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사람이 된 베드로 (마16:21-23)
본문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당신이 수난을 당할 것을 예고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에 제2기 사역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도 예수님께서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공개적으로는 하시지 않았고, 암시적으로 하셨습니다. (마16:20)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지금까지의 사역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참된 메시야로 오신 당신의 삶과 인격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을 찾아서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또 병든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는 역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하신 이 사역들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 아닙니다. 사역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정한 본질은 이제부터 입니다. 이 본질적인 사역을 위해서 이전의 봉사하는 사역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사흘만에 부활하심이 아니면, 세상 여론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시각대로 예수님도 여전히 선지자 중 한 사람이거나 선생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고백이 진실한 것은 주님께서 이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들, 선지자들이 왔다가 갔지만, 그들이 훌륭한 교훈과 생애를 보여 주었지만, 그들이 우리 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들도 우리의 죄와 사망 문제를 언급은 했으나,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죽은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의 원죄와 스스로의 지은 죄 값도 영원히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십자가의 길로서 보여주십니다. 대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께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오신 것이 인생의 육신의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거나, 귀신을 쫓아내어주고, 배 고픈 자 몇 그릇의 밥을 먹여주기 위한 것 아닙니다. 이 세상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위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피흘려 구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 1기가 병 고쳐 주시고, 육신을 먹여주시는 봉사의 사역을 하신 것 같이 우리 처음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당한 어떤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안식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풍요한 삶을 목표해서 교회로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이제 제 2의 신앙 도약기를 만나서 주님의 십자가를 깨달아 자신에게 있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걸음을 출발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때로 부터”(21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이후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신앙 정도에 따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도 다릅니다. 처음 믿는 가정에 심방갔을 때와 성숙한 가정에서와는 설교가 다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는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참된 사명을 위탁하시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신앙 연수는 많고 직분을 받았으나, 아직도 젖이나 먹어야할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이 진리를 잘 배워서 빨리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세 가지 대속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셋째로,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주님이 고난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한 것을 담당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대행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한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우리가 법죄한 것을 사죄 주시기 위해 대형의 죽음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를 화목되게하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한 대생의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을 주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가 막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배워서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이구나” 하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제자들로서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십자가는 우리들도 잘 이해 못합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죽는 줄을 모르고 물에 뛰어드는 아이를 어른들이 막무가내로 붙드는 그런 심정으로 베드로가 주님께 꾸짖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라는 강한 만류의 의사입니다.
베드로는 깨닫지 못하여 결국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잘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보면 베드로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베드로같은 이런 인본적인 처사가 당연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사나이 다운 기질이요, 의리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일에 대적이요, 마귀에게 이용되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베드로를 책망하신 말씀에서 여러가지를 교훈 받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일부터 생각해야합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오면 어떻게 그 구속 사역을 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문자적으로 그 예언한 그 사실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되어서 이일을 하려고 하는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면으로만 보고, 말리고, 예수님을 꾸중하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판단해서 옳다, 그르다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우리들도 윤리와 도덕을 지켜 삽니다. 인간의 법도와 인간의 과학을 무시하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초월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들이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계산과 합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어떤 의지나 결심, 도덕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만류한 이것은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의리가 있는 말이요, 대단히 신념에 찬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인본주의 신앙은 베드로 같이 결국
1. 주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2.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3.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됩니다.
4. 결국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인본의 지식으로 신본주의로 사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갑갑하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신본에서 볼 때에 인본으로 사는 사람은 망할 길이지만,-그 인본의 사람은 오히려 신본주의로 사는 사람을 비웃고, 책망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가 옳고, 신본주의는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비 타협주의라고 욕하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대적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따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도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치 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인본주의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매사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책망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설득, 책망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간청한 것은 사단이 되어서 주님까지도 넘어지게하는 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하는 일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그 평가를 영원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사람의 일은 하나님과 원수되고, 대적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세상의 지식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 기쁘게, 사람 위주로, 윤리와 도덕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 때에 세상에서도 좋아합니다. 인본주의의 신앙생활은 고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과 대우 뿐입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넓은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세상에서 깨닫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멸시하고, 싫어합니다. 이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목회도, 가정 살림도, 직장생활도 교회 충성도 인본있고, 신본이 있습니다. 천호영 권찰님, 오늘 교회 나오겠다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어떻게 말해야합니까 우리학생들이 주일을 지킬 때에 인본주의 부모는 어떻게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인간을 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부터 위주해야합니다.
둘째로, 스스로 섰다고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베드로를 볼 때에 어떻게 그렇게 일순간에 변하여 사단이 되었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했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깨달음이 네게서 나온 것이 아니니 교만하지 말라, 이는 성령님의 감동의 은혜다” 미리 아시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베드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과 천국열쇠를 교회에 주신다는 말씀에 우쭐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이제 신앙의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교만이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일 느헤미야서에서도 살펴 본대로 칭찬 들을 때가 위기입니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때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때입니다. 베드로는 즉시로 넘어졌는데, 어디까지 떨어졌습니까 사단입니다. 교회가 사단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성자라도 오늘에 교만하면 마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덯게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칭찬을 듣는 교회라도 방심하면 사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베드로가 얼마나 우쭐했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인간적인 생각인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온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책망하는 일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 교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말씀 좀 깨달았다고 제가 하나님 같이 된 줄 아는 사람, 방언 좀 한다고, 신유한다고, 충성했다고 우쭐하는 사람,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텃세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다 베드로 같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단의 일 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도 안해보고, 무조건 자기 생각이면 옳습니다. 이래서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까지 방해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주님 떠나면 별 수 없는 자입니다. 베드로를 보면 주님의 돌보심과 긍휼이 아니면 버림을 받아야하는 그런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입니다. 단지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실 때에 하나님의 일도 하고, 하나님께 쓰임도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단의 역사는 단호하게 끊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태도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휴전은 결국 사단에게 삼키는 방법이 됩니다. 사탄아!하면서 주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을 볼 때에 우리들은 단호히 거부해야합니다.
이 마귀는 베드로가 주님을 인간적으로 위하는 것 같이 우리를 위하는 것으로 변장하고 달려듭니다. 이 때에 우리는 마귀를 분별해야합니다. 그리고는 이 마귀를 사단아!하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꾸짖어야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꾸짖을 때에 사단이라하면서 그 사람을 꾸짖으면 안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마귀를 쫓는 일부터 해야합니다. 신앙을 양보하도록 하고, 세상과 타협하도록 미혹하고, 죄를 짓도록 하는 미혹이 마귀의 하는 일입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넘어지게하고, 하나님 보다 사람의 일, 사람부터 생각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이에 끌려가면 별수 없이 사단이 됩니다. 하와가 뱀이 자신에게 미혹하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덴동산을 잘 다스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했다면, 또 뱀이 미혹할 때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했다면 이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별해야합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죄악 뿐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미혹하는 역사를 분별해야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집니다. 칭찬이 있을 때에, 높임이 있을 때에 조심해야합니다. 마귀는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를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신본주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하나님제일주의가 됩시다.
그런데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의 고백이 진실한 것은 주님께서 이 십자가 지심으로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들, 선지자들이 왔다가 갔지만, 그들이 훌륭한 교훈과 생애를 보여 주었지만, 그들이 우리 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들도 우리의 죄와 사망 문제를 언급은 했으나,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죽은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조상의 원죄와 스스로의 지은 죄 값도 영원히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진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와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십자가의 길로서 보여주십니다. 대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께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오신 것이 인생의 육신의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거나, 귀신을 쫓아내어주고, 배 고픈 자 몇 그릇의 밥을 먹여주기 위한 것 아닙니다. 이 세상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오신 이유는 우리 죄를 위함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피흘려 구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신앙의 목적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 1기가 병 고쳐 주시고, 육신을 먹여주시는 봉사의 사역을 하신 것 같이 우리 처음 신앙생활은 세상에서 당한 어떤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안식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의 풍요한 삶을 목표해서 교회로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라도 이제 제 2의 신앙 도약기를 만나서 주님의 십자가를 깨달아 자신에게 있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걸음을 출발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때로 부터”(21절)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은 이후부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는 것도 다 때가 있습니다. 신앙 정도에 따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도 다릅니다. 처음 믿는 가정에 심방갔을 때와 성숙한 가정에서와는 설교가 다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전에는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리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참된 사명을 위탁하시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신앙 연수는 많고 직분을 받았으나, 아직도 젖이나 먹어야할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이 진리를 잘 배워서 빨리 성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세 가지 대속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첫째,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셋째로,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주님이 고난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순종한 것을 담당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대행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한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우리가 법죄한 것을 사죄 주시기 위해 대형의 죽음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를 화목되게하셔서 영생을 주시기 위한 대생의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을 주님께서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가 막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배워서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다는 말씀이구나” 하고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제자들로서는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은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십자가는 우리들도 잘 이해 못합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죽는 줄을 모르고 물에 뛰어드는 아이를 어른들이 막무가내로 붙드는 그런 심정으로 베드로가 주님께 꾸짖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라는 강한 만류의 의사입니다.
베드로는 깨닫지 못하여 결국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잘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보면 베드로같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베드로같은 이런 인본적인 처사가 당연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사나이 다운 기질이요, 의리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일에 대적이요, 마귀에게 이용되는 불쌍한 자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베드로를 책망하신 말씀에서 여러가지를 교훈 받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매사에 하나님의 일부터 생각해야합니다. 이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야가 오면 어떻게 그 구속 사역을 할 것을 예언했지만, 그들이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제 문자적으로 그 예언한 그 사실들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되어서 이일을 하려고 하는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면으로만 보고, 말리고, 예수님을 꾸중하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판단해서 옳다, 그르다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우리들도 윤리와 도덕을 지켜 삽니다. 인간의 법도와 인간의 과학을 무시하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간적인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초월하지 않으면, 인간적인 것들이 좋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계산과 합리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어떤 의지나 결심, 도덕적인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만류한 이것은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의리가 있는 말이요, 대단히 신념에 찬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 인본주의 신앙은 베드로 같이 결국
1. 주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2.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3.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됩니다.
4. 결국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인본의 지식으로 신본주의로 사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갑갑하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신본에서 볼 때에 인본으로 사는 사람은 망할 길이지만,-그 인본의 사람은 오히려 신본주의로 사는 사람을 비웃고, 책망하고, 방해하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가 옳고, 신본주의는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비 타협주의라고 욕하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대적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따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도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치 보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인본주의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매사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베드로를 책망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설득, 책망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못하도록 간청한 것은 사단이 되어서 주님까지도 넘어지게하는 일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영적인 것입니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하는 일입니다. 위의 것을 찾고, 그 평가를 영원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사람의 일은 하나님과 원수되고, 대적되는 일입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세상의 지식대로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사람 기쁘게, 사람 위주로, 윤리와 도덕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 때에 세상에서도 좋아합니다. 인본주의의 신앙생활은 고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과 대우 뿐입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넓은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 위주,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세상에서 깨닫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멸시하고, 싫어합니다. 이 길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영생입니다.
목회도, 가정 살림도, 직장생활도 교회 충성도 인본있고, 신본이 있습니다. 천호영 권찰님, 오늘 교회 나오겠다고 합니다. 인본주의는 어떻게 말해야합니까 우리학생들이 주일을 지킬 때에 인본주의 부모는 어떻게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인간을 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부터 위주해야합니다.
둘째로, 스스로 섰다고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베드로를 볼 때에 어떻게 그렇게 일순간에 변하여 사단이 되었나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했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깨달음이 네게서 나온 것이 아니니 교만하지 말라, 이는 성령님의 감동의 은혜다” 미리 아시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베드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과 천국열쇠를 교회에 주신다는 말씀에 우쭐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이제 신앙의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는 교만이 들어갔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주일 느헤미야서에서도 살펴 본대로 칭찬 들을 때가 위기입니다.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때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때입니다. 베드로는 즉시로 넘어졌는데, 어디까지 떨어졌습니까 사단입니다. 교회가 사단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성자라도 오늘에 교만하면 마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덯게 믿음이 좋은 교회라는 칭찬을 듣는 교회라도 방심하면 사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베드로가 얼마나 우쭐했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인간적인 생각인 것은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온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예수님을 책망하는 일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적 교만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말씀 좀 깨달았다고 제가 하나님 같이 된 줄 아는 사람, 방언 좀 한다고, 신유한다고, 충성했다고 우쭐하는 사람, 교회 좀 오래 다녔다고 텃세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다 베드로 같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단의 일 까지 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도 안해보고, 무조건 자기 생각이면 옳습니다. 이래서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까지 방해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주님 떠나면 별 수 없는 자입니다. 베드로를 보면 주님의 돌보심과 긍휼이 아니면 버림을 받아야하는 그런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입니다. 단지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실 때에 하나님의 일도 하고, 하나님께 쓰임도 받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단의 역사는 단호하게 끊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이키시면서 사단아! 물러가라 하신 말씀은 베드로의 태도에 예수님께서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타협이나 휴전은 결국 사단에게 삼키는 방법이 됩니다. 사탄아!하면서 주님께서 사단을 책망하신 것처럼, 우리들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마귀의 세력을 볼 때에 우리들은 단호히 거부해야합니다.
이 마귀는 베드로가 주님을 인간적으로 위하는 것 같이 우리를 위하는 것으로 변장하고 달려듭니다. 이 때에 우리는 마귀를 분별해야합니다. 그리고는 이 마귀를 사단아!하면서 이름을 부르면서 꾸짖어야합니다. 이 말씀을 잘못 사용하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꾸짖을 때에 사단이라하면서 그 사람을 꾸짖으면 안됩니다. 자신 안에 있는 마귀를 쫓는 일부터 해야합니다. 신앙을 양보하도록 하고, 세상과 타협하도록 미혹하고, 죄를 짓도록 하는 미혹이 마귀의 하는 일입니다. 사단입니다. 사단의 하는 일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여 넘어지게하고, 하나님 보다 사람의 일, 사람부터 생각하도록 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이에 끌려가면 별수 없이 사단이 됩니다. 하와가 뱀이 자신에게 미혹하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덴동산을 잘 다스리라는 말씀대로 순종했다면, 또 뱀이 미혹할 때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했다면 이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별해야합니다. 자기 속에서 나오는 생각이라고 다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죄악 뿐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미혹하는 역사를 분별해야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스스로 섰다고 하는 자는 넘어집니다. 칭찬이 있을 때에, 높임이 있을 때에 조심해야합니다. 마귀는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마귀의 역사를 단호하게 거부해야합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신본주의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하나님제일주의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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