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과 구원 (창7:13-24)
본문
노아 홍수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은 노아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이라고 정확한 날짜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 믿어 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행하신 심판의 사건을 기록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안 믿을 사람들은 아무리 정확한 근거를 제시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을 사람은 간단하게 말해도 열린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종말과 심판의 사건을 유의해서 살펴야 하는 이유는 그 종말과 심판의 사건이 그 시대 그 사람에게만 있었던 과거 사건이 아니라 다가올 나의 심판이 되는 날을 예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7)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우리가 노아의 때와 롯의 처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시대와 그들에 대한 심판과 구원이 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표이며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금년에는 전세계적으로 홍수 피해가 그 어떤 해보다도 컸던 해였습니다. 우리 나라도 물난리로 인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중국의 경우는 더 심했습니다. 양쯔강이 범람함으로 수만 명이 죽고 많은 농지가 유실되었습니다. 당시에 보도를 보니까 중국은 홍수와의 전쟁 을 선포했습니다. 대규모로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댐을 미리 폭파하기도 했습니다. 홍수가 끝났을 때 중국에서는 홍수와의 싸움을 항홍, 승홍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항홍(抗洪)은 홍수와 맞붙어 싸웠다는 말이고, 승홍(勝洪)은 결국 이겼다는 말입니다. 정말로 중국인들의 저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홍수 예방을 방지하기 위하여 동원된 병사들에게 여인들이 젖을 짜서 먹이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항홍, 승홍 을 외쳤지만 진정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저들이 막을 수 있을 만큼, 힘써서 노력하고 대처할 수 있을 만큼만 비가 왔을 뿐입니다. 홍수를 보면서 우리는 노아 홍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날에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에 대하여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년 겪는 홍수지만 아직까지 저는 그렇게 큰 물난리는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죽을 뻔했던 적은 있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한 가운데로 들어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싫어도 서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요
1. 심판의 방법 “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12) 심판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1 깊음의 샘이 터쳤습니다.
2 하늘의 창들이 열렸습니다.
3 40주야를 쉬지 않고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이렇듯 비가 쏟아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7:17-20)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쉬지 않고 비가 쏟아진 결과 이 땅에서는 가장 높은 산도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150일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 모든 동물, 육지에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들이 다 죽었습니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7:21-22) 저는 노아 홍수에 관한 말씀을 듣고 또 설교했어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여름에 보았던 생명수 라는 단편 영화를 통해 좀더 사실적으로 노아 홍수를 느껴 보았습니다. 남자 스트립 댄서가 옷을 다 벗고 벌거벗은 몸으로 커다란 수족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 안에는 물이 차오기 시작했습니다. 밖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연주되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술과 식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물은 점점 늘어나 허리로 가슴으로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목까지 차올라 나중에는 머리 부분만 겨우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계속 늘어나 남자는 발버둥치며 목을 뒤로 젖히며 코로 겨우 헐떡이며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족관 안에는 가득 찼습니다. 그 안에서 남자는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족관을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그는 숨이 막혀 질식하여 익사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음악은 계속 연주되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술과 식사를 하며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 여자가 어느 정도 선에서 그런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죽어가는 장면을 즐기는 곳임을 깨닫고 그만 중지하라고 소리쳤으나 주위에는 그녀를 만류합니다. 재미있는데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여자는 그 만류를 뿌리치고 겨우 주위에 있던 병을 수족관에 던졌습니다. 쨍그랑! 수족관이 깨지면서 물은 사방으로 흘러가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남자는 축 처진 몸으로 쓰러져 있습니다. 그 때 자막이 나오는데 제목이 생명수 입니다. 왜 영화의 제목이 생명수 여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노아 홍수를 아주 작고 짧게 압축해 놓은 것이 그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이 불어날수록 사람들과 동물들은 살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낮은 곳의 사람들이 급류에 휩쓸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공포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제발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억수처럼 계속 쏟아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은 이 땅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비는 계속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산의 정상에 겨우 섰는데 물은 계속 차오릅니다. 발목을 오르고 무릎, 허리, 가슴 나중에는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결국 머리도 물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온몸은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정신은 혼미해져 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그 한 사람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방주를 짓던 노아를 비난했던 사실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뼈저린 후회를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상태로 150일을 있었습니다. 코로 호흡하던 모든 생명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2. 심판 가운데 구원 이렇듯 세상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 모든 생명체가 다 죽었습니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1-23)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짐승들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창7:9)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창7:15) 짐승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노아는 짐승들을 좇아 다니며 잡아다가 방주 안에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짐승들이 자기 발로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한 쌍씩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노아의 노력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발로 찾아와 방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본인이 알든 모르든, 본인이 인정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주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은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방주 밖에 있는 짐승과 사람들은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지만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은 하나도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3) 모든 사람의 구원은 심판 가운데서의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벗어난 자들은 다 죽었지만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다 살았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12:29-30) 그러나 이 재앙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누굽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집들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감으로 모두 살았습니다. 우리의 심판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판 대상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모든 사람은 다 육신으로 죽고 영으로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죄값으로 죽고 심판받아 지옥가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 가운데 구원받는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 구원은 심판 가운데 구원입니다. 그리고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펼쳐집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이, 누구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어떻게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1 완전한 심판-‘다 죽었더라’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7:17-20)
2 구원-남았더라 “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3)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받는 불구덩이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받은 날과 롯이 구원받은 날은 한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째 날 일곱 바퀴 돌고 소리질러 외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수6:21-24) 그 날에 여리고 성안에 있던 남녀노소 모든 사람과 모든 짐승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기생 라합의 부모와 형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살리고 심판의 날에 구원의 붉은 줄을 그 집에 걸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때에 그 집은 넘어갔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심판날과 기생 라합의 가정이 구원받은 날이 한 날이었습니다. 인간은 물아래에 있으면 죽지만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구원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노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물로 인하여 다 죽었지만 노아가 탄 방주는 그 물로 인하여 떠올랐습니다. 만일 홍수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방주는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산위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배는 바다에 떠다니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그러나 바닷가에서 방주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는 바다에 뜰 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하여 뜰 배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그를 놀렸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노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심판날 노아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물속에서 아우성을 쳤지만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서로가 만나지만 그 결과는 이렇듯 사뭇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적 시간이면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각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말의 날에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둘로 나눠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40-43) 부자와 나사로가 다같이 죽었지만 부자는 죽어 음부에 갔고,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똑같이 죽지만 가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1. 심판의 방법 “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7:11-12) 심판의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1 깊음의 샘이 터쳤습니다.
2 하늘의 창들이 열렸습니다.
3 40주야를 쉬지 않고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이렇듯 비가 쏟아진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7:17-20)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쉬지 않고 비가 쏟아진 결과 이 땅에서는 가장 높은 산도 물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150일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 모든 동물, 육지에 코로 호흡하는 모든 생물들이 다 죽었습니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창7:21-22) 저는 노아 홍수에 관한 말씀을 듣고 또 설교했어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해 여름에 보았던 생명수 라는 단편 영화를 통해 좀더 사실적으로 노아 홍수를 느껴 보았습니다. 남자 스트립 댄서가 옷을 다 벗고 벌거벗은 몸으로 커다란 수족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 안에는 물이 차오기 시작했습니다. 밖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연주되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술과 식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물은 점점 늘어나 허리로 가슴으로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목까지 차올라 나중에는 머리 부분만 겨우 남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계속 늘어나 남자는 발버둥치며 목을 뒤로 젖히며 코로 겨우 헐떡이며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수족관 안에는 가득 찼습니다. 그 안에서 남자는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족관을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그는 숨이 막혀 질식하여 익사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음악은 계속 연주되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술과 식사를 하며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 여자가 어느 정도 선에서 그런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완전히 죽어가는 장면을 즐기는 곳임을 깨닫고 그만 중지하라고 소리쳤으나 주위에는 그녀를 만류합니다. 재미있는데 왜 그러느냐는 것입니다. 여자는 그 만류를 뿌리치고 겨우 주위에 있던 병을 수족관에 던졌습니다. 쨍그랑! 수족관이 깨지면서 물은 사방으로 흘러가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남자는 축 처진 몸으로 쓰러져 있습니다. 그 때 자막이 나오는데 제목이 생명수 입니다. 왜 영화의 제목이 생명수 여야 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노아 홍수를 아주 작고 짧게 압축해 놓은 것이 그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이 불어날수록 사람들과 동물들은 살기 위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낮은 곳의 사람들이 급류에 휩쓸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공포감에 떨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제발 비가 그치기를 간절히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가 억수처럼 계속 쏟아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주 적은 수의 사람은 이 땅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비는 계속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산의 정상에 겨우 섰는데 물은 계속 차오릅니다. 발목을 오르고 무릎, 허리, 가슴 나중에는 목까지 차올랐습니다. 결국 머리도 물속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온몸은 점점 힘이 빠져 갑니다. 정신은 혼미해져 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그 한 사람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방주를 짓던 노아를 비난했던 사실을 후회했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뼈저린 후회를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상태로 150일을 있었습니다. 코로 호흡하던 모든 생명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2. 심판 가운데 구원 이렇듯 세상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1 모든 생명체가 다 죽었습니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1-23)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습니다.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습니다.
짐승들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창7:9) “무릇 기식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창7:15) 짐승들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 게 상식입니다. 노아는 짐승들을 좇아 다니며 잡아다가 방주 안에 집어넣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자 짐승들이 자기 발로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한 쌍씩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짐승들은 하나님의 노아의 노력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기 발로 찾아와 방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받은 자는 본인이 알든 모르든, 본인이 인정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부르셔서 주님 앞에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얻은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방주 밖에 있는 짐승과 사람들은 홍수로 인하여 다 죽었지만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은 하나도 죽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3) 모든 사람의 구원은 심판 가운데서의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살펴 보십시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벗어난 자들은 다 죽었지만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은 다 살았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출12:29-30) 그러나 이 재앙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누굽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른 집들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감으로 모두 살았습니다. 우리의 심판도 동일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판 대상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모든 사람은 다 육신으로 죽고 영으로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죄값으로 죽고 심판받아 지옥가야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 가운데 구원받는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3.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 구원은 심판 가운데 구원입니다. 그리고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펼쳐집니다. 누구에게는 심판이, 누구에게는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어떻게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1 완전한 심판-‘다 죽었더라’ “홍수가 땅에 사십 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 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창7:17-20)
2 구원-남았더라 “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3)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불과 유황으로 멸망받는 불구덩이 속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받은 날과 롯이 구원받은 날은 한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째 날 일곱 바퀴 돌고 소리질러 외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수6:21-24) 그 날에 여리고 성안에 있던 남녀노소 모든 사람과 모든 짐승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기생 라합의 부모와 형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살리고 심판의 날에 구원의 붉은 줄을 그 집에 걸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들을 죽일 때에 그 집은 넘어갔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심판날과 기생 라합의 가정이 구원받은 날이 한 날이었습니다. 인간은 물아래에 있으면 죽지만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죽게 됩니다. 구원은 마치 이와 같습니다. 노아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물로 인하여 다 죽었지만 노아가 탄 방주는 그 물로 인하여 떠올랐습니다. 만일 홍수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방주는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는 산위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배는 바다에 떠다니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무시하고 산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얼마나 비웃었을까요 그러나 바닷가에서 방주를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방주는 바다에 뜰 배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하여 뜰 배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 그를 놀렸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던 노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심판날 노아를 비웃었던 사람들은 물속에서 아우성을 쳤지만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것입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일을 서로가 만나지만 그 결과는 이렇듯 사뭇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적 시간이면서 전혀 다른 내용으로 각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종말의 날에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둘로 나눠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40-43) 부자와 나사로가 다같이 죽었지만 부자는 죽어 음부에 갔고, 나사로는 낙원으로 갔습니다.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똑같이 죽지만 가는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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