미국이 있는 지도 가보기 전에는 믿지 못할 것이다. 사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것 보다 남이 경험한 것을 듣고 배운 지식을 통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까닭에 내 경험도 중요하지만 타인의 경험도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도마는 타인의 경험은 믿을 수 없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10명이 함께 경험한 사실을 자신이 경험치 못했다 하여 못 믿겠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집이다. 결국 그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도마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내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내 손으로 직접 만져 확인을 해야 믿겠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도 믿어지지 않았다. 동료 제자들의 말도 믿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대단히 철저한 사람인 것 같지만 자기 자신밖에 믿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하셨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한 후 믿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주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그 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사도들의 전해 준 말씀과 기록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눈으로 본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믿음이라”(벧전 1:8-9)고 하였다.
셋째, 도마는 뒤늦게 신앙을 고백했다. 불신앙의 원인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8일 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셔서 도마를 만나 주셨을 때 자신의 불신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았다. ‘손을 내밀어 만져 보라’고 하셨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확인하지 않아도 만남으로 충분했다. 그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고 고백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자기가 8일 전에 제자들과 나눈 대화도 다 알고 계셨다. 누가 예수님께 일러바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때 주님께서는 그 말을 다 듣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도 당장 나타나지 않으시고 지금 찾아오신 것이다. 신앙은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믿음이나 신뢰도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님과 나와의 신앙도 만남이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다. 5년, 10년 교회를 다녀도, 집사가 되고 주일 학교 교사로 열심히 일해도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도 온전한 신앙 고백을 할 수 없다. 여기도마의 신앙 성장 과정을 보자. 모임에 잘 참석치 않던 사람이 참석을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안 믿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정신나간 사람처럼 들리다가 어느 날 주를 만난 후 온전한 신앙 고백을 한다. 참 하나님의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처음에는 주일 낮 예배만 겨우 참석할 뿐 밤 예배나 수요 예배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어쩌다 저녁 예배나 새벽 기도회에 나와도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를 만났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주님을 만나야 한다. 기도하라.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온 밤을 새워 기도하라. 그 때 살아계신 주님은 만나 주실 것이다. 도마의 신앙은 부활했다. 주님을 만난 그 순간 그에게도 기쁨이 넘쳐 흘렀다. 요 21:2을 보자. 갈릴리에 내려간 7명의 제자들 중 그의 이름이 베드로 다음에 기록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인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한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도마와 같은 여러분을 찾아오신다. 그리고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신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신다. 그리고 한 평생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도록 사명을 맡기신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에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그리고 남은 생애 주님의 사명을 따라 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할랠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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