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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고전4:9)

본문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예수로 인한 미련한자 되었으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너희는 예수로 인하여 오히려 지혜로운 자되었고, 우리는 약하되-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고전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자리에 같이 누워 있는 두 사람이라도 그 꿈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고, 사역 초기부터 부활 승천하시기 까지 제자들에게 3년이 넘도록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과 그들의 관심과 그들의 예수님 따라 다닌 목적은 예수님 승천하시는 그 시간까지도 여전히 세상 나라였습니다. 우리들도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지혜로와졌으며, 예수님으로 인해 강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존귀한 자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우리에게 천국의 구원을 주시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또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천국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라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두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이후의 우리의 삶의 모습은 바뀌어졌습니까 예수님을 믿은 지 몇 년이 되었습니까 과연 도의 초보를 버리고 이제는 성숙한 믿음으로 야물고 영양있는 음식도 먹고 소화를 시킵니까 아직도 처음 믿을 때와 같이 그대로입니까 우리들이 꼭 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 같아도 깨달음에 따라서 그의 목적도 방향도 추구도 전혀 다릅니다. 성경을 읽어도 자기 중심적으로 읽어서 자기 뜻을 세우는 데 하나님 말씀조차 자기를 위해 이용하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은 무조건 복종해야하는 자인 줄 인줄 알고서 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사람보기는 비슷한 것 같아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 본문도 우리 신앙생활의 이 두가지 모습을 대조적으로 가르칩니다. 여기 바울이 알고 있는 신자 상과 고린도 교회가 알고 있던 신자 상이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어떤 것이 맞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소망, 목표가 다르면 그 이후의 모든 신앙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자상은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하여, 잘되고,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신자상은 세상에서 구경거리같이 여김도 받고, 미말에 처한 자와 같이 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가 되는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왜 당신은 사도가 되어서도 그런 대접을 못받는가, 왜 그는 그렇게 약한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권리를 다 누리면서 사도직을 하는데 바울사도는 왜 그렇지 못한가 그의 섬김을 가지고 고린도교회는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의 많은 장은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론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고린도교회에 대한 책망과 지적은 고린도 교회 너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세상적으로 강하고, 세상적으로 존귀함,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신자로서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두 깨달음의 차이는 지금도 다툼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세상을 어떻게 대하며, 세상에서의 삶은 어떠한가 이 깨달음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깨달음의 차이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르게 만듭니다.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먼저 알 것은 신자가 받는 보상은 이 세상에서 다 받지도. 누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히 받는 것입니다. 또 영원히 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받고, 누리는 것인데, 너희 고린도교회는 8절 말씀같이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배 부르고, 이미 부요하여 이미 왕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당하는 실제적인 모습들,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신앙적인 원리들을 우리가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종말론적인 시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종말론이라고 하면 이 세상 마지막에 어떻게 세상이 되고, 내세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신자의 상을 이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자는 것은 지금 이 세상은 의미 없는 것이고, 허무한 것이니 이 세상은 포기되고, 이 세상 너머 영원 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도 틀렸습니다. 또 이 세상에서 신자들의 삶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복 주셔서 형통하고, 잘되는 일만 있다. 잘 못되는 것은 기도 안해서 그렇고,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염세주의와 기복주의는 전혀 다른 의미인데, 기독교는 이 둘이 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지나가는 곳이요, 영원이라는 관점에서는 찰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보상으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고 누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설령 받는다고 해도 영원과 비교할 때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우리를 두십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영원하고, 신령한 것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이 짧은 세상시간을 허송으로 지내 보낼 수 없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러니 종말론적인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세상을 무의미하게 만들거나 회의주의, 염세주의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갈 곳이 없는 세상 나그네와 갈 집이 분명히 정해져있는 본향 찾는 나그네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의미있게 가치있게 살도록 하는 것이 성경적인 종말론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이 목적지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종착역이 아닙니다. 영주처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분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목적으로 소망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분깃으로 받은, 인생 저희 뿐인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이 그들에게 분깃으로 주신 것이요, 영원한 사망이 그들의 미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깃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이 지나가는 과정이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이 세상은 학교요, 훈련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우리가 자라지고, 여기서 우리가 변화되어져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써 먹는 것은 영원한 나라에서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원을 누리고 영원히 삽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이 세상 속에 있는 신자들이 많은 오해로 헛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학교는 어떤 곳입니까 학교는 배우는 곳입니다. 학교는 자라는 곳이요, 훈련장입니다. 이를 오해하고 착각한 아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학교에서 놀려고하고, 학교생활만을 누리려고하고, 학교에 정을 붙이고, 학교를 떠날 것을 생각지 않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또 벌써 다 자라 버려서 배울 것이 없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나라를 주시기 위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셔서 이루신 대속이라는 것이 이 세상을 주시기 위함이겠습니까 주님께서 죽으시기까지 하신 것은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은 아무 것도 그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참다운 완성을 기다리는 자에게 이 세상은 목표가 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이미 이 세상에서 배 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이미 왕노릇하고 있는 것을 잘못된 신자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바로 이 시간까지 (11절)어려움을 당하고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더 나아진 것이 없고, 이 시간 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인 바울에게 이러했으면 우리는 어떠해야합니까 우리가 일부러 이런 고난과 고행을 자처할 이유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고행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삶에 이런 고난이 없으리라고 생가하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난과 고행의 현실이 완다고 할 때에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아야합니다. 또 이런 고난을 지금은 혹 자기는 안 당해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난 가운데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서 지금 평안을 하나님께서 한 때 주시니 누리는 것이고, 우리에게 밥을 주시니 감사히 밥을 먹는 것이지만, 언제 이런 고난이 우리에게 닥쳐올지라도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 유력한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면 이런 고난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너희가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이런 고난으로 여러분들의 가족을 잃거나 하는 손해나 희생을 요구한다고 생각지는 말라고 하는 해석을 합니다. 아주 인본의 해석입니다.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고난을 당한다고합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그 보상을 다 받으리라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말씀이 옳지 않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손해를 보고, 희생을 당한 것을 복있다고 하시는데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떻게 이 세상 것으로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다 보상하시겠습니까 그것을 세상 것으로 보상하실 것 같으면 이 세상 것을 드려라고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가 복음을 위해서 죽었으면 가장 복있다고 하는데 이 보상이 죽은 자에게 땅에서 있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소망이 땅의 것이면 예수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자꾸 이런 설교를 하니까 우리 교인들이 어떤 분들은 이제 삶의 목적을 바로 잡아서 죽기를 각오하고 믿으려고 열심하는 분들이 생기고, 어떤 분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왜 이 세상에 대해서 받는 복도 성경에 말씀하는데 이런 것은 말씀않고, 자꾸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만 말하는가 의문합니다. 그렇습니까 성경에서 세상것에 대해서는 구하라고 하지 않았으나, 천국에 대해서는 소망하고, 구하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세상 것은 네가 하나님 말씀을 지켜 살면 이 모든 것을 주신다고 했지 신구약 어떤 곳에서도 이 세상의 물질이나, 이 세상의 어떤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서 들으신 적은 없습니다. 세상 것을 주신 것도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주신 것이요, 세상 것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더 세상 것을 구하지 않고, 이제 영원한 약속이 있는 것을 알아서 하나님께 영원한 것을 구하는 믿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노예생활과 같고, 구경거리요, 미말이라는 것, 세상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사도인 바울과 많은 사도들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사도만 구원을 얻었습니까 사도만 주님께서 사랑하셨습니까 사도가 이렇다면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사도 뿐입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 사셨습니까 제자가 선생같으면 족하도다 했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 까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낮아져야합니까 예수 믿는 일로 인하여, 이 복음 전하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때문에 어디까지 낮아지고,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정상적입니까 예수 믿어서 세상에 형통하려하고 세상에서 지혜로와 지려하고, 세상에서 강해지고, 세상에서 대우와 인정을 받으려하고 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입니다. 사도가 걸어갔던 길을 우리가 가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셨던 길을 우리도 가야 정상적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함께 바울도 고난을 받고, 이 십자가 지는 길을 걷는데, 이 고린도교회는 자기를 자랑하고, 지혜롭고,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고, 스스로 왕노릇하고, 스스로 스승이 되는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난 받고, 스스로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하고, 주님을 나타내고,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자신의 약한 것을 말하고, 이것을 오히려 자랑했던 바울을 업신 여기고, 네가 사도냐 하는 말까지 고린도교회가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에서의 고난과 어려운 형편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고, 훈련장이요,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히 거할 곳은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의 보상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맙시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켜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때때로 보여주시는 것이 있지만, 참으로 믿음의 가치가 이 세상 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믿음지켜 사는 자에게 어떤 도움을 주시고 혜택을 주시는 지를 보지 못해도, 오히려 믿음 지키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고, 업신여김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도 우리는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어야합니다. 이 믿음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어떤 것이 정상적인 신자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신자상입니까 고린도교회가 말하는 신자상입닊까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혹시 고린도교회가 말하는 신자상을 그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려움이 오면 다 도망하게 됩니다. 이는 바른 신자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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