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천국에서 큰 자 (마18:1-4)

본문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닌 제자들입니다. 함께 지내면서 함께 먹고, 예수님께서 3년을 가르쳤으니, 얼마나 잘 배웠겠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그 선생의 뜻을 모릅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것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알게 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암만 가르쳐도 듣는 귀가 없는 제자들로서는 깨닫지 못하여서 주님의 뜻과는 배치된 생각, 말을 많이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고난을 말씀하고,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고, 또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걸음도 십자가의 걸음을 걸어야한다고 하셨습니다. 1절에 “그 때에” 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마17:22-23에서 (마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마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그러나 마가복음 9장32절에는 이 말을 제자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했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인데도 여기 제자들의 질문을 보면, (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얼마나 제자들이 영적으로 미숙한가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누가 크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느냐 하는 토론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는 (막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막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이렇게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서 말씀하는데도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10: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막10:37)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사실 제자들만의 관심이 아니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관심입니다. 세속의 관심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누가 월급을 얼마나 받느냐, 승진은 어떻게 되느냐, 누가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에 선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관심입니다. 또 그들의 열심입니다. 아주 인격적인 대화도 하고, 멋지고, 겸손한 말도 하지만, 실은 내면으로 들어가면 자기 자림 누제, 위치 문제아닙니까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예쁜가에 있습니다. 누구는 날씬하고, 누구는 뚱뚱하고, 누가 더 옷을 잘 입는가, 아니면 자녀들이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 어떻게 더 좋은 집에서 아름답게 치장을 해서 살것인가 이것이 최대의 관심입니다. 이것이 세속의 관심인데, 이것이 교회안에도, 성도의 삶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를 불행하게 한 이유입니다. 이 욕심 때문에 죄를 짓고, 이것 때문에 남을 시기하여 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라의 전쟁들도 실은 따지고 보면 이 문제 때문입니다. 이들이 영생이 있는 줄을 모르고 이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기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근심은 지금 어떻게 인생의 죄문제와 사망 문제를 지고서 십자가를 질 것인가에 있는데, 제자들은 전혀 다른 데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이제 곧 세상을 떠나려고하는 때인데 그 자식들이 모여 앉아서 아버지의 남기고가는 제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관심이 있어서 다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래도 이들을 가르치십니다. (마18: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세상에는 서열이 있고, 계급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세상에는 잘난 자가 못난 자 위에서 그들을 다스리고, 또 다스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런 서열이나, 계급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작은 자가 없습니다. 서열이 낮은 자가 없습니다. 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요, 축복의 자녀입니다. 아무리 가정 바깥에서 똑똑하고, 많이 배운 사람이라도 가정에서는 또 다른 위치가 있고, 그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같은 것인 것 같이, 천국은 사랑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잘나고 못난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다 사람의 눈에서 볼 때에 앞 뒤가 있으나 하나님의 보시기는 다 같은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또 이 천국은 오늘의 교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오늘 교회에도 서열이 없습니다. 계급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교회의 질서가 천국질서 대신에 세상의 질서같이 된 데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예배당에 장로석이 있습니다. 또 그 장로님들도 득표 순위로 앉는다고 합니다. 교회가 서열이 있다면, 계급이 있다면 그 교회는 이미 천국이 아닙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목사가 인위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강대상을 꾸미고, 가운을 철마다 입고 합니다만, 이는 세상 질서를 그대로 교회로 가져 온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타락입니다. 중세 교회가 이러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찰, 구역장, 교사는 직위가 아닙니다. 계급이 아닙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습니다. 이는 직분, 직책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질서와 복음운동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세웁니다만 실은 이 직분은 위치로 따진다면 제일 낮은 위치에 있는 자가 목사여야하고, 장로, 또 집사입니다. 이 생각이 떠나지 않을 때에 그 교회가 바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 제일 높은 사람은 평신도입니다. 평신도가 제일 무섭습니다. 교회 처음 나온 분들이 목사에게는 제일 높은 분으로 여겨집니다. 신앙의 연수를 더할수록 그 머리는 숙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묵사의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시고, 우리 평신도들의 기도는 안 들어 주십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똑 같이 들으십니다. 교회가 천국이 되려면, 계급의식이 사라져야합니다. 높임을 받으려하는 자들이 없어야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섬기는 자리에서 다 봉사하는 때에 그 교회는 천국이 됩니다. 어떤 교회는 장로님 서로 되려고 다투기도 하고, 왜 내가 자격이 안됩니까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우리 교회는 장로님 세울 후보들이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 분은 합당하지만, 나는 부족합니다. 하고 사양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충성하면 됩니다. 그 마음을 끝까지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 하나를 부르시고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또 천국이 이렇기 때문에 (마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결단코라는 말은 아주 강한 거부를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돌이키는 것은 회개를 말합니다. 어떤 데서 돌이킵니까 이전의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지식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데서 돌이켜 회개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세상에서 인정 받고, 칭찬 듣는 것으로 천국에서 상 받고,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압니다. 오히려 천국은 반대되는 개념인데,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높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슴은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는 것이다하신 말슴입니다. 여기의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기에 초점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슴입니다. 성경에 아이를 말할 때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로 나쁜 의미로서는 유치함, 미숙함을 말합니다. (엡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린 아이의 미숙한 신앙은 세상의 풍조에 따라 밀려 요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좋은의미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죄가 없고, 깨끗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은 우선 겸손합니다. 또 순종합니다. 자랍니다. 이런 성격을 우리들의 신앙면에 가져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치하지만, 자라고, 또 겸손하다는 뜻은 자기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줄 알고,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아이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습니다. 또 기다립니다. 천국은 이런 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자가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피로 구속을 입어 공으로 자격 없는 자가 들어가게 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제는 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갖출 대입니다. 천국은 서열이나, 계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화 구원, 상급 구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천국의 차이는 영광의 차이입니다. 섬기는 차이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누구에게 가장 영광을 돌립니까 희생이 제일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머니입니다. 지위가 높아서가 아닙니다. 서열이 높아서입니까 사랑 대문에 섬기는 위치를 가진 어머니가 제일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 나라의 차이는 이 영광의 차이입니다. 오늘에 교회 안에서는 누가 제일 높습니까 목사나 장로나 집사가 아니라, 누구라도 가장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어서 많이 섬기는 자일 것입니다. 우리가 들아가 살 천국도, 이 천국의 모형인 이 교회도, 또 사랑이 넘치는 가정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가져야합니다. 겸손은 일부러 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자신을 바로 아는 데서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자인 줄 알고 나면 다 겸손해 집니다. 그래도 자신이 잘 난 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장점이나, 다른 사람에게 자랑 할만한 것이 있다고 할 때에 교만합니다. 그러나 갖난 어린 아이 같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자라는 사실을 바로 알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기 위해 겸손히 머리를 숙이지 아니할 자가 없습니다. 또 사람에게도 교만히 행하지 않습니다. 비굴한 저 자세를 겸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정말 바로 보면 똥 같이 더러운 자신을 받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도 그것을 비난하거나 정죄하기 보다는 자신을 보면 용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여도 죽여도 깨어지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 자기입니다. 이 자아가 예수 믿을 때에 다 왕창 깨어졌다는 사람이 있는데, 그사람은 정말 또 하나의 교만을 말한 것입니다. 완전하게 깨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기 위해서 때때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대인관계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주님이 강조되고, 주님의 은혜가 생각나지 않고, 자기가 일어나면 이는 교만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의식되는 데에 교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합니다. 낮의 빛나는 태양을 본 사람은 촛불이 필요없어서 끌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될 대에 자신을 신뢰하고 자랑하던 그 교만함이 깨어질 것입니다. 천국은 어린 아이같이 겸손한자, 낮추는 자에게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천국이 되기를 원합니까 서로 겸손히 합시다. 자신을 낮추는 데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957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