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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15:21-28)

본문

오늘 읽은 21절 말씀에는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하셨습니다. 이 한절 말씀을 그냥 지나가면 안됩니다. 이 말씀에 담긴 뜻은 엄청난 뜻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던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이란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이방인에게로 옮기셨습니까 저주 받은 백성인 이방인에게도 과연 복음이 증거됩니까 예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신다면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이 말씀은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에게는 빛과 같이 귀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과연 어떤 자였습니까 우리가 이전에 이방인 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엡2: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엡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특별히 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부터 유대땅에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작 믿어야 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이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했던 것입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나, 이 빛을 세상이 알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래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는 택한 민족이 아닌 이방인 가운데로 이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을 수 있는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이 거부함으로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데리고 들어와서 잔치집을 채우라는 주인의 명령과 같이 저주 받은 백성이었던 이방에게 복음이 전해져서 만방에 까지 이 귀한 빛이 비취어졌던 것입니다. (마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11:21)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구약시대때 부터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은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부터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서 네 자손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출애굽기 19장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온 나라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제사장 같은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렸으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는 거절하고 만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선택된 백성에게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온 백성에게로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족속으로 제자를 상아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 까지 구원하셔서 이방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받게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 임한 구원이 오늘 어디까지 임해야합니까 오늘에 아직 영적으로 이방인된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육체 이스라엘 같이 선민의식에 빠져 이방인들을 볼 때에 짐승같은 자들이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이스라엘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 복음이 저 이방 나라, 일본에도, 이북에도 전해져야합니다. 아니, 아직 내 곁에 이방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들에게 복음이전해져야할 줄 믿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주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믿어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를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신 것으로 믿고, 어떤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입니다.
괜히 이스라엘이 가졌던 잘못된 선민우월감 같이 자신들은 무슨 특권이나,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구원받은 줄 알고, 저런 사람이 어떻게 예수 믿어 한다면 우리들 역시 이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입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늘나라 들어가게 하신 목적이 있을 뿐 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것 같이 우리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두로와 시돈에 발을 내디디신 것입니다. 예수님게서 두로와 시돈 땅에 이르렀을 때에 거기 한 여자가 나타납니다. (마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가나안 종교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깁니다. 이 여자는 바로 가나안의 저주 받은 함의 후손입니다. 막7:26에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핼라 종교를 믿는 잡다한 우상을 섬기던 여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잡신들을 섬깁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 자기가 믿는 여러 신들에게 하소연을 했을 것입니다. 온갖 재물도 바치고, 수단과 방법을 다 사용해서 사랑하는 딸을 고쳐보려고 의원도 찾아보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자기 고장으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었을 때에 그는 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합니까 제자들 주위에서 크게 부르짖었습니다. 때때로 통성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가 어두워서 못 들으실까해서 큰 소리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우리가 속으로 기도드려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속에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에는 가슴이 터지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앞에 나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간절한 마음과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 가나안 여인을 부르짖게 만들었고, 응답을 받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무엇이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그냥 어떤 선지자나 선생이나, 의원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으로 보았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듭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참된 믿음이 나타나고, 정작 믿음이 있어야한는 곳에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믿을 사람이 없다는 곳에 오히려 정확하고, 신실하게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게하시는 엘리사를 모신 사환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는 나아만대장에게서 뇌물을 요구하다가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대장 집에 잡혀간 계집 종 하나, 그는 그곳에서 믿음을 가져서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가도록 해서 하나님계심을 증거하는 역사를 했습니다.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나온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은 칭찬했습니다. 또 사도행전의 고넬료백부장의 믿음을 봐도 이방인 가운데 무슨 믿음이 있겠느냐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당연히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 아니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닌 제자들에게도 이 믿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그런지 모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이나 있겠느냐 하는 이북에는 신자들이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 많다고하는 이 남한에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있을 것인지. 모릅니다. 직분자들에게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어쩌면, 이제 믿는 자들 보다 못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가나안여인이 깨달은 메시야관은 바로 된 것입니다. 과연 예수그리스도는 주십니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메시야십니다.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구주십니다.
이 분이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딸의 귀신들인 것을 쫒을수 있음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깨달은 것이 성령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가르치고, 배워도, 예수관이 바로 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무식하고, 모든 학문이 구비되지 못한 사람이라도 단순한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준 즉시로 그대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이 여인이 바른 메시야관을 가지고 부르짖었다면-“그래 너의 믿음이 너의 간구하는 것을 이루었다” 하시면서 응답을 하셔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선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간청할 정도이니 얼마나 심하게 부르짖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전까지 부르짖는 자들의 원하는 소원을 물리친 적이 없으신데, 이번은 특별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 불공평하게 그러시나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고치시고, 이방인은 기다리게 하시는가 아닙니다. 여기에 주님의 크신 뜻이 있습니다. 이방이 아무리 구해도 침묵하시는 때가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이 없었고, 이스라엘에만 구원이 있었던 때가 예수님오시기 전까지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가를 보여주십니다. 침묵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거절까지 하십니다. (마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제는 나는 이스라엘 외에는. 그렇습니다.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달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해졌으나, 이제부터 이방에게 전파되리라는 말슴을 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에 순서가 있습니다. 밥을 먹어도 순서가 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것도 다 무시됩니다만,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잡수시기 전에는 아이들이 먼저 먹는 법이 없습니다. 오시지 않으면 기다립니다. 여기 이 복음도 그렇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이요, 그 다음에 헬라인, 다음에 이방으로 각 세계로 이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에 먼저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로 가라 했습니다. 왜 이스라엘에게 먼저 복음이 전해져서 이스라엘이 복음을 만방에 전하도록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바울은 나는 이방인에게로 간다했습니다. 제자들-예루살렘교회-안디옥교회-바울,바나바들로서 로마-세계로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가나안 여인에게 침묵하고,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경륜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했습니다. 더 간절히 매달리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만하면 예수님께서 들으실만한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하십니다. 이게 왠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 족속, 이방인을 일컬어 개들이라고 하고, 이스라엘은 자녀라고 하십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견딜 수 없는 창피입니다. 얼마나 자존심과 체면을 상하게하는 말입니까 여러분 이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맏어야합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인의 반응입니다. (마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주님 옳습니다. 옳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계속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개라고 여기심도 마땅합니다.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심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개들이라도 저의 주인의 상에서 아들들이 먹고난 찌끼라도 먹지 않습니까 나는 부스러기라도 구하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주님 앞에 바른 자세입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예수님게서는 놀라시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에서 다니면서 찾지 못한 믿음이 있다고 기뻐하셨습니다. 큰 믿음이 어떤 것입니까
1. 이 여인같이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갈 의가 없는 것을 알고서 겸손히 은혜를 구한 믿음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방인임을 압니까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짐승같은 자들이라 할 때에 아멘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무슨 말이냐 어떻게 사람을 개라고 할 수 있어 인격모독이야! 아, 교회 갔더니 나를 죽을 죄인이라고 해. 사형수라는 말이지, 내가 어째서 그런 욕을 들어야하나, 벌레보다 못한 사람이라니. 참으로 자신을 들여다 보고서 해 아래 인생은 다 죄인이요, 의인은 없다. 어떤 죄인가 여러분, 개와 같은 정도입니까 개는 죄 짓지 않았습니다. 벌레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습니다. 제 위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타락한 천사가 범죄하여 제 지위를 떠나서 비참해졌고, 이로 인해 자연까지도 지금은 저주 가운데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사람은 다 멸망할 자들입니다.
2.이 여인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자기의 딸을 구원할 수있다는 강한 믿음입니다. 침묵하시고, 또 거절당한 것 같고, 나중에는 남은 자존심마저도 다 깨뜨리는 말씀을 해도 끝까지 주님을 붙들면서 간청하는 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게 기도드리면 항상 응답 받는 것 같습니까 어떤 때는 침묵하십니다. 어떤 때는 거절하십니다. 어떤 때는 나라는 자아를 완전히 뭉개는 명령이나, 말씀을 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큰 믿음 아닙니까 분명히 몇 단계를 거치면서 예수님게 원망하고 돌아가며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주님의 반응에도 이 여인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이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어떤 분 아들이 병고치는 기도원에 갔었는데
우리가 이 말씀에서 먼저 감사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돈과 두로로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우리가 이세상에 무슨 신바람이 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이 개같고, 짐승같은 버린 백성들, 우상을 섬기고, 자기 욕심대로 죄 짓고 살다가 소망 없이 죽었던 이방의 땅에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셔서 이 복음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된 이 사실을 감사합시다. 우리는 종종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여인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저주 받은 이방인 여인이구나 생각을 합니다. 마치 우리는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이 바로 우리 버림받았던 이방인을 대표했고, 이 가나안 여인이 믿은 것이 우리가 믿은 것의 시초입니다.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침묵할지라도. 거절당할지라도, 나라는 자아를 다 깡그리 뭉개는 명령을 하실지라도 우리가 끝까지 바라면서 기다리고 기도해야할 것을 교훈 받습니다. 너의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니라. 이방인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믿음입니다.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축복은 자신의 딸을 고침 받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비결을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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