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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만난 제자 (마14:22-27)

본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경험하고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들까지도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헀습니다. 오실 메시야가 바로 이분이다. 이분이면 우리가 먹고 살일은 걱정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아시고,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도록 명령하시고는 당신께서는 무리들을 피하여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명령을 따라 떠난 제자들을 태운 배가 갈릴리 바다 건너 편으로 순풍에 돛 단 배로 어려움 없이 잘 갑니다. 이 제자들 가운데는 어부 출신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들은 지금 건너가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던 사람들이니 이 바다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데 평온하여 호수같던 이 바다에 갑자기 때 아닌 바람이 붑니다. 또 그 바람을 인하여 파도가 집채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이 갈릴리 바다는 항상 이렇게 변덕이 많습니다. 실은 이 바다라부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는 아닙니다. 바다물은 짜지만 이물은 짜지 않습니다. 우리 식대로하면 바다가 아닙니다. 호수입니다. 그래서 또 다른이름에 게네사렛호수입니다.
그런데 이 호수가 잔잔하다가 갑자기 변덕스런 바람이 불어오고, 파도가 일어나면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라고 한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급하게 일어나니 어부출신이었던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 지혜, 있는 힘을 다해서 배를 움직여 봅니다. 그러나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노를 젖습니다. 돛을 내립니다. 키를 움직여 봅니다. 그러나워낙 거센 바람과 풍랑에 배가 뒤집히려고 합니다. 얼마나 그 바람이 세고, 파도가 험한지, 어부출신들인 제자들 조차 이제 우리들, 다 죽었다, 이제 어떻게 할 수없다고 생각하고 절망 중에 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람과 파도와 싸웠는지 저녁에 이들이 출발했는데, 밤 사경이라고 했으니, 새벽 세시 쯤됩니다. 몇시간을 이렇게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기도하시던 주님께서 이를 보시고, 밤 사경에 제자들 있는 곳으로 걸어서 오십니다.
그런데 풍랑과 싸우고 있던 제자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이 고마우신 주님을 이들은 유령이라, 물귀신이라고 부르면서 더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이 때에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마라 하셨습니다. 이 기적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능력이 무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살피시는 분인 것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믿도록하신 것입니다. 먼저 알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갈릴리 바다와 같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저편으로 건너가라고 하셨는데, 이는 마치 우리들을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을 저 건너편 영원한 천국에 이르기 까지 이 세상을 건너가라고 명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건너가라고 하신 바다는 갈릴리 바다입니다.
주님께서 건너가라고 하신 명령 따라서 건너가는 우리들 앞에 놓인 세상은 형통의 잔잔한 호수같아 보이지만 아닙니다. 변덕많은 갈릴리 바다임을 명심해야합니다. 언제 어떤 바람이 불지 모릅니다. 언제 어떤 파도가 일어나서 내가 항해하고 있는 내 삶을 위협할 지 모르는 갈릴리 바다를 우리가 지나는 것입니다. 고요한 바다만으로 우리를 통과하게 하지 않습니다. 풍랑이 일어나는 우리의 현실이 필요할 때에 주님께서는 바람도 불게하십니다. 우리의 항해하는 배가 뒤집혀지는 파도도 만나게 하십니다. 왜 고요한 호수같던 우리 가정에 어려움이 갑자기 닥쳐 옵니까 왜 건강하던 내 육신에 질병이 있게 됩니까 순탄하던 내 앞길에 앞으로도 아무 어려움이 없다고 자신했는데, 이제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왜 고난이 닥쳐서 내 사랑하는 가족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납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왜 입시에 실패합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갈리리 바다를 건너가게 하신 목적을 알아야합니다. 주님께서 풍랑만날 것을 모르셔서 이런 명령을 했습니까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그러나 다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래서 연단받고,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도록하시는 것이요, 우리들에게도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깨닫도록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닥쳐오는 현실도 순풍도 있으나, 돌풍의 현실도 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가 갑자기 갈릴리 바다로 변합니다. 우리가 우리 여생이 고요한 바다로 이 세상을 지나기를 원하지만 실은 풍랑일 때에 우리들이 목표하는 항구에는 그 풍랑 인연해서 더 빨리 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때에 차라리 주님을 찾는 일이 쉽고, 주님께서 잘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이 바다에서 두려워 떨었습니까 그들이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들은 주님의 임재하심와 동행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입니다. 전에 그들은 이런 사건을 한 번 경험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있습니다. 그 때에도 이 갈릴리 바다를 지나는데, 감자기 바람과 풍랑으로 배가 뒤집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 배에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 까지 자신들의 이전의 경험, 재주, 힘으로 하려다가 안되니 이제 주님을 깨웁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자기들 있는 힘대로하다가 안되니 지금 이들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 될터인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 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는 우리들은 다 죽었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임재와 주님의 전지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곳에서 주님을 불렀으면 주님께서 듣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바람과 파도를 명하여 잔잔케하신 주님이 지금도 함께 계심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칭찬 받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간구했는데, 주님께서 네 집으로 가 보자 하십니다. 그 때에 백부장은 주님께서 이 곳에서 명하시면 되겠습니다.
나도 나 위에 내가 섬기는 주인에게 복종하고, 내 밑에도 종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이것을 하라하면 합니다. 주님께서 꼭 우리 집에 까지 안 가셔도 여기서도 기도하시면 전지하신 주님, 전능하신 주님께서 명하시면 어떤 것이 거역하겠습니까 우리들에게도 이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병이 든 가정을 방문해서 기도하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가 백부장의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만 계십니까 주님은 어느 곳이나 계십니다. 풍랑만나 고통하는 그 현장을 이 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께서 다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은 우리 만난 어떤 현실에서도 계신 전지의 주님, 무소부재의 주님임을 믿읍시다.
둘째, 그들은 주님의 명령을 잊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주님의 명령과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는 이 일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의 순종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명령이 없습니다. 주님의 명령이 있다면 순종하면 이적은 일어납니다. 이를 알게하신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이 제자들은 현장에서 주님의 능력을 친히 목격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잊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잊었습니까 오병이어에서 나타난 그 능력에는 놀랐지만, 이 능력이 어떻게 일어났던가 하는 것은 잊었습니다. 그들이 잊지 않았다면 갈릴리바다에서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을 잊었습니까 주님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은 또한 약속입니다. 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까 무엇입니까 ‘갈릴리 저편으로 건너가라 거기서 만나자’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갈릴리 건너편에서 나와 만나자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는 틀림없이 갈릴리바다를 건너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을 따라 순종했던 제자들에게 닥쳐온 것은 바람과 풍랑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더라도 주님의 명령은 약속인데, 이 약속을 이들은 붙들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도 이 깨달음을 가지고 현실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 약속하셨으니, 우리는 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셨을 것이다. 홍해 바다 앞에선 이스라엘과 모세는 그 깨달음이 달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예배할 것이라고 했다. 가나안을 주실 것을 말씀했다.
그런데 지금 닥친 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다.
그렇다면…여기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솜씨, 기적을 볼 것이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통해 ,.
그런데 바치라고하신다.
그렇다면 기적이 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깨달은 부활의 기적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잡고, 약속을 믿고 나갔다면, 약 속의 말슴대로 순종할 수 없다는 이 모순된 현실에서 명령의 순종은 기적을 보리라는 받은 증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쨓든 결국 그들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우리들이 건너가는 이 갈릴리 바다 같은 세상, 이세상을 지나면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없습니까 모든 성경에 약속하신 말씀이 다 우리들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을 명하십니까 무슨 약속을 하셨습니까 우리와 세상 끌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눈종자 같이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우리 앞길을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저 천국에 이르도록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믿습니까 우리들을 저 천국에 이르도록 동행,보호,인도의 약속이 있습니다. 또 영원한 구원과 영광된 상급을 약속했습니다. 비록 만난 현실이 어둡고, 힘들어도 우리들은 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잡아야합니다.
셋째, 그들은 일어나는 바람과 풍랑은 보고, 주님은 바라보지 못했기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배웠지만, 그 현실에서는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피동되었지, 하나님의 섭리나,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만나는 현실에서도 이러합니다. 앞에 말한 모세는 홍해보다, 하나님 바라보았습니다. 현실보다 먼저 하나님을 봐야합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이라는 종착이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시점입니다.
넷째로,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과 경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만난 바람과 풍랑에 이전의 가졌던 경험, 지식을 사용했습니다. 이런 바람에는 어떻게 배를 돌리고, 이런 파도가 배에 들어오면 어떻게 된다는 경험, 지식, 통계를 더 신뢰하고, 이를 사용해서 이 바다를 지나려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처음부터 바다위를 걸어서 건너가라고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런 명령을 하지 않고, 배를 태워보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재능, 지식, 세상의 경험, 체험을 무시하는 신앙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부출신의 제자들이 오랜만에 배를 보고, 갈릴리 바다를 보니 주님도 잊고, 말씀도 잊고, 이전에 생활의 옛 습관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지식을 배격하는 것 아닙니다. 세상의 통계, 인간의 경험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것들이 진정 갈릴리 바다를 지나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들이 가질 도구이며, 이용물이지, 이것만 있으면 다 됩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현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은 불신자들과 다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노도 젖고, 배의 키도 조정하고 했다면 풍랑도 넉넉히 이겼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이래서 찾아오신 주님을 유령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보는 것을 따라 행하다가보니 이제는 주님까지도 물귀신으로 여깁니다. 이들이 이제 주님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풍랑만난 제자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이 주님을 먼저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무서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모든 것이 다 두렵습니다. 헛게 보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겅 보고 놀란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언제 오십니까 밤 사경되어서야 오십니다.
인간의 주관, 지식, 경험으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할 때까지 제일 어려운 시간에, 영적으로 어두운시간에 찾아오십니다. 실은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 때에 우리 마음 문을 여는 것입니다. 위경에 처한 사랑하는 제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물 위로 걸어오신 주님, 어려움을 만났을 때에 이 주님의 모습을 한 번 그려봅시다. 어떤 능력입니까 그 바람도 잠재우시고, 파도도 잔잔케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그 바다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이 주님은 이 세상을 발로 밟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 능력을 믿읍시다. 어떤 난제를 만나도 바다위를 걸어오신 주님의 그 능력을 믿는다면 이 모든 바람도 파도도 잠재울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예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을 제자들이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구원의 주님을 자신들을 물에 빠뜨리는 물귀신으로 보았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님은 어떻게 찾아오십니까 우리의 캄캄한 어두움의 밤에, 어려운 역경에 찾아오시는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구원할 말씀입니다. 우선 보기는 이 말씀대로하면 망한 내 현실에 더 망하게하는 말씀이다 그렇게 보여지지만, 아닙니다. 오늘날 주시는 말슴이 복덩이요, 실패를 당한 내게 있어 구원과 회복의 말씀입니다. 찾아오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주십니까 안심하라했습니다. 또 내니 두려워말라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놀라운 일을 당해도, 어떤 급하고, 황당한 일을 만나도 먼저 안심해야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아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내 현실에 개입하시면, 내 현실에서 주님을 신뢰하는 길이 열렸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아 보시면 우리 모든 문제를 잘 해결해주실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내니 두려워말라 말씀하십니다. 내니.하는 말씀은 밤에 혼자 놀다가 엄마가 없는 것을 알고 엄마를 찾아서 우는 아이에게 어디 갔다 들어오는 엄마가 울지마, 내야, 내야 하는 것입니다. 내니. 하는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이다. 나는 있는 자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자다. 내가 어디 갔느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내가 있으니, 안심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에 누가 오십니까 밤사경에 오신 주님. 바다를 걸어오신 주님 내다 안심하라, 두려워말라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갈릴리 바다임을 인식합시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만나자는 주님의 약속, 명령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 따라서 가는데에 바람도 있고, 파도도 일어나지만, 우리는 보이는 현실보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믿읍시다.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잡아야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 방법은 바람과 풍랑에서 승리하게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말씀을 신뢰합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항복할 때가 주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은 구원의 주님입니다. 어려움의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은 우리를 망하는 것 같게 보이지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주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합시다. 바람과 파도도 명하여 잠재우시는 주님이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이십니다. 문제를 내신 주님이 해답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합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주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물위를 걷는 베드로 970528 마14:22-33 (마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마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마14: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마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14: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마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마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오ㅒ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마14: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풍랑만난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나다.’ 하는 말씀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나이다. 나는 있는 자이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자다. 내가 어디 갔느냐 내가 너희를 떠난 적이 없고,너희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내가 있으니, 안심하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에 누가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나 밤사경에 오신 주님. 우리가 우리 힘을 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때가 되어야 주님이 오십니다. 그러나 실은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그 때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주님 계심을 믿읍시다. 먼저, 안심해야 합니다. 마음에 평강을 가져야 시험을 이깁니다. 어떤 악한 현실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바다를 걸어오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다를 이기신 분이십니다. 바다 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아니, 바다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인생 여정은 갈릴리 바다임을 인식합시다. 변덕이 많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만날 것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만나자는 주님의 약속, 명령이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 따라서 가는데에 바람도 있고, 파도도 일어나지만, 우리는 보이는 현실보고 두려워하지 맙시다. 주님의 임재와 능력을 믿읍시다. 능력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을 잡아야합니다. 주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이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 방법은 바람과 풍랑에서 승리하게 못합니다. 주님의 능력과 말씀을 신뢰합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항복할 때가 주님께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찾아오시는 주님은 구원의 주님입니다. 어려움의 현실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은 우리를 망하는 것 같게 보이지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만이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 주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합시다. 바람과 파도도 명하여 잠재우시는 주님이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 문제보다 더 크신 주님이십니다. 문제를 내신 주님이 해답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합니다.
이 모든 것을 만드신 주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을 가집시다. 믿음으로 보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외쳤을 때에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이 때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이 시몬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성격을 압니다. 성급하여, 실수도 많고, 미숙한 면은 많지만,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입니다. 또 예수님을 제일 따르고 사랑한 사람입니다. 반응이 항상 빠른 사람입니다. 이런 점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생각 없이 빨리 결정하고, 시도해서 곧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주님께 청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했습니다.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담대한 마음입니다. 이 믿음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조금 전까지 바람과 풍랑만 보고도 죽을 줄 알고 벌벌 떨었던 사람이 이제 바다 위로 걷겠다고 주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는 이전에 바람과 파도 보고 무서워하던 마음조차 다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환난 만났을 때에 그 환난을 이기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일어나는 바람과 파도를 보지 말아야합니다.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에 사로 잡히면 모든 것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이 갈릴리 바다의 바람과 파도는 누가 일으켰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먼저 주님을 찾아야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우리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모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다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은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과연 나도 그 때 제자들에게 물위로 걸어서 찾아오신 주님을 보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나도 이 베드로 같이 담대해 지겠다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 성령님의 감동의 역사로 들려주십니다. 이 음성을 들으려고 해야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요구에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현실에 얽매이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립니다. 물 위를 담대히 걷습니다. 이제 현실에 종되지 않고, 주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발로 밟는 믿음으로 걸어갑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이기시고, 죄와 사망과 세상의 유혹을 이기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 없이 순종하는 자에게는 그 현실에서 이기는 승리가 있음을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갈수 있습니까 이 기적도 똑 같습니다.
주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능력에 순종하였을 때에 베드로는 물 위로 걷는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으시니, 나도 걸을 수 있다는 신념, 생각이 아닙니다. 걸어오라는 말씀이 먼저 계셨습니다. 이 말씀을 의지해서 물 위로 걸었습니다. 말씀하신 주님의 능력과 이 말씀에 대한 신뢰가 순종할 힘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가 갑자기 바다에 빠집니다. 죽겠다고 고함을 지르면서 주님께 나를 구원하소서 했습니다. 왜 시몬은 바다 위를 잘 걷다가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 명령에 따라 주님만을 바라보았을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잠간 걷다가 일어나는 바람을 느꼈습니다. 지금 내가 어디를 걷고 있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주님 바라 보던 시선에서 자신의 현실과 그 처지를 보았을 때에 그는 바다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에 우리에게 초자연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나면 그 뜻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누구를 만나도 사랑스럽고, 이 자신이 받은 사랑을 전하여주고 싶습니다.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능력이면 되리라는 믿음도 생기고, 그 확신에서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 보게됩니다. 환난을 만나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오히려 천국 소망을 더 확고히 가지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병 낫는 것, 부자되는 것, 사업이 잘된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기적이 아니라, 이 말씀대로 살고 싶고, 살아지고, 사랑하며, 섬기고,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그 행위가, 그 사람이 바뀌어지는 것이 기적아닙니까 이런행동이 이런 마음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다 섭섭하고, 불만 스럽고, 불쾌합니다. 화가 납니다. 따지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자기는 커져보이고, 다른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나만이 제일 잘 믿는 것 같아 보이고, 그래서 다름 사람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물위로 걷는 것이 정상입니까 물에 빠진 것이 정상입니까 물에 빠진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은 물 위를 걸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용서하고 살았던 것은 내가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나만 제일로 알고, 나를 자랑하고 사는 것이 자신입니다. 아 자신이 얼마나 형편 없는 자인줄 잘 압니다. 우리는 현실에 지배받아 웃고 울고 할 그런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 까지도 사랑할수 있고, 사람을 용서하고, 형제를 껴 안아주고, 나를 비어주는 일을 하고, 나중에는 순교하는 데 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 볼 때에, 주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할 때에는 물위로 처벅처벅 잘 걸었던 것처럼 이 이적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한참 걷다가 제 정신이 났습니다. 신앙에서 이성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때에 본 것은 바람과 파도일 것입니다. 그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빠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떻게 험하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잘 걸어갑니다. 예수님께 대한 시선을 놓쳤을 때는 별 수 없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는 거기에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기도는 절박한 현실에서의 간구입니다. 이런 기도를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즉시 손을 내밀어서 붙잡도록 했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는 의심했습니다. 여기 의심은 원어에서 ‘디스타조’라고 하는데, 이 디스타조의 뜻은 양쪽에서 잡아당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주님께로 한 마음이 되어있어야합니다.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응답되지 않습니다. 갈라진 마음, 주님을 바라 보면서 바다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의 마음이 나뉘어졌습니다. 바람과 풍랑을 보았습니다. 바람 보고, 풍랑보면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 어디에 있습니까 높은 사닥다리에 올라갈 때에 얼마나 두렵습니까 이런 때에 아래를 내려다 보면 두려워서 더 못 올라 갑니다. 어지럽고, 아차하면 떨어집니다. 그 때에 위만을 바라보고, 계속 올라가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위로 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현실현실의 삶이 베드로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께로 바다 위로 걸어 간 것 같은 것입니다. 이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어려운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이적과 능력이 아니고는 이 걸음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걸음을 바로 걷겠습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명령만을 생각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라고 했습니다. 아주,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제자들 보다는 그래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이런 말도 못했고, 구경만을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상에 귀한 이 이적의 역사는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무한하심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사건에서 자신의 믿음 없음도 깨닫게 된 베드로입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믿음을 가졌기 땜에 믿음이 적다고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것을 나무랐습니다. 끝까지 믿는 믿음을 가집시다. 우리의 믿음이 능력을 보려면 꾸준히 계속해야합니다. 우리 주님의 오래참으심과 용서와 사랑을 이 본문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즉시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믿음이 없다고 하지 않고 그 작은 믿음이라도 가진 데 대해서는 알아주시고, 부드러운 책망으로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을 새깁시다. (마14: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에도 주님은 이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안심하라, 내다. 두려워말라. 오라 의심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주님이 우리의 환난의 때에 구원하십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믿음은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님만을 바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믿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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