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 우리 함께 내일을 말해 보자 (창37:1-11)
본문
몇 해 전에 내일은 뭐할 거니 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해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동일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오늘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또 내일은 무엇을 하실 건가요 어제도 한 일이 없고,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 없고, 내일도 할 일이 없다면 그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제도 한 일이 있고, 오늘도 하고 있는 일이 있으며, 내일도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 중에서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우리에게 내일은 반드시 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내일은 오고야 맙니다. 여러분이 기필코 맞이할 수밖에 없는 내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내일은 너무 가까워서 무슨 일을 하겠다 선뜻 대답할 수 없다면 내년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그런데 대부분 내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내년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내일 할 일이 곧 내년에 할 일입니다. 그러나 내일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내년에도 할 일이 없습니다. 계획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계획이 곧 결과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예수님도 언제나 내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시는 십자가 고난의 길과 그 죽음 뒤에 이어질 찬란한 부활의 승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신 뒤 이루어질 이 땅의 복음천하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일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벅차다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평생을 걸고 하고 싶은 인생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애쓸 목표와 이상이 있습니까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갖추고 인생은 출발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청년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1. 청년아, 우리 내일을 말해 보자!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내일을 꿈꾸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17세 소년 요셉은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12형제 중에서 자신과 동생 베냐민은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들로부터, 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불쌍하게 여겨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했지만 이것이 다시 형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비록 17세에 불과한 나이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에게는 밤마다 떠오르는 영롱한 꿈이 있었습니다. 날이 새면 그는 그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해야 했고, 다시 밤이면 하나님이 주시는 더 놀라운 꿈을 기대했습니다. 요셉은 아침마다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형님들, 지난밤에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꿈을 주셨습니다. 들어보세요.”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꿈이 환경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내일을 그는 사모했고,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내일을 말했습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는 변화되지 않기에 확실합니다. 현재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기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기에 그 미래를 대하는 인간은 불안합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 있는 요셉은 더욱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가 있었기에 그 미래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셨으면 그 미래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꿈꾸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없는 내일은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하나님 없는 인간의 미래를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미래를 말하는 것을 성경은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장래를 말하는 점쟁이, 술객들을 멸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미래를 말하느냐 안느냐가 중요치 않고 누구 안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는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면 내일을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자랑은 주님에 대한 자랑이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통해 느브가넷살의 장래를 예언했습니다. 벨사살 왕의 장래를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유라굴로라는 광풍 때문에 사색이 된 278명의 선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내일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3-25) 요셉은 애굽과 세계에 있을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섬기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는 지난밤에 무엇이라 말씀하시던가요 기독 청년이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내일을 오늘 여기서 말해 보십시오.
2. 청년아, 너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인간의 시각은 매우 다양합니다. 매사를 작게 보고, 작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큰 것을 보고, 크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지나간 과거가 있고, 머물고 있는 현재가 있고, 다가올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점(時点)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 중에 자신에게 가장 좋은 때를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머물고 있는 시점은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여러분이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과거 이야기입니까, 현재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이야기입니까 오늘 젊은 사람도 말하는 주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좌절과 낙심 속에 있다면 그는 노인입니다. 애늙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백발이 날리는 노인이라도 밝아오는 아침을 말하며 꿈과 비젼을 말하는 사람은 청년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노인과 같은 청년보다는 청년같은 노인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에서 우리는 결코 늙지 않는 만년 청년 갈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14:10-15) 가나안 정복의 영웅, 갈렙은 육체는 85세의 노인이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만년 청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간직하고 그것을 말하며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가나안 땅의 전쟁이 그쳐지게 하셨습니다. 그가 바라본 비젼을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청년이여, 여러분들은 부디 청년같은 청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과 어떤 말을 주로 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유교나 불교는 과거 지향적인 종교입니다. 유교에 속한 사람들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요순시대를 주로 말합니다. 족보를 뒤척이고 조상의 묘역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또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고무찬양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믿으며 전생을 말합니다. 모두가 지나간 시간입니다. 유교나 불교에 속한 사람들은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주로 지나간 과거를 말합니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이나 세상적으로 잘나가던 때를 침을 튀기며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고, 현재보다는 다가올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는 그날이 아름다운 날이었든, 아니면 쓰린 고통의 세월이었든 관계없이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과거 회상적이 될수록 매사에 진취적이지 못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과거를 치장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 이상 그 시간은 고스란히 빼앗기는 안타까운 시간입니다.
2 무신론과 인본주의는 철저하게 현세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이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천국과 지옥도 없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는 만큼 그는 현세적이고, 미래에 대한 자기 준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신앙은 아닙니다만 그들은 철저하게 유신론적인 것을 배격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내세를 거부하면 무엇만 남습니까 사람과 현세만 남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젊음도 청춘도 다 지나가버린 뒤 당신의 인생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3 기독교 신앙은 열린 미래, 열린 세계를 지향합니다. 기독교의 미래관은 긍정적이며, 소망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만물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다니엘, 에스겔, 요엘,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요한이 쓴 서신서만을 봅시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요한
1,
2,3서를 통해서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소망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요한
1,
2,3서를 통해 사랑의 삶을 살다가 요한계시록 소망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신앙임을 말씀합니다. 청년이여, 여러분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는가요 여러분을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생명의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있는가요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느 시간을 보고 있는가요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행여 잘못된 신앙과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은 심하게 굴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본문 속의 주인공, 요셉은 언제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 비젼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질 미래를 믿었기에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꿔온 미래의 삶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37:1-11은 잠을 자면서 꾼 꿈이지만 요셉은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는 승리했을 때도 보복하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앞에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쓰임받는 사실이 기쁠 뿐입니다.
3. 청년아, 영원한 생명을 우리 함께 말해 보자! 사람을 연령별로 분류하면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년 노인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로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청년같은 노인이 있습니다. 노인같은 청년도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청년같은 삶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하면 됩니다. 청년같은 삶을 거부하고 일부러 노인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청년같이 살고 싶은데 안 되기 때문에 노인같이 삽니다.
그런데 그 삶이 가능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뒤에 이들은 어떤 사람들로 바뀌었습니까 성령님에 사로잡혔을 때 이루어지는 변화를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할 수 없다 말하던 사람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나만 생각하던 사람이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7-18)
1 자녀들이 예언하게 됩니다. 6.25 사변 때 미국 군목 한사람이 전쟁의 참호를 다니며 병사들을 위해서 위로하고 기도하며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겁에 질린 흑인 병사 하나가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목사님, 나에게 미래를 주세요.” 미래가 없다는 것보다 더 큰 저주의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성령님을 받으면 힘없고 무력한 우리의 자녀들이 미래를 말하게 됩니다. 장래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으므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2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답답한 현실만 보지 않습니다. 웅장하고 원대한 꿈을 꿉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세계를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만을 사용하고 싶으실까요 아닙니다. 그 시대에 요셉을 쓰셨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의 요셉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쓰실 것입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을 무릎 아래 굴복시킨 사람, 모든 인류를 가슴에 품은 사람, 그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대부분 노인들은 죽음을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변에 하나 둘 정다웠던 친구들이 떠나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마치는 날, 내세가 기다려지고 나는 천국에 가노라 하면 기쁘게 떠날 수 있는 사람, 떠날 사람은 기쁨에 떠나고 남는 사람은 다시 만날 소망으로 보내는 그래서 육신의 죽음도 차라리 기쁨이요, 감사일 수 있는 인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래에 대하여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꺼려합니다. 그러나 거부해도 오늘이 저물면 내일은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노인은 꿈을 꾸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 꿈의 세계를 그리는 것입니다.
4 남종과 여종들이 예언하게 됩니다. 앞에서의 예언은 장래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맡긴 말씀, 예언(預言)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예언이 필요치 않습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은 이미 성경에 다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예언을 할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된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위하여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원대한 꿈과 미래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의 것입니다. 꿈을 구하고 주신 꿈대로 행동하고 뛰십시오. 오늘 최선을 다한 삶에 감사가 넘치고 내일도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영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찬 것 아닙니까 오늘을 자신있게 말하며 내일을 소망하는 사람, 우리 인생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죽으면서도 내세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참된 승리자입니다.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그 미래를 주십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 꿈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종살이, 옥살이의 고통에서도 능히 건지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시련 뒤에 이루어질 찬란한 꿈의 시련을 믿었던 것입니다. 청년이여, 내일을 말하십시오. 미래를 꿈꾸십시오. 21세기가 불과 27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신세기가 될 것입니다. 신세대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신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신혁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아, 우리 함께 내일을 말해 보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음에 동일한 제목으로 말할 때는 오늘보다는 훨씬 발전하고 성장한 모습으로 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내일 할 일이 있는 사람은 내년에도 할 일이 있습니다. 내일 할 일이 곧 내년에 할 일입니다. 그러나 내일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내년에도 할 일이 없습니다. 계획이 없으면 결과도 없습니다. 계획이 곧 결과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 예수님도 언제나 내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걸어가시는 십자가 고난의 길과 그 죽음 뒤에 이어질 찬란한 부활의 승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임하신 뒤 이루어질 이 땅의 복음천하를 꿈꾸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할 일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벅차다면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평생을 걸고 하고 싶은 인생의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까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노력하고 애쓸 목표와 이상이 있습니까 분명한 목표와 방향을 갖추고 인생은 출발되어야 합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는 청년들은 더욱 더 그럴 것입니다.
1. 청년아, 우리 내일을 말해 보자!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내일을 꿈꾸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17세 소년 요셉은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12형제 중에서 자신과 동생 베냐민은 어머니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들로부터, 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이것을 불쌍하게 여겨 다른 형제들보다 더 사랑했지만 이것이 다시 형들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미래에 대한 원대한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비록 17세에 불과한 나이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에게는 밤마다 떠오르는 영롱한 꿈이 있었습니다. 날이 새면 그는 그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해야 했고, 다시 밤이면 하나님이 주시는 더 놀라운 꿈을 기대했습니다. 요셉은 아침마다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형님들, 지난밤에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꿈을 주셨습니다. 들어보세요.” 꿈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워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꿈이 환경을 지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내일을 그는 사모했고, 하나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내일을 말했습니다.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는 변화되지 않기에 확실합니다. 현재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기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기에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기에 그 미래를 대하는 인간은 불안합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 있는 요셉은 더욱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가 있었기에 그 미래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 수 없는 세계,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셨으면 그 미래를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꿈꾸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없는 내일은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127:1)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3-14) 하나님 없는 인간의 미래를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은 미래를 말하는 것을 성경은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좇아 장래를 말하는 점쟁이, 술객들을 멸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미래를 말하느냐 안느냐가 중요치 않고 누구 안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는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여 주신다면 내일을 자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자랑은 주님에 대한 자랑이 될 것입니다. 다니엘은 꿈을 통해 느브가넷살의 장래를 예언했습니다. 벨사살 왕의 장래를 예언했습니다. 말세에 되어질 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유라굴로라는 광풍 때문에 사색이 된 278명의 선원들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내일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3-25) 요셉은 애굽과 세계에 있을 칠년 풍년과 칠년 흉년을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섬기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는 지난밤에 무엇이라 말씀하시던가요 기독 청년이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내일을 오늘 여기서 말해 보십시오.
2. 청년아, 너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인간의 시각은 매우 다양합니다. 매사를 작게 보고, 작은 것만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큰 것을 보고, 크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지나간 과거가 있고, 머물고 있는 현재가 있고, 다가올 미래가 있습니다. 오늘 현재라는 시간을 살아도 우리가 바라보는 시점(時点)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 중에 자신에게 가장 좋은 때를 말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머물고 있는 시점은 과거입니까, 현재입니까, 미래입니까 여러분이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과거 이야기입니까, 현재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미래의 이야기입니까 오늘 젊은 사람도 말하는 주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고, 좌절과 낙심 속에 있다면 그는 노인입니다. 애늙이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백발이 날리는 노인이라도 밝아오는 아침을 말하며 꿈과 비젼을 말하는 사람은 청년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노인과 같은 청년보다는 청년같은 노인을 더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에서 우리는 결코 늙지 않는 만년 청년 갈렙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며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수14:10-15) 가나안 정복의 영웅, 갈렙은 육체는 85세의 노인이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만년 청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간직하고 그것을 말하며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가나안 땅의 전쟁이 그쳐지게 하셨습니다. 그가 바라본 비젼을 현실이 되게 하셨습니다. 청년이여, 여러분들은 부디 청년같은 청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과 어떤 말을 주로 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가 가진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유교나 불교는 과거 지향적인 종교입니다. 유교에 속한 사람들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나 요순시대를 주로 말합니다. 족보를 뒤척이고 조상의 묘역을 아름답게 꾸밉니다. 또 조상의 위대한 업적을 고무찬양합니다. 불교는 윤회를 믿으며 전생을 말합니다. 모두가 지나간 시간입니다. 유교나 불교에 속한 사람들은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주로 지나간 과거를 말합니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이나 세상적으로 잘나가던 때를 침을 튀기며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과거보다는 현재가 중요하고, 현재보다는 다가올 미래가 더 중요합니다. 과거는 그날이 아름다운 날이었든, 아니면 쓰린 고통의 세월이었든 관계없이 우리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입니다. 사람은 과거 회상적이 될수록 매사에 진취적이지 못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기보다는 과거를 치장하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인 이상 그 시간은 고스란히 빼앗기는 안타까운 시간입니다.
2 무신론과 인본주의는 철저하게 현세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이 없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천국과 지옥도 없다.”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는 만큼 그는 현세적이고, 미래에 대한 자기 준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신앙은 아닙니다만 그들은 철저하게 유신론적인 것을 배격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내세를 거부하면 무엇만 남습니까 사람과 현세만 남습니다. 그러나 현재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머물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젊음도 청춘도 다 지나가버린 뒤 당신의 인생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3 기독교 신앙은 열린 미래, 열린 세계를 지향합니다. 기독교의 미래관은 긍정적이며, 소망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나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과 만물의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다니엘, 에스겔, 요엘, 요한계시록과 같은 예언서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요한이 쓴 서신서만을 봅시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요한
1,
2,3서를 통해서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소망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요한
1,
2,3서를 통해 사랑의 삶을 살다가 요한계시록 소망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신앙임을 말씀합니다. 청년이여, 여러분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있는가요 여러분을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생명의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있는가요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어느 시간을 보고 있는가요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행여 잘못된 신앙과 믿음으로 여러분의 삶은 심하게 굴절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오늘 본문 속의 주인공, 요셉은 언제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그 비젼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질 미래를 믿었기에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꿈꿔온 미래의 삶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창세기 37:1-11은 잠을 자면서 꾼 꿈이지만 요셉은 참으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그 꿈을 꾸었습니다. 미래를 꿈꾸는 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꿈꾸는 자는 승리했을 때도 보복하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앞에 자신의 삶을 인도하시는 목자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에 쓰임받는 사실이 기쁠 뿐입니다.
3. 청년아, 영원한 생명을 우리 함께 말해 보자! 사람을 연령별로 분류하면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년 노인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로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청년같은 노인이 있습니다. 노인같은 청년도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청년같은 삶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하면 됩니다. 청년같은 삶을 거부하고 일부러 노인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청년같이 살고 싶은데 안 되기 때문에 노인같이 삽니다.
그런데 그 삶이 가능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떠는 비겁자들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받은 뒤에 이들은 어떤 사람들로 바뀌었습니까 성령님에 사로잡혔을 때 이루어지는 변화를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할 수 없다 말하던 사람이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됩니다. 나만 생각하던 사람이 민족과 세계를 가슴에 품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행2:17-18)
1 자녀들이 예언하게 됩니다. 6.25 사변 때 미국 군목 한사람이 전쟁의 참호를 다니며 병사들을 위해서 위로하고 기도하며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겁에 질린 흑인 병사 하나가 공포 속에 떨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습니까” “목사님, 나에게 미래를 주세요.” 미래가 없다는 것보다 더 큰 저주의 선언이 어디 있습니까 성령님을 받으면 힘없고 무력한 우리의 자녀들이 미래를 말하게 됩니다. 장래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없으므로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집니다.
2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답답한 현실만 보지 않습니다. 웅장하고 원대한 꿈을 꿉니다.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세계를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만을 사용하고 싶으실까요 아닙니다. 그 시대에 요셉을 쓰셨다면 하나님은 이 시대의 요셉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쓰실 것입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을 무릎 아래 굴복시킨 사람, 모든 인류를 가슴에 품은 사람, 그 사람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됩니다. 대부분 노인들은 죽음을 생각하거나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주변에 하나 둘 정다웠던 친구들이 떠나갈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마치는 날, 내세가 기다려지고 나는 천국에 가노라 하면 기쁘게 떠날 수 있는 사람, 떠날 사람은 기쁨에 떠나고 남는 사람은 다시 만날 소망으로 보내는 그래서 육신의 죽음도 차라리 기쁨이요, 감사일 수 있는 인생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래에 대하여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꺼려합니다. 그러나 거부해도 오늘이 저물면 내일은 그림자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노인은 꿈을 꾸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그 꿈의 세계를 그리는 것입니다.
4 남종과 여종들이 예언하게 됩니다. 앞에서의 예언은 장래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이 맡긴 말씀, 예언(預言)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됩니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예언이 필요치 않습니다. 미래에 되어질 일은 이미 성경에 다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또 다른 예언을 할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된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위하여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하지 않으면 주시지 않습니다.
원대한 꿈과 미래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의 것입니다. 꿈을 구하고 주신 꿈대로 행동하고 뛰십시오. 오늘 최선을 다한 삶에 감사가 넘치고 내일도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실 영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찬 것 아닙니까 오늘을 자신있게 말하며 내일을 소망하는 사람, 우리 인생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죽으면서도 내세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참된 승리자입니다.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그 미래를 주십니다. 요셉이 꾼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 꿈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종살이, 옥살이의 고통에서도 능히 건지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시련 뒤에 이루어질 찬란한 꿈의 시련을 믿었던 것입니다. 청년이여, 내일을 말하십시오. 미래를 꿈꾸십시오. 21세기가 불과 27개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21세기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신세기가 될 것입니다. 신세대가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신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신혁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청년아, 우리 함께 내일을 말해 보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음에 동일한 제목으로 말할 때는 오늘보다는 훨씬 발전하고 성장한 모습으로 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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