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강 (겔47:1-12)
본문
먼 길을 여행 하려 하는 사람은 떠나기 전에 무엇을 가져가야 하는 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어떤 것이 제대로 챙겨 졌는지 두번 세번 확인하는 것이 꼭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노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적절히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장비들이 무엇이고,또 우리에게서 모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노정에 필요한 모든 것을 넉넉히 준비하시고 계시고, 우리가 만날 도전과 어려움을 다 극복할 수 있는 자원을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먼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라는 것이요,하나님께 겸손히 이 모든 것을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들이 이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시는데, 우리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중한 책임에 눌려서 용기가 꺾이고,실망을 하는 패배된 삶을 살고 있고,교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주저 앉은 침체된 나날이 많습니다. 온갖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도 보지 못한 채, 잔뜩 눌려 있고,영적으로는 메마르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상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돌이켜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왜 믿는 것 같으면서도 체험적이지 못합니까 머리는 꽉 차고 가슴은 텅 비어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너무도 좌절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나의 신화거나 혹은 도달하지 못할 환상이란 생각은 안 드는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이 영적 침체의 깊고 중한 병을 진단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다운 활력있는 생활로 넘쳐야 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메마른 땅이라 땅은 굳고, 물 한 방울이 귀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은 바로 생명을 가르치는 것을 그들은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성경 많은 곳에서 물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샘물”,“마른 땅의 샘물”,“사막의 물 줄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샘이나 시냇가,강,바다,같이 물과 상관된 사건이 많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가지고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셨고,“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도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 부터 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7:39)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 에스겔에서는 큰 강을 말했는데,하나님이 그 흐르는 강에서 만물이 소성케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침체된 신앙 형편. 교회도 있고, 교리도 있고, 봉사도 있으나, 신앙생활의 불은 꺼져 있는 상태. 이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47: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그 문 지방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흘러 내리더라’ 강의 원천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좌가 있는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참된 축복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 주 예수님의 앉으신 보좌로 부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큰 위로와 확신을 주지 않습니까 승리하신 주님의 보좌로 시작하는 성령님의 흐름입니다.우리는 아직 승리를 못했지만 승리하신 분을 모시고 있고,최후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제 강물의 코스를 살펴보자.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성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곧 희생의 제단을 통해서 흘러 갔다는 것이다.생명을 주는 성령님의 능력이 세상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시기 전에는 성령님이 강림하지 않았다. 성령님이 내게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깨끗이 씻기워 졌기 때문이다.갈보리 후에 오순절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만나지 못하면 성령님이 계심과 능력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우리들은 오순절은 기다리지만 갈보리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고서 우리는 용서를 받았다. 그 순간에 성령님에 의하여 인치심을 받고,성령님이 우리 영안에 내주하게 된 것이다. 이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우리들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구비해 있고,교회 생활도 많이 했고,영적인 생활의 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자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47:3-6)“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다시 일천척을 촉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그가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하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 그 성령님이 당신을 어디까지 건너게 하였느냐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성령님의 강물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느냐 3절에 보면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까지만 찼다고 한다. 이는 주님의 대속 공로를 인하여 구원을 얻은 기본구원 얻은 신자를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너무도 중대한 사건이요,귀한 일이지만 거기서 머물고 있으면 안된다.더욱 풍성한 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겨우 그물의 깊이라야 발목이다. 아직까지 자신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나 있고,성령님 생활이 자기를 지배하는것이 거의 없는 영적으로 유아의 상태이다.
고린도 교회를 육신에 있다고 책망을 했는데 우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났는지,믿는다하나 아직 소망은 육신적이요,세상적이요,정욕적인 신앙의 상태이다.이기적이고,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고,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밥을 씹어서 숟가락으로 입속에 떠 먹여 줘야 하는 ‘젖’을 먹는 영적 생활로 간신히 지탱해 나가는 사람이다.몇 십년 신앙생활을 해도 성직을 맡았다고 해도 이런 사람이 없는 것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 사람도 그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위해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세상의 수준에서 머물며 살았다.걸핏하면 마음을 상해 하찮은 일에 신경을 곤두 세웠고,세상 사람에게도 빛과 소금의 직무를 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냄새를 피우고 연기만 내는 한심스런 꼴을 하는 교인이었다.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없는지, 나는 이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이런 상태에 있는 부분이 많든지 적든지 누구에게나 이런 요소가 있다.이를 회개해야 한다. 이기심으로만 가득하고 서로 헐 뜯고,잘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발동하는 이런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사랑이 없고,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가 이런 교회이다.우리들이 생수의 강에서 겨우 발목까지 밖에 안 들어가 있으면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 많은 본성 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성령님으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육에 속한 신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연인이 구원을 받게 되고 자동적으로 육신의 사람이 성령님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은 아니다. 처음 믿을 때에 그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오늘에도 간직하고 유지하고 있느냐 그 후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따라 우리를 주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느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는 못하고 심한 좌절과 회의와 실패의 생활로 계속되고 있고,외형적인 신앙의 행위는 껍데기로 바르는 것이 있는 정도이다.자기를 살펴서 영적으로 병든 자신임을 바로 알지 않으면 치료 받을 길 없이 그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이는 일이 되는것이다. 환자가 아픈 곳을 느낄 때에는 그래도 살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영에 속한 사람인데 지금 육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시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이 무릎은 기도의 생활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의 물결이 높아진다는 표시이다. 나는 전과 같이는 도무지 살 수 없음을 깨닫고,하나님의 생명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축복을 받으려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기 때문에 이제 형을 두려워 하여 외 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 돌로 벼개를 하면서 자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되었다.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여 주시면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위로해 주셨다.그는 하나님과 흥정을 한다.자기를 집까지 무사히 이끌어 보호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20여년을 살면서 하나님과 그 약속을 잊었고, 육신의 생활에만 정신이 없었다.그가 자신을 발견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이제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하겠는데, 자기의 형인 에서가 군사 400여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는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게된다.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게 되는데 그사람은 다름 아닌 20년 전에 자기가 만났던 주님이었다.주님은 안심하고 건너가라 하시는데 야곱은 당신이 축복을 하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고 물고 늘어진다. 이것은 이전 같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저급한 생활에서 살 수가 없다느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의 꾀로서 남을 속여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이전에는 내가 육신으로 내 꾀로 살았고,육신이 만족되면 다 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주님의 축복이아니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갈 수 없다.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고,나는 겁장이라서 도무지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주여 도우소서! 하는 간구가 필요하지 않느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님이 야곱의 이름을 모르실 리 없는데 물으실때에 “죄송합니다.주님이 내게 이제껏 오래 참으시면서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선하심과 신실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나 나는 아직 야곱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네가 이제는 네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이스라엘이라 하리라.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받은 자녀라 하리라”. 마치 시몬에게 네가 베드로라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개명해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사로 잡으신 후에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시켜서 바울을 만나도록 했을 때에 그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으로 알았기에 두려워 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하셨다. 바리새인 이었던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게 된 것을 말한다. “보라 그가 이것 저것을 말한다”거나 “보라 그가 큰 체험을 하고 큰 일을 하고 있다”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하셨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고 찾는 것이 상한 심령이다.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을 애타게 찾으며,구원을 간구하는 심령이 얼마나 되느냐 우리는 너무 과거에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에 나는 이러이러 했다.이런 역사를 이루었다. 그것도 귀한 일이나 오늘에 그가 어떤 상태의 신앙상태인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우리는 과거에 처음 믿을 때에 하나님을 영접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일단 하나님을 발견 했으면 다시 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짓된 논리에 속고 살기 쉽다. 이는 정통신앙을 끝내는 위험한 생각이다.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무릎이 찰 때까지 강물로 내려 가야한다. 주께서 당신을 건너게 했느냐 이제 (47:4)을 보자. “.나로 물을 건너게하시니 물이 허리에 흐르고”이것은 능력의 모습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것은 능력의 모습이다.강물로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그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 여기에 능력의 발견이 있다.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 위에 지워지는 모든 짐들을 질 수 있다. 승리는 나의 능력과 투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세상의 전투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오직 막강하신 군대 사령관이신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싸움을 모르는 사람이요,왜 싸워야 하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인데 이 원수를 이기는 것도,이 구원의 남은 여정을 걸어가는 것도 주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건너게 하셨는가 (47:5)을 보면”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본문의 주인공은 이제 깊은 강물에서 헤엄을 친다. 사람이 수영을 할 때에는 머리만 보이고,몸은 안 보이게 된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자아가 완전히 물속에 잠겨야만 머리되신 그리스도만 보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의 원천에서 얼마나 깊이 잠겼고,얼마나 깊은 하나님의 축복의 강에 잠겨 있느냐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완전히 나의 생애를 주님께 맡기고, 그의 충만을 나의 것으로 받아 누리는, 깊은 강에 잠겨 사는 것이 우리가 능력을 받아 사는 것이요, 이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데,얼마나 우리는 깊이 잠겨 있느냐 자신의 상태를 봐야 하지 않느냐 발목까지 물이 차 있느냐,무릎까지 차 있느냐,혹은 허리까지 차 있느냐,아니면 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충만하여 영광된 체험 속에는 헤엄치고 있느냐
이 강물의 효과에 대하여 6절-12절 까지 기록했다. 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역사는 어떤 것인가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않으며,실과가 끊이지 않고,날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강이 흘러 나가서 강둑에서 식물이 자라게 되었다.나무들의 뿌리가 강 바닥 아래까지 뻗어서 양분을 흡수하므로 무성해지며 많은 열매를 맺는다.그런 번성은 쉽게 그치지 않고,세월이 간다고 시들지 않는 것이다. 시편 1:1-3의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과도 같이 시냇 가에 심기웠기 때문에 그 나무는 성전에서 부터 흘러 나오는 물을 공급 받아 늘 푸른 나무가 되는 것이다.주님께서는 (요15:16)에서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열매 맺는 생활은 성령님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우리 자신이 자기의 부족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 되고,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 되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눈에 뜨이게된다.그래서 믿음으로 그 풍성한 삶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일 때에 모든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주님께 의논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크고 중한 어려운 문제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자력본위의 삶을 부인하고,주 예수님을 앞 세우고 그 분께 모든 것이 있는 것으로 고백하면서 믿고,도우심을 간구할 때에 시냇 가 심기운 나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강물에는 치료케 하는 능력의 역사가 있다.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된다”했는데 아무리 불행한 가정도,아무리 산산조각이 난 우리의 모습이라도,더 없이 분열된 죄악의 세상에서라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써 성령님의 치료케 하는 능력의 역사로써 나음을 입을 수 있다. 여기에 이 강물이 이제는 바다에 까지 흘러 들어가서 죽음의 바다, 사해라도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는다고 했다.마땅히 사망 밖에는 없는 죽음의 세상에 이 강물이 흘러 갈 때에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다. 고기 잡는 어장이 되기 까지 변해지듯이 아무리 쓸모 없는 사람도 이 성령님의 강물에 접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한 존재로 변화 받는 일이 있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진펄과 개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밀물 때에는 바다요,썰물 때에는 육지인 진펄과 개펄은 세상과 천국,육신생활과 신앙생활의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신앙인인데 이들에게는 소성함이 없다.성령님은 강제하시지 않으신다.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거나,훼방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끝-
이 모든 것을 주시는데, 우리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면 모든 것이 다 가능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중한 책임에 눌려서 용기가 꺾이고,실망을 하는 패배된 삶을 살고 있고,교인으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주저 앉은 침체된 나날이 많습니다. 온갖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도 보지 못한 채, 잔뜩 눌려 있고,영적으로는 메마르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당신은 이런 상태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자신을 돌이켜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왜 믿는 것 같으면서도 체험적이지 못합니까 머리는 꽉 차고 가슴은 텅 비어 있는 상태는 아닙니까 너무도 좌절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하나의 신화거나 혹은 도달하지 못할 환상이란 생각은 안 드는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이 영적 침체의 깊고 중한 병을 진단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인다운 활력있는 생활로 넘쳐야 할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메마른 땅이라 땅은 굳고, 물 한 방울이 귀한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은 바로 생명을 가르치는 것을 그들은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성경 많은 곳에서 물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구원의 샘물”,“마른 땅의 샘물”,“사막의 물 줄기”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습니다.샘이나 시냇가,강,바다,같이 물과 상관된 사건이 많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가지고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셨고,“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셨습니다. 계시록에서도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 부터 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요7:39)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 에스겔에서는 큰 강을 말했는데,하나님이 그 흐르는 강에서 만물이 소성케 된다고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침체된 신앙 형편. 교회도 있고, 교리도 있고, 봉사도 있으나, 신앙생활의 불은 꺼져 있는 상태. 이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47: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그 문 지방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흘러 내리더라’ 강의 원천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좌가 있는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참된 축복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이 흘러 나오는 원천이 주 예수님의 앉으신 보좌로 부터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큰 위로와 확신을 주지 않습니까 승리하신 주님의 보좌로 시작하는 성령님의 흐름입니다.우리는 아직 승리를 못했지만 승리하신 분을 모시고 있고,최후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제 강물의 코스를 살펴보자.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성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곧 희생의 제단을 통해서 흘러 갔다는 것이다.생명을 주는 성령님의 능력이 세상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시기 전에는 성령님이 강림하지 않았다. 성령님이 내게 오신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깨끗이 씻기워 졌기 때문이다.갈보리 후에 오순절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만나지 못하면 성령님이 계심과 능력은 찾을 수 없는 것이다.우리들은 오순절은 기다리지만 갈보리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믿고서 우리는 용서를 받았다. 그 순간에 성령님에 의하여 인치심을 받고,성령님이 우리 영안에 내주하게 된 것이다. 이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면 우리의 모든 소원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우리들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구비해 있고,교회 생활도 많이 했고,영적인 생활의 도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자원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47:3-6)“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다시 일천척을 촉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그가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하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다. 그 성령님이 당신을 어디까지 건너게 하였느냐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성령님의 강물 속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느냐 3절에 보면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까지만 찼다고 한다. 이는 주님의 대속 공로를 인하여 구원을 얻은 기본구원 얻은 신자를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너무도 중대한 사건이요,귀한 일이지만 거기서 머물고 있으면 안된다.더욱 풍성한 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데 겨우 그물의 깊이라야 발목이다. 아직까지 자신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나 있고,성령님 생활이 자기를 지배하는것이 거의 없는 영적으로 유아의 상태이다.
고린도 교회를 육신에 있다고 책망을 했는데 우리는 이 상태에서 벗어났는지,믿는다하나 아직 소망은 육신적이요,세상적이요,정욕적인 신앙의 상태이다.이기적이고,다른 사람을 생각지 않고,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밥을 씹어서 숟가락으로 입속에 떠 먹여 줘야 하는 ‘젖’을 먹는 영적 생활로 간신히 지탱해 나가는 사람이다.몇 십년 신앙생활을 해도 성직을 맡았다고 해도 이런 사람이 없는 것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 사람도 그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구주를 위해서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고,세상의 수준에서 머물며 살았다.걸핏하면 마음을 상해 하찮은 일에 신경을 곤두 세웠고,세상 사람에게도 빛과 소금의 직무를 다 하기는 커녕 오히려 냄새를 피우고 연기만 내는 한심스런 꼴을 하는 교인이었다.우리에게는 이런 것이 없는지, 나는 이 말씀과는 상관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이런 상태에 있는 부분이 많든지 적든지 누구에게나 이런 요소가 있다.이를 회개해야 한다. 이기심으로만 가득하고 서로 헐 뜯고,잘되는 사람을 보면 시기심이 발동하는 이런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사랑이 없고,성령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가 이런 교회이다.우리들이 생수의 강에서 겨우 발목까지 밖에 안 들어가 있으면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신에 자신의 죄 많은 본성 외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성령님으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육에 속한 신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연인이 구원을 받게 되고 자동적으로 육신의 사람이 성령님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은 아니다. 처음 믿을 때에 그 기쁨과 평안과 위로를 오늘에도 간직하고 유지하고 있느냐 그 후 주님은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따라 우리를 주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그렇게 되었느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는 못하고 심한 좌절과 회의와 실패의 생활로 계속되고 있고,외형적인 신앙의 행위는 껍데기로 바르는 것이 있는 정도이다.자기를 살펴서 영적으로 병든 자신임을 바로 알지 않으면 치료 받을 길 없이 그저 자신을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이는 일이 되는것이다. 환자가 아픈 곳을 느낄 때에는 그래도 살 희망이라도 있는 것이다. 당신은 영에 속한 사람인데 지금 육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다시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이 무릎은 기도의 생활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하는 것은 축복의 물결이 높아진다는 표시이다. 나는 전과 같이는 도무지 살 수 없음을 깨닫고,하나님의 생명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는 축복을 받으려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였기 때문에 이제 형을 두려워 하여 외 삼촌 집으로 가는 길에 광야에 돌로 벼개를 하면서 자는 가운데 환상을 보게 되었다.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땅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보여 주시면서 그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위로해 주셨다.그는 하나님과 흥정을 한다.자기를 집까지 무사히 이끌어 보호해 주시면 십일조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20여년을 살면서 하나님과 그 약속을 잊었고, 육신의 생활에만 정신이 없었다.그가 자신을 발견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자신을 속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고,이제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하겠는데, 자기의 형인 에서가 군사 400여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서 그는 얍복 강가에서 기도하게된다.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게 되는데 그사람은 다름 아닌 20년 전에 자기가 만났던 주님이었다.주님은 안심하고 건너가라 하시는데 야곱은 당신이 축복을 하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고 물고 늘어진다. 이것은 이전 같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요, 그리스도인의 저급한 생활에서 살 수가 없다느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의 꾀로서 남을 속여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 했으나 이제는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다.우리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한다.이전에는 내가 육신으로 내 꾀로 살았고,육신이 만족되면 다 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주님의 축복이아니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갈 수 없다.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고,나는 겁장이라서 도무지 나 혼자서는 안 됩니다, 주여 도우소서! 하는 간구가 필요하지 않느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님이 야곱의 이름을 모르실 리 없는데 물으실때에 “죄송합니다.주님이 내게 이제껏 오래 참으시면서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선하심과 신실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나 나는 아직 야곱입니다”라는 고백을 하였다. “네가 이제는 네이름을 야곱이라 하지 않겠다 이스라엘이라 하리라.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받은 자녀라 하리라”. 마치 시몬에게 네가 베드로라 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개명해 주신 것이다.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사로 잡으신 후에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시켜서 바울을 만나도록 했을 때에 그는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으로 알았기에 두려워 했다.그러나 하나님은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하셨다. 바리새인 이었던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 회개하는 심정으로 무릎을 꿇게 된 것을 말한다. “보라 그가 이것 저것을 말한다”거나 “보라 그가 큰 체험을 하고 큰 일을 하고 있다”말씀하지 않으시고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하셨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하고 찾는 것이 상한 심령이다.오늘날 교회에 하나님을 애타게 찾으며,구원을 간구하는 심령이 얼마나 되느냐 우리는 너무 과거에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과거에 나는 이러이러 했다.이런 역사를 이루었다. 그것도 귀한 일이나 오늘에 그가 어떤 상태의 신앙상태인가 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우리는 과거에 처음 믿을 때에 하나님을 영접한 것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일단 하나님을 발견 했으면 다시 그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거짓된 논리에 속고 살기 쉽다. 이는 정통신앙을 끝내는 위험한 생각이다. 여러분이여 당신들의 무릎이 찰 때까지 강물로 내려 가야한다. 주께서 당신을 건너게 했느냐 이제 (47:4)을 보자. “.나로 물을 건너게하시니 물이 허리에 흐르고”이것은 능력의 모습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것은 능력의 모습이다.강물로 더 깊이 내려가야 한다.그 때에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40“31)’. 여기에 능력의 발견이 있다.성령님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 위에 지워지는 모든 짐들을 질 수 있다. 승리는 나의 능력과 투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요,세상의 전투력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오직 막강하신 군대 사령관이신 그분의 능력과 지혜로서만 승리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싸움을 모르는 사람이요,왜 싸워야 하는지 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내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인데 이 원수를 이기는 것도,이 구원의 남은 여정을 걸어가는 것도 주의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을 건너게 하셨는가 (47:5)을 보면”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본문의 주인공은 이제 깊은 강물에서 헤엄을 친다. 사람이 수영을 할 때에는 머리만 보이고,몸은 안 보이게 된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자아가 완전히 물속에 잠겨야만 머리되신 그리스도만 보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의 원천에서 얼마나 깊이 잠겼고,얼마나 깊은 하나님의 축복의 강에 잠겨 있느냐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완전히 나의 생애를 주님께 맡기고, 그의 충만을 나의 것으로 받아 누리는, 깊은 강에 잠겨 사는 것이 우리가 능력을 받아 사는 것이요, 이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인데,얼마나 우리는 깊이 잠겨 있느냐 자신의 상태를 봐야 하지 않느냐 발목까지 물이 차 있느냐,무릎까지 차 있느냐,혹은 허리까지 차 있느냐,아니면 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충만하여 영광된 체험 속에는 헤엄치고 있느냐
이 강물의 효과에 대하여 6절-12절 까지 기록했다. 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역사는 어떤 것인가 “강 좌우에는 각종 먹을 실과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않으며,실과가 끊이지 않고,날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강이 흘러 나가서 강둑에서 식물이 자라게 되었다.나무들의 뿌리가 강 바닥 아래까지 뻗어서 양분을 흡수하므로 무성해지며 많은 열매를 맺는다.그런 번성은 쉽게 그치지 않고,세월이 간다고 시들지 않는 것이다. 시편 1:1-3의 복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과도 같이 시냇 가에 심기웠기 때문에 그 나무는 성전에서 부터 흘러 나오는 물을 공급 받아 늘 푸른 나무가 되는 것이다.주님께서는 (요15:16)에서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열매 맺는 생활은 성령님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우리 자신이 자기의 부족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그러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 되고,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 되는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눈에 뜨이게된다.그래서 믿음으로 그 풍성한 삶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일 때에 모든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주님께 의논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은 아무리 크고 중한 어려운 문제에서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자력본위의 삶을 부인하고,주 예수님을 앞 세우고 그 분께 모든 것이 있는 것으로 고백하면서 믿고,도우심을 간구할 때에 시냇 가 심기운 나무와 같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의 강물에는 치료케 하는 능력의 역사가 있다.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된다”했는데 아무리 불행한 가정도,아무리 산산조각이 난 우리의 모습이라도,더 없이 분열된 죄악의 세상에서라도 주님의 구원의 은혜로써 성령님의 치료케 하는 능력의 역사로써 나음을 입을 수 있다. 여기에 이 강물이 이제는 바다에 까지 흘러 들어가서 죽음의 바다, 사해라도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는다고 했다.마땅히 사망 밖에는 없는 죽음의 세상에 이 강물이 흘러 갈 때에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다. 고기 잡는 어장이 되기 까지 변해지듯이 아무리 쓸모 없는 사람도 이 성령님의 강물에 접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귀한 존재로 변화 받는 일이 있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진펄과 개펄은 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다.밀물 때에는 바다요,썰물 때에는 육지인 진펄과 개펄은 세상과 천국,육신생활과 신앙생활의 양다리를 걸치는 거짓 신앙인인데 이들에게는 소성함이 없다.성령님은 강제하시지 않으신다.성령님의 역사를 거부하거나,훼방하는 자에게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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