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고전2:1-9)
본문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들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무엇을 믿고 구원을 얻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얻습니다.
그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신 구약성경 말씀의 중심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는 세상 어떤 인간의 모임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있다 없다. 부흥한다, 안한다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회가 서 고, 왜 교회가 서야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이 말은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 곧 진리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면, 교회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한갖 인간의 모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단이 되기도 하고,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처음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는 뜨거움으로 복음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어느 교회 못지 않게 있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몇 년 가지 않아서 그 열심도 식고, 그 교회 안에 세상의 속된 것들이 마구 들어오게 됩니다. 이 교회가 점점 인간 중심의 교회가 되면서 고린도 도시의 온갖 더러운 죄악들이 들어와서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피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죄인됨을 고백하던 때는 다 잊어버렸습니다.그러니 죽을 죄인이 은혜로 구원을 얻은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게 남이 없는 자랑할 것이 발견됩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고, 세상 것을 욕심내고, 세상 것이 없어서 헐떡이고, 세상의 것들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도 나오고… 여러분들의 생활에는 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가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이 핵심을 잃으면 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어떤 글이나, 말이 어떻게 유창하고, 훌륭하게 보이고, 들려도 우리는 그 책이나, 설교에서 복음의 핵심이 있는가, 없는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는데, 복음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가를 구별해야합니다. 인간의 귀에 좋은 소리로 들려도, 꼭 필요한 말로 들리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재미있고, 교양있는 말을 해도 그 말에 복음의 핵심이 없으면, 그것은 세상적이요, 미혹하는 것에 불과하지 구원의 복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말씀에서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세가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간 것은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장점을 나타내어 대우받으려고 갔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을 자신이 한 것 같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자신이나, 베드로나 아볼로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1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역했습니다. 하
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만을 자기의 사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까 당시에는 많은 교사들과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학문하는데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많은 학문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또 같은 말도 유창한 웅변을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 득실거렸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의 철학을 다 한 사람이요, 많은 학문과 지식을 가진 배운 사람입니다. 웅변도 배웠고, 말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되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의뢰하던 것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자랑하는 데는 유익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는 이 모든 것이 다 지장이 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 번은 아덴이란 곳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많은 시간 변론을 했습니다. 그의 유창한 말과 지혜를 다 동원해서 그들에게 철학적으로 이 복음을 이해, 설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은 심히 적었습니다. 자신의 말과 지혜를 다 써서 전했지만, 그 열매가 너무도 적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큰 것을 발견합니다. 이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찾아가고, 말을 하지만 이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오직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님이 나타나심을 기대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바울이 유창한 언변과 철학적인 지혜를 의지했다면 그 자신이 추앙을 받고, 자신이 전하려고 했던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배운 수사학을 사용해서 인간 말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 사람의 감정이나 건드리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웃기는 그래서 은혜받았다고 느끼게하고, 그를 추앙하게 만드는 유치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함께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실은 목회자에게 이 설교의 은사는 대단히 귀중하고, 설교는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유창한 설교,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큰 유혹입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법을 배우기도하고, 발성연습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에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감동받게 하는 정도입니까 그 정도라면 세상의 수사학에서도 가르치는 웅변의 능력입니다. 그런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의지하는 데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이런 유치한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성령님께서 나타나심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합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입니다. 은혜는 그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전하는 자를 잡고 쓰실 뿐이고,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개시키는 일을 설교자 자신이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역사하셔서 마음 문을 여시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와 순종에 이르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가 나오고, 헌신의 각오가 나오는 것입니다. 울고 불고, 눈물 콧물을 다 흘렸다고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을 기대하지 맙시다. 과연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격과 그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에 대한 선포가 있는가 없는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인가, 목사나 교역자 제 말인가, 성경 본문에서 가르치는 말씀인가 지어낸 말씀인가 구별해야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느냐, 제 말을 하면서 성경까지도 인용하여 이용하느냐, 구별해야합니다. 어떤 목소리의 고저청탁, 마이크를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 작은 소리, 그런 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 맙시다. 세상에 우리를 흥겹게하고, 기쁘게하고, 즐겁게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상에 말장이를 어떻게 다라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전해지든지 누가 전하든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때에 그 말씀을 믿고, 붙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자세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는 사도였으며,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사역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했습니다. 왜 사도가 벌벌 떨면서 목회를 했습니까 세상으로 잘난 사람에게 눌려 그렇습니까 어떤 주석에는 바울은 그의 육신이 병약하고, 또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의 경험과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을 인하여 떨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그도 세상적으로 보면 말과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세상 지식,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 전하는 것이 평가 받고 어리석은 복음이라는 조롱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없는 어떤 세상에 잘난 사람이 부럽거나 그 앞에서 떨리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과 그 앞에 고개가 숙여지지만,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을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고린도 교회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목회하는 중에 자신을 자랑하고, 어떤 말과 지혜가 나타나서,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까해서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벌벌 떨었습니다. 우리들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제자랑을 하고 싶어서 근질 근질한 것이 우리인데, 그래서 기회만 되면, 한 마디말을 할 기회만 되어도 그 때를 놓칠새라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비웃고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우리들인데, 이 바울은 오히려 그는 우리가 보기에는 자기가 자랑할 만하다는 장점이라 여기는 것을 숨기고, 또 이것이 주를 증거하는 데에 지장인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나타날까해서 떨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 자기의 실수, 자기의 허물을 나타냈습니다. 왜 주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지금 사도된 것은 주의 은혜임을 나타내고, 또 주께서는 약한 자를 도우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이 사도바울의 지혜나 목회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사람 보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감추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변화 회개, 구원시킵니까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이 바울의 사역자세를 배워야합니다. 우리들이 낮아질 때에 우리 뒤에 계시는 주님께서 나타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은혜 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수와 허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충성이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 모자람 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망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복음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에 전해 준 것은 어떤 인간의 이야기나, 자신의 자랑거리나, 인간의 지혜, 인간의 사색의 철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헀습니다. 또 그분의 구원의 역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전했습니다. 그가 발견하고 잡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세상의 단순한 스승이나, 한 모범자나, 한 완전한 사람에 불과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박히신 분이요,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이십니다.(1:30) 이 복음의 내용, 이 복음의 핵심에서 떠난 어떤 지혜도 다 속이는 것이요, 속는 것임을 깨달았던 바울은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신뢰하던 이전의 학문, 가문, 그의 선행 까지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주를 향하여 이 성화의 걸음을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비밀한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취었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알았더라면 예수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마귀 섬기고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자로 우리의 과거와 현제 미래의 이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고,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 이 예수에게 붙잡힌 바울은 이 예수를 다시 붙잡기 위해서 달려간다고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가졌다가 예수를 발견하고난 뒤에 버린다고한 그런 세상의 지혜, 세상의 실력을 갖추기 위한 것 아닙니까 배설물, 찌기를 얻기 위하여 투자하고 달리는 걸입니까 다 헛되다고 하는 때가 옵니다. 어서 어서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것으로, 우리의 자랑을 우리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립시다. 우리의 전할 것은,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 뿐입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신 구약성경 말씀의 중심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는 세상 어떤 인간의 모임 단체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있다 없다. 부흥한다, 안한다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교회가 서 고, 왜 교회가 서야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이 말은 교회는 사도들의 증거, 곧 진리의 터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리면, 교회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한갖 인간의 모임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이단이 되기도 하고,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도 처음에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는 뜨거움으로 복음을 받았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였습니다. 열심히 어느 교회 못지 않게 있던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몇 년 가지 않아서 그 열심도 식고, 그 교회 안에 세상의 속된 것들이 마구 들어오게 됩니다. 이 교회가 점점 인간 중심의 교회가 되면서 고린도 도시의 온갖 더러운 죄악들이 들어와서 교회인지 세상인지 구별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피묻은 십자가를 붙들고, 죄인됨을 고백하던 때는 다 잊어버렸습니다.그러니 죽을 죄인이 은혜로 구원을 얻은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게 남이 없는 자랑할 것이 발견됩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세상의 것들로 자랑하고, 세상 것을 욕심내고, 세상 것이 없어서 헐떡이고, 세상의 것들을 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도 나오고… 여러분들의 생활에는 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가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말씀을 들어도 이 핵심을 잃으면 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어떤 글이나, 말이 어떻게 유창하고, 훌륭하게 보이고, 들려도 우리는 그 책이나, 설교에서 복음의 핵심이 있는가, 없는가, 그 책에서 무엇을 말하는데, 복음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가를 구별해야합니다. 인간의 귀에 좋은 소리로 들려도, 꼭 필요한 말로 들리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재미있고, 교양있는 말을 해도 그 말에 복음의 핵심이 없으면, 그것은 세상적이요, 미혹하는 것에 불과하지 구원의 복음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본문의 말씀에서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복음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고 설명하면서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교인들에게 세가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간 것은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장점을 나타내어 대우받으려고 갔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을 자신이 한 것 같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바울자신이나, 베드로나 아볼로를 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2:1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역했습니다. 하
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만을 자기의 사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까 당시에는 많은 교사들과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시간을 학문하는데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많은 학문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또 같은 말도 유창한 웅변을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많은 사람이 득실거렸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전에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헬라의 철학을 다 한 사람이요, 많은 학문과 지식을 가진 배운 사람입니다. 웅변도 배웠고, 말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바 되어 이방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이전에 자신이 의뢰하던 것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자랑하는 데는 유익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하는 일에는 이 모든 것이 다 지장이 되는 것을 깨닫습니다.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 번은 아덴이란 곳에서 철학하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많은 시간 변론을 했습니다. 그의 유창한 말과 지혜를 다 동원해서 그들에게 철학적으로 이 복음을 이해, 설득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의 말을 듣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은 심히 적었습니다. 자신의 말과 지혜를 다 써서 전했지만, 그 열매가 너무도 적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큰 것을 발견합니다. 이 복음은 사람의 힘으로,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찾아가고, 말을 하지만 이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에는 오직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님이 나타나심을 기대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바울이 유창한 언변과 철학적인 지혜를 의지했다면 그 자신이 추앙을 받고, 자신이 전하려고 했던 그리스도는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배운 수사학을 사용해서 인간 말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 사람의 감정이나 건드리고, 사람의 심금을 울리고, 웃기는 그래서 은혜받았다고 느끼게하고, 그를 추앙하게 만드는 유치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함께 주의해야 할 내용입니다. 실은 목회자에게 이 설교의 은사는 대단히 귀중하고, 설교는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유창한 설교,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어서 존경을 받는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큰 유혹입니다. 이를 위해서 설교법을 배우기도하고, 발성연습도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설교에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주시고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을 감동받게 하는 정도입니까 그 정도라면 세상의 수사학에서도 가르치는 웅변의 능력입니다. 그런 말이나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의지하는 데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이런 유치한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성령님께서 나타나심과 그 능력을 의지해야합니다.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사건을 전하는 것이 복음선포의 핵심입니다. 은혜는 그 말씀을 깨닫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전하는 자를 잡고 쓰실 뿐이고, 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고, 회개시키는 일을 설교자 자신이 도모해서는 안됩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에게 역사하셔서 마음 문을 여시고, 그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와 순종에 이르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가 나오고, 헌신의 각오가 나오는 것입니다. 울고 불고, 눈물 콧물을 다 흘렸다고 은혜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을 기대하지 맙시다. 과연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격과 그의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에 대한 선포가 있는가 없는가 성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인가, 목사나 교역자 제 말인가, 성경 본문에서 가르치는 말씀인가 지어낸 말씀인가 구별해야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하느냐, 제 말을 하면서 성경까지도 인용하여 이용하느냐, 구별해야합니다. 어떤 목소리의 고저청탁, 마이크를 잘 사용하는 사람들이 큰 소리, 작은 소리, 그런 것을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 맙시다. 세상에 우리를 흥겹게하고, 기쁘게하고, 즐겁게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세상에 말장이를 어떻게 다라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혜를 받습니다. 어떻게 전해지든지 누가 전하든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일 때에 그 말씀을 믿고, 붙드는 것이 은혜입니다.
둘째로,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했던 자세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는 사도였으며,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사역했습니다.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했습니다. 왜 사도가 벌벌 떨면서 목회를 했습니까 세상으로 잘난 사람에게 눌려 그렇습니까 어떤 주석에는 바울은 그의 육신이 병약하고, 또 아덴에서의 전도 실패의 경험과 유대인들의 훼방과 대적을 인하여 떨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그도 세상적으로 보면 말과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세상 지식, 지혜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 전하는 것이 평가 받고 어리석은 복음이라는 조롱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없는 어떤 세상에 잘난 사람이 부럽거나 그 앞에서 떨리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존경과 그 앞에 고개가 숙여지지만, 세상 것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을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고린도 교회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떨었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목회하는 중에 자신을 자랑하고, 어떤 말과 지혜가 나타나서, 성령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까해서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벌벌 떨었습니다. 우리들과 좀 다르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제자랑을 하고 싶어서 근질 근질한 것이 우리인데, 그래서 기회만 되면, 한 마디말을 할 기회만 되어도 그 때를 놓칠새라 자기를 나타내고, 남을 비웃고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우리들인데, 이 바울은 오히려 그는 우리가 보기에는 자기가 자랑할 만하다는 장점이라 여기는 것을 숨기고, 또 이것이 주를 증거하는 데에 지장인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나타날까해서 떨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 자기의 실수, 자기의 허물을 나타냈습니다. 왜 주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지금 사도된 것은 주의 은혜임을 나타내고, 또 주께서는 약한 자를 도우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믿음이 사도바울의 지혜나 목회의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사람 보고 믿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도록 하기 위해 자신은 감추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변화 회개, 구원시킵니까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우리가 이 바울의 사역자세를 배워야합니다. 우리들이 낮아질 때에 우리 뒤에 계시는 주님께서 나타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은혜 만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수와 허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충성이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이 모자람 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망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복음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고린도교회에 전해 준 것은 어떤 인간의 이야기나, 자신의 자랑거리나, 인간의 지혜, 인간의 사색의 철학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헀습니다. 또 그분의 구원의 역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전했습니다. 그가 발견하고 잡은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세상의 단순한 스승이나, 한 모범자나, 한 완전한 사람에 불과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못박히신 분이요,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진실로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이십니다.(1:30) 이 복음의 내용, 이 복음의 핵심에서 떠난 어떤 지혜도 다 속이는 것이요, 속는 것임을 깨달았던 바울은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서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신뢰하던 이전의 학문, 가문, 그의 선행 까지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주를 향하여 이 성화의 걸음을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비밀한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감취었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알았더라면 예수를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마귀 섬기고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자로 우리의 과거와 현제 미래의 이 모든 인생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시고,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십니다. 이 예수에게 붙잡힌 바울은 이 예수를 다시 붙잡기 위해서 달려간다고했습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가졌다가 예수를 발견하고난 뒤에 버린다고한 그런 세상의 지혜, 세상의 실력을 갖추기 위한 것 아닙니까 배설물, 찌기를 얻기 위하여 투자하고 달리는 걸입니까 다 헛되다고 하는 때가 옵니다. 어서 어서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것으로, 우리의 자랑을 우리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립시다. 우리의 전할 것은, 우리가 알 것은, 우리가 자랑할 것은 이것 뿐입니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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