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 (창37:1-11)
본문
우리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며, 하나님의 주권이 얼마나 그들을 빗겨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야곱을 통해서 동일한 의미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하셨을 때 그 약속이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브라함의 생각은 죄다 빗겨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조카 롯을 통해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주시리라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아브라함은 자신은 다메섹 엘리에셀을 상속자를 삼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언약을 이루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다 못한 아브라함은 86세에 애굽에서 데리고 올라온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제자신은 늙었사오니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거절하시고 드디어 100세에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없는 데서 있게 하시며, 죽은 데서 살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좇아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죽이고자 칼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시고 수양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이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없는 어린 양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삭도 아닌 스스로가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삭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삭은 나이 60에 아들 둘을 얻었는데 그는 큰 아들 에서를 좋아하고,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도 야곱도 다 거부하심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거부하심의 절정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켜 버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과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유다의 족보를 좇아 왕족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왕족으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 1장입니다. 얼마나 강조해서 예수님이 왕족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기록되었지만 원어 성경, 영어 성경에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순서를 뒤바꿔 놓았습니다.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앞서 태어난 아브라함을 그보다 훨씬 뒤늦게 태어난 다윗 뒤에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적인 신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진 영적인 신분과 의미는 성경이 요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창49:22-23) 요셉은 열두 형제들 중에 가장 긴 내용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빠져 버립니다. 레위 역시 제사장 지파라고 해서 빠져 버리고 나머지 빈 자리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갑니다. 다른 형제들은 겨우 그 이름만 유지해 갈 뿐인데 요셉은 두 아들이 다 열두 지파에 들어감으로 남들보다 갑절이나 많은 축복을 누려 가는 것입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49:24)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유다 족속으로 오시지만 영적으로는 요셉의 계통을 좇아 이스라엘의 반석되신 목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49:25-26) 하나님은 유다와 요셉을 통해서 메시야 혈통의 족보를 이어가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으나 일을 성취해 나가시는 과정은 야곱의 생각을 훨씬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선택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요셉을 거부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36장은 에돔 족속인 에서의 족보, 계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7장에서는 이어서 야곱의 족보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 이야기가 나옵니까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37장 이후 사건은 요셉 이야기이면서 실상은 야곱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약전(略傳)이 이러하니라.”(창37:2) 약전이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입니다. 에서의 족보는 이름만 기록했지만 야곱의 족보는 사건을 통해 기록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야곱은 열두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데는 몇 가지기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37:3)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서 야곱은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아내와 자식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 한 사람을 위해서 14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바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라헬은 아이를 못 낳는 석녀였습니다. 여자에게 아기 못 낳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해산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수치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라헬은 요셉을 낳고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습니다.(창30:23) 이렇듯 사랑했던 여인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요 힘들게 낳은 자식이니 그 사랑이 오죽하겠습니까 또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그를 더욱 편애하게 했을 것입니다.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낳고 보니 용모도 준수하고 하는 짓이 다른 아들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이래저래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채색옷을 지어 입힘으로 다른 자식들과는 구별되게 드러나게 편애하였습니다. 야곱이 이렇듯 요셉을 편애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말은 두 번에 걸친 꿈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들판에 열한 볏단들이 요셉의 볏단들에게 절하고, 하늘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다 요셉의 별에게 절을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놈이 보통 크게 될 놈이 아닙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야곱은 요셉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37:11)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을 하나님이 어떻게 깨뜨리십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죽여 버리십니다. 물론 요셉은 종으로 애굽에 팔렸지만 야곱은 자식들이 이실직고하기 전까지는 야곱이 죽은 줄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네가 선택하고 네가 판단하는 것은 다 아니야! 하기 위하여 요셉을 죽은 자처럼 야곱에게서 떼어놓는 것입니다. 야곱은 결국 나는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야곱의 선택을 깨뜨리시는 하나님-깨뜨려지는 장자의 계열 창세기 37장부터는 요셉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중간에 유다 이야기가 끼여들었습니다. 그리고 39장부터는 다시 요셉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 38장 유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계모 빌하와 더불어 통간함으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족속을 멸절시킴으로 버림받았습니다. 그 다음이 유다입니다. 유다까지 왔으면 이제는 순탄하게 내려가야 할텐데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큰 아들이 장성하자 유다는 다말이라는 처녀를 취하여 며느리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이 사실을 가슴 아파 하면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아 네 형의 씨를 이어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태어날 자식이 자기의 자식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임신을 피하게 됩니다. 이것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은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그 때 셀라가 아직 어렸으므로 유다는 다말에게 친정에 돌아가 있으면 막내 아들이 장성한 뒤에 다시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장성했음에도 자신을 다시 불러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있다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선택을 깨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 오난, 셀라 셋 다 거절하시고 하나님은 다말을 통해서 족보를 이어가십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자식들이 태어나는데 또 얼마나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야곱과 에서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 베레스와 세라 유다의 아들들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창38:27-30) 다말이 아이를 낳을 때 보니 쌍둥이가 태중에 들어 있습니다. 산파가 보니 한 녀석이 머리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산파는 뒤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녀석의 손에 붉은 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안에 있는 녀석이 형의 그 손을 잡아들이고 자기가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산파가 하는 말이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베레스라는 이름의 뜻은 ‘터짐’, ‘파괴’입니다. 세라는 순십간에 형에서 동생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사건을 전말을 볼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야곱의 뜻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장자의 명분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으로, 다시 레위로, 또 다시 유다까지 밀려 왔습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유다에게서 이제 그의 아들들에게 장자의 명분이 이어져야 하는데 아니고, 아니고 하더니 엉뚱하게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그의 생각을 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깨닫기까지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도저히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보낸 수레를 보고는 비로소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며, 죽은 데서 살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인도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47:9-10)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말은 그가 그의 인생 동안 겪었던 고생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내가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날 야곱은 바로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고 그 앞을 물러 나왔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일은 큰 자가 작은 자를 향하여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로와 야곱 중에 누가 큰 자입니까 야곱이 큰 자입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자아가 완벽하게 꺾였을 때 야곱은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가 되어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약속을 성취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마귀와 싸우십니다. 마귀가 왕노릇하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십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매 사건마다, 매 시간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원하신 믿는 성도들과 싸우십니다. 내 안에 있는 마귀, 내 안에 있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십니다. 그 때까지는 우리가 험악한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눈이 흐려지고 기력이 쇠할 때 요셉의 아들들을 어떻게 축복합니까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창48:14) 요셉이 장자에게 우수를 얹어 축복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았기에 야곱은 팔을 어긋맞겨서 반대로 축복하게 됩니다. 나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산 제사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을 좇아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죽이고자 칼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제지하시고 수양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이삭은 죽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예비하신 죄없는 어린 양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삭도 아닌 스스로가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인간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이삭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삭은 나이 60에 아들 둘을 얻었는데 그는 큰 아들 에서를 좋아하고, 아내 리브가는 야곱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도 야곱도 다 거부하심으로 이삭과 리브가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거부하심의 절정은 얍복강에서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켜 버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자녀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과의 사이에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는 유다의 족보를 좇아 왕족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왕족으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마태복음 1장입니다. 얼마나 강조해서 예수님이 왕족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기록되었지만 원어 성경, 영어 성경에는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순서를 뒤바꿔 놓았습니다. 다윗이 왕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님도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앞서 태어난 아브라함을 그보다 훨씬 뒤늦게 태어난 다윗 뒤에 이름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적인 신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진 영적인 신분과 의미는 성경이 요셉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창49:22-23) 요셉은 열두 형제들 중에 가장 긴 내용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빠져 버립니다. 레위 역시 제사장 지파라고 해서 빠져 버리고 나머지 빈 자리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들어갑니다. 다른 형제들은 겨우 그 이름만 유지해 갈 뿐인데 요셉은 두 아들이 다 열두 지파에 들어감으로 남들보다 갑절이나 많은 축복을 누려 가는 것입니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창49:24)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유다 족속으로 오시지만 영적으로는 요셉의 계통을 좇아 이스라엘의 반석되신 목자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창49:25-26) 하나님은 유다와 요셉을 통해서 메시야 혈통의 족보를 이어가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야곱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으나 일을 성취해 나가시는 과정은 야곱의 생각을 훨씬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선택을 깨뜨리시는 하나님-요셉을 거부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36장은 에돔 족속인 에서의 족보, 계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7장에서는 이어서 야곱의 족보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 이야기가 나옵니까 요셉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37장 이후 사건은 요셉 이야기이면서 실상은 야곱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약전(略傳)이 이러하니라.”(창37:2) 약전이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입니다. 에서의 족보는 이름만 기록했지만 야곱의 족보는 사건을 통해 기록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야곱은 열두 아들들 가운데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야곱이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을 특별히 사랑한 데는 몇 가지기 이유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37:3)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서 야곱은 라헬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아내와 자식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 한 사람을 위해서 14년의 세월을 송두리째 바칠 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라헬은 아이를 못 낳는 석녀였습니다. 여자에게 아기 못 낳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해산하지 못하는 것은 가장 큰 수치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라헬은 요셉을 낳고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습니다.(창30:23) 이렇듯 사랑했던 여인을 통해서 낳은 자식이요 힘들게 낳은 자식이니 그 사랑이 오죽하겠습니까 또 요셉은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에 측은한 마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그를 더욱 편애하게 했을 것입니다.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가진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낳고 보니 용모도 준수하고 하는 짓이 다른 아들들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이래저래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채색옷을 지어 입힘으로 다른 자식들과는 구별되게 드러나게 편애하였습니다. 야곱이 이렇듯 요셉을 편애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긍정할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말은 두 번에 걸친 꿈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들판에 열한 볏단들이 요셉의 볏단들에게 절하고, 하늘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다 요셉의 별에게 절을 했습니다. 꿈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놈이 보통 크게 될 놈이 아닙니다. 될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야곱은 요셉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창37:11)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을 하나님이 어떻게 깨뜨리십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죽여 버리십니다. 물론 요셉은 종으로 애굽에 팔렸지만 야곱은 자식들이 이실직고하기 전까지는 야곱이 죽은 줄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으로 하여금 네가 선택하고 네가 판단하는 것은 다 아니야! 하기 위하여 요셉을 죽은 자처럼 야곱에게서 떼어놓는 것입니다. 야곱은 결국 나는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야곱의 선택을 깨뜨리시는 하나님-깨뜨려지는 장자의 계열 창세기 37장부터는 요셉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중간에 유다 이야기가 끼여들었습니다. 그리고 39장부터는 다시 요셉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면 38장 유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장자였던 르우벤은 계모 빌하와 더불어 통간함으로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족속을 멸절시킴으로 버림받았습니다. 그 다음이 유다입니다. 유다까지 왔으면 이제는 순탄하게 내려가야 할텐데 그것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는 엘과 오난과 셀라라는 세 아들을 두었습니다. 큰 아들이 장성하자 유다는 다말이라는 처녀를 취하여 며느리를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함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이 사실을 가슴 아파 하면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아이를 낳아 네 형의 씨를 이어가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오난은 태어날 자식이 자기의 자식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임신을 피하게 됩니다. 이것을 악하게 보신 하나님은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그 때 셀라가 아직 어렸으므로 유다는 다말에게 친정에 돌아가 있으면 막내 아들이 장성한 뒤에 다시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수년의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장성했음에도 자신을 다시 불러주지 않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있다가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쌍둥이를 낳게 됩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선택을 깨버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 오난, 셀라 셋 다 거절하시고 하나님은 다말을 통해서 족보를 이어가십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자식들이 태어나는데 또 얼마나 기가 막힌 사건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야곱과 에서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 베레스와 세라 유다의 아들들 가운데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임산하여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사를 가져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 형제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 형제 곧 손에 홍사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창38:27-30) 다말이 아이를 낳을 때 보니 쌍둥이가 태중에 들어 있습니다. 산파가 보니 한 녀석이 머리가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산파는 뒤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녀석의 손에 붉은 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안에 있는 녀석이 형의 그 손을 잡아들이고 자기가 먼저 나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산파가 하는 말이 “네가 어찌하여 터치고 나오느냐” 한 고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불렀다. 베레스라는 이름의 뜻은 ‘터짐’, ‘파괴’입니다. 세라는 순십간에 형에서 동생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사건을 전말을 볼 때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야곱의 뜻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집니다. 장자의 명분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으로, 다시 레위로, 또 다시 유다까지 밀려 왔습니다. 야곱의 생각에는 유다에게서 이제 그의 아들들에게 장자의 명분이 이어져야 하는데 아니고, 아니고 하더니 엉뚱하게 유다와 다말 사이에서 쌍둥이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그의 생각을 부수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깨닫기까지 요셉이 애굽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도저히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야곱은 바로가 보낸 수레를 보고는 비로소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야곱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며, 죽은 데서 살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인도했습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나이를 물었을 때 그가 어떻게 말합니까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창47:9-10)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말은 그가 그의 인생 동안 겪었던 고생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기까지 내가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야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날 야곱은 바로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고 그 앞을 물러 나왔습니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일은 큰 자가 작은 자를 향하여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바로와 야곱 중에 누가 큰 자입니까 야곱이 큰 자입니다.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자아가 완벽하게 꺾였을 때 야곱은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가 되어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약속을 성취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마귀와 싸우십니다. 마귀가 왕노릇하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십니다. 그러나 그들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매 사건마다, 매 시간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원하신 믿는 성도들과 싸우십니다. 내 안에 있는 마귀, 내 안에 있는 세상과 더불어 싸우십니다. 그 때까지는 우리가 험악한 세월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우리가 스스로를 포기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눈이 흐려지고 기력이 쇠할 때 요셉의 아들들을 어떻게 축복합니까 “이스라엘이 우수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좌수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창48:14) 요셉이 장자에게 우수를 얹어 축복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았기에 야곱은 팔을 어긋맞겨서 반대로 축복하게 됩니다. 나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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