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언약을 통한 선택 (창25:19-26)
본문
사라가 아기를 못 낳는 불임 여성인데, 나중에 아기를 낳는 여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구원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풀어주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 역시 아기를 못 낳는 여성으로 출발한다는 말은 기존의 모든 인간의 속사정 모든 죄를 낱낱이 밝혀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사라와 마찬가지로 리브가도 아기를 못 낳는 여성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사라처럼 늙어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은 아닙니다. 여자는 여자인데 기존에 있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아기를 낳는 점에서는 여성입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사라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사라가 표상하고 있는 천만인의 어미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가장 사라됨을 보여줍니다. 그 점에서는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브가가 시집올 때 오라비 라반이 그녀를 향해 어떤 말을 했습니까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24:60)
그런데 결혼하여 20년이 다 지나가도록 천만인은커녕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주시는 자녀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손을 들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천만인의 자식이든 백만 인의 자식이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들을 사용해서 일하신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천만인의 자식은 하나님의 할 몫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기분나빠 합니다. 주님의 할 몫을 나의 몫으로 돌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는 보람이 자기가 손수 일을 해서 남에게 영광을 받을 때 사는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난 뒤에 신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신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임 여성인 리브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로 주어진 것은 두 아들인데 이들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다툼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는 약속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알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싸움은 장자에 대한 싸움입니다.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 누가 더 강하냐 누가 더 많으냐 하는 싸움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선입견을 불식시키십니다. 시간적인 순서에 의해서 장자의 신분이 확정되는 게 사회 공동체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인식을 불식시키십니다. 이 생각이 틀렸다기보다는 결코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장자는 성경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장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언약과 생명의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육신적인 혈통을 따라 이어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자 개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콤플렉스를 가지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은 대부분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아벨과 아벨의 예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란을 거부하시고 동생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복의 근원자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거부하시고 이삭을 들어 쓰셨습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을 중에 르우벤을 거부하시고 유다와 요셉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중에 므낫세를 포기하고 작은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막내 아들입니다. 다른 형제 다 버리고 오직 다윗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자는 혈통적 출생의 서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자가 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장자에게 예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되는 자는 누구며, 섬기는 이는 누구입니까 일반의 장자관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으로 공격하십니다.
1. 에서와 야곱의 싸움-장자권 싸움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우리에게는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1 태중에서의 싸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했는데 큰 자는 누구며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출생의 서열을 따지면 에서가 큰 자며 야곱이 작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큰 자 에서가 어린 자 야곱을 섬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후에 기회를 엿보아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서 그가 장자가 되고 에서가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큰 자 야곱이 작은 자 에서를 섬깁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큰 자는 누구며 어린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 답은 신약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는 예수님입니다. 그가 작고 어린 자인 우리를 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앞으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역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이왕 섬길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섬김을 받는 쪽을 큰 자로 만들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꾸로 보아야 합니다. 나중에 장자로 밝혀지는 자를 먼저 나오게 하지 않고 뒤에 나오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배경으로 깔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나중에 이것은 큰 자로서 어린 자를 섬기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통해 십자가로까지 그 의미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2 세상에서의 싸움-팥죽, 가로채는 장자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여기에서 왜 ‘형’의 주가 아니고 ‘형제들의 주’입니까 왜 ‘네 어미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고’ 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는 에서와 야곱 형제밖에 없습니다. 누가 누구의 형이 되고, 누가 누구를 섬기든지 ‘네가 형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이 네게 굴복하며’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록상의 오류일까요 이 축복은 야곱에게 준 축복이 아니라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게 준 축복입니다. 야곱에게 준 축복은 그의 아들 요셉에게 이어져 성취됩니다. 야곱 언약에게 주신 약속처럼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어미의 아들들이 그에게 굴복했습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장자입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성취되기까지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비확정적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에서와 야곱은 일생 싸움을 벌이며 살아갑니다. 에서와 야곱은 싸우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약속의 자손이 싸움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한 싸움과는 상관없이 세속적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싸우는 동작 그대로 세상을 본 이들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걸맞게 서열 결정에 혼란을 일으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이들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이들간의 싸움에 말려듭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어느 한쪽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들먹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철저히 세속적입니다. 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누가 상속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어린 야곱은 형의 입에서 재산권 포기에 대한 언급이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기다렸다기보다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드디어 형이 사냥을 나갔다가 허겁지겁 허기져 돌아왔을 때 팥죽으로 유혹하여 형으로부터 재산권 위임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말했어도 자신이 장자권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재산을 나눠줄 권리를 가진 아버지 이삭이 자신을 아끼고 또 누가 뭐래도 자신이 야곱보다 먼저 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정식으로 상속권을 넘겨줄 때가 왔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을 자기에게 잘해 주는 자에게 복을 빌어주는 형식을 통해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별미를 준비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을 가져오게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전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야곱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기를 들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대신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별미를 먹고는 야곱을 에서인 줄 착각하고 아브라함의 권리를 야곱에게 빌어 주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7-29) 이삭은 약속하기를 별미를 만들어 온 자가 장자가 된다고 했지 이미 장자가 결정된 후에 별미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에서라고 믿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약속은 이삭의 확신과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이삭이 먼저 고기를 가져온 야곱을 에서라고 여기든지 안 여기든지 상관없이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 한 에서는 어린 자가 되었고 장자의 축복권을 가진 야곱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의 예상과 달리 장자권이 주어지자 여기서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취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매이지 않음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입니다. 이삭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전달에 동원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바램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3. 인간의 판단과 결정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이삭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의 그의 건강 상태를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창27:1-2) 이삭은 눈이 어두워져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죽겠구나 느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이삭이 죽을 때 나이는 180세였습니다.(창35:28)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했다가 20년만에 되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그 때까지 생존해 계셨습니다. 건강했던 어머니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당시 그의 눈을 흐리게 하고 건강에 대하여 염려하게끔 하셨던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그리고 리브가는 아직도 이삭이 아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분위기는 파탄된 채 장자를 홀로 살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갈등과 투쟁의 골은 더욱더 깊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들이 소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소유물로 여길 경우 그 사람은 심하게 왜곡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인간들의 야심과 야심 사이에서 얼마나 모독을 당하고 당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탐욕을 정당화 해주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나눠집니다. 자신들의 탐욕으로 싸웠습니다.
1 야곱이 생각한 장자와 에서가 생각한 장자가 다릅니다.
2 에서의 죄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장자 아닌 체로 장자를 탈취하려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자기 힘으로 장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3 리브가의 죄는 그 아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고
4 이삭의 잘못은 에서의 남아다움을 좋아하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그 집안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를 위해서 주었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롬5:10)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싸움의 관계를 이삭의 네 명의 가족에게 집어넣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 본래의 죄성이 무엇인가가 그 싸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 부모가 편을 들어서 개입을 하고 있습니다. 승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긴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긴 이김으로 야곱을 선택하여 너는 승리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에 대한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의 계획에 의한 것이지 야곱의 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태에서 서로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상태가 서로 전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약속을 받았다. 나는 본래 장자다’ 우기며 싸웁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약속과 장자의 의미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자 하는 자가 장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장자는 종결되지 않은 입장으로 보았습니다. 에서는 이미 종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야곱이 맞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시시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아버지는 장자권을 에서에게 축복을 줄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빼앗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과 요구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20년이 다 지나가도록 천만인은커녕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주시는 자녀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의 자녀는 인간의 손을 들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천만인의 자식이든 백만 인의 자식이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필요한 인간들을 사용해서 일하신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천만인의 자식은 하나님의 할 몫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은 기분나빠 합니다. 주님의 할 몫을 나의 몫으로 돌리는 이유는 사람이 사는 보람이 자기가 손수 일을 해서 남에게 영광을 받을 때 사는 재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난 뒤에 신을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신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불임 여성인 리브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로 주어진 것은 두 아들인데 이들이 다툼을 일으킵니다. 이 다툼은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는 약속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알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싸움은 장자에 대한 싸움입니다. 누가 먼저 태어났느냐 누가 더 강하냐 누가 더 많으냐 하는 싸움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든 선입견을 불식시키십니다. 시간적인 순서에 의해서 장자의 신분이 확정되는 게 사회 공동체의 인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인식을 불식시키십니다. 이 생각이 틀렸다기보다는 결코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장자는 성경에서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장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길이 되고 있습니다. 언약과 생명의 전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육신적인 혈통을 따라 이어지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장자 개념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 콤플렉스를 가지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은 대부분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아벨과 아벨의 예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란을 거부하시고 동생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복의 근원자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거부하시고 이삭을 들어 쓰셨습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을 중에 르우벤을 거부하시고 유다와 요셉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중에 므낫세를 포기하고 작은 아들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막내 아들입니다. 다른 형제 다 버리고 오직 다윗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자는 혈통적 출생의 서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자가 장자가 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그 장자에게 예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되는 자는 누구며, 섬기는 이는 누구입니까 일반의 장자관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으로 공격하십니다.
1. 에서와 야곱의 싸움-장자권 싸움 에서와 야곱 사이에서 우리에게는 풀리지 않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1 태중에서의 싸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23)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했는데 큰 자는 누구며 작은 자는 누구입니까 출생의 서열을 따지면 에서가 큰 자며 야곱이 작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큰 자 에서가 어린 자 야곱을 섬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장자권과 축복권을 빼앗긴 후에 기회를 엿보아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서 그가 장자가 되고 에서가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큰 자 야곱이 작은 자 에서를 섬깁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큰 자는 누구며 어린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그 답은 신약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23:11)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는 예수님입니다. 그가 작고 어린 자인 우리를 섬겨 주시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앞으로 오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사역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이왕 섬길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섬김을 받는 쪽을 큰 자로 만들면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간단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꾸로 보아야 합니다. 나중에 장자로 밝혀지는 자를 먼저 나오게 하지 않고 뒤에 나오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인간의 죄를 배경으로 깔고 들어온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나중에 이것은 큰 자로서 어린 자를 섬기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통해 십자가로까지 그 의미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2 세상에서의 싸움-팥죽, 가로채는 장자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 여기에서 왜 ‘형’의 주가 아니고 ‘형제들의 주’입니까 왜 ‘네 어미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고’ 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는 에서와 야곱 형제밖에 없습니다. 누가 누구의 형이 되고, 누가 누구를 섬기든지 ‘네가 형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이 네게 굴복하며’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록상의 오류일까요 이 축복은 야곱에게 준 축복이 아니라 야곱에게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게 준 축복입니다. 야곱에게 준 축복은 그의 아들 요셉에게 이어져 성취됩니다. 야곱 언약에게 주신 약속처럼 요셉은 형제들의 주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어미의 아들들이 그에게 굴복했습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장자입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이 성취되기까지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며 비확정적입니다.
2.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에서와 야곱은 일생 싸움을 벌이며 살아갑니다. 에서와 야곱은 싸우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약속의 자손이 싸움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싸움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위한 싸움과는 상관없이 세속적이었습니다. 날 때부터 싸우는 동작 그대로 세상을 본 이들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걸맞게 서열 결정에 혼란을 일으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이들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이들간의 싸움에 말려듭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감정과 기분에 의해서 어느 한쪽을 선호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들먹이지만 그들의 싸움은 철저히 세속적입니다. 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재산을 누가 상속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어린 야곱은 형의 입에서 재산권 포기에 대한 언급이 있기를 기다렸습니다. 오히려 기다렸다기보다는 그런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드디어 형이 사냥을 나갔다가 허겁지겁 허기져 돌아왔을 때 팥죽으로 유혹하여 형으로부터 재산권 위임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에서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말했어도 자신이 장자권을 확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재산을 나눠줄 권리를 가진 아버지 이삭이 자신을 아끼고 또 누가 뭐래도 자신이 야곱보다 먼저 출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정식으로 상속권을 넘겨줄 때가 왔습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을 자기에게 잘해 주는 자에게 복을 빌어주는 형식을 통해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사냥한 고기를 좋아한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별미를 준비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을 가져오게 되면 흡족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전수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가 사냥을 나간 사이에 야곱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기를 들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대신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별미를 먹고는 야곱을 에서인 줄 착각하고 아브라함의 권리를 야곱에게 빌어 주었습니다.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7-29) 이삭은 약속하기를 별미를 만들어 온 자가 장자가 된다고 했지 이미 장자가 결정된 후에 별미를 가져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에서라고 믿고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니었습니다. 약속은 이삭의 확신과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이삭이 먼저 고기를 가져온 야곱을 에서라고 여기든지 안 여기든지 상관없이 결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머지 한 에서는 어린 자가 되었고 장자의 축복권을 가진 야곱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의 예상과 달리 장자권이 주어지자 여기서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취미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매이지 않음을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입니다. 이삭 자신이 하나님의 축복 전달에 동원된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바램과 무관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임을 비로소 인식하게 됩니다.
3. 인간의 판단과 결정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이삭의 눈을 어둡게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의 그의 건강 상태를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창27:1-2) 이삭은 눈이 어두워져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죽겠구나 느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이삭이 죽을 때 나이는 180세였습니다.(창35:28)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했다가 20년만에 되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그 때까지 생존해 계셨습니다. 건강했던 어머니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당시 그의 눈을 흐리게 하고 건강에 대하여 염려하게끔 하셨던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 그리고 리브가는 아직도 이삭이 아는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족의 분위기는 파탄된 채 장자를 홀로 살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습니다. 갈등과 투쟁의 골은 더욱더 깊어져 갔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들이 소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수단으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소유물로 여길 경우 그 사람은 심하게 왜곡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인간들의 야심과 야심 사이에서 얼마나 모독을 당하고 당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탐욕을 정당화 해주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서 나눠집니다. 자신들의 탐욕으로 싸웠습니다.
1 야곱이 생각한 장자와 에서가 생각한 장자가 다릅니다.
2 에서의 죄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장자 아닌 체로 장자를 탈취하려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자기 힘으로 장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바꾸고자 하는 탐욕입니다.
3 리브가의 죄는 그 아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고
4 이삭의 잘못은 에서의 남아다움을 좋아하는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그 집안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를 위해서 주었다고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롬5:10)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싸움의 관계를 이삭의 네 명의 가족에게 집어넣으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인간 본래의 죄성이 무엇인가가 그 싸움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싸우게 하시고 그 싸움에 부모가 편을 들어서 개입을 하고 있습니다. 승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긴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긴 이김으로 야곱을 선택하여 너는 승리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에 대한 선택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의 계획에 의한 것이지 야곱의 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태에서 서로 싸우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서로 싸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상태가 서로 전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약속을 받았다. 나는 본래 장자다’ 우기며 싸웁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의 약속과 장자의 의미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자 하는 자가 장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장자는 종결되지 않은 입장으로 보았습니다. 에서는 이미 종결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야곱이 맞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시시하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아버지는 장자권을 에서에게 축복을 줄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것을 빼앗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과 요구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자로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