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 (창8:20-22)
본문
노아 방주와 홍수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이 부정한 동물들도 정결한 동물들과 더불어 함께 방주에 들어가게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토끼와 양과 같은 유순한 동물들은 더 많이 방주에 들어가게 하고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나 사악한 뱀 등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너나 할것없이 인간이면 누구나 다 가지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자신의 실존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소치입니다. 우리는 TV나 신문을 볼 때마다 매일같이 끔찍한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 안 데려가시고 뭐하시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까 지난 달 23일에 경남 김해시에서 실종된 양정규 군의 유괴범 용의자를 붙잡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자신에게도 자식이 있을 터인데 나이 어린 학생을 인질로 하여 금품을 뜯어내려 하는 이런 사람들은 정말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노아 홍수 때처럼 또 다시 그런 흉측하고 잔인한 인간들을 쓸어버리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악한 인간들을 다 청소하고 나면 이 땅은 참으로 살 만한 세상이 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면 노아 홍수 때는 방주 안에 들어간 여덟 명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었는데 왜 그 이후에도 아름다운 세상은 이루어지지 못했을까요 인간은 아무리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개선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항상 악할 뿐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방어적입니다.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는 냉철하지만 본인에게 있어서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는 서슴없이 비판과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이 방주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큰 불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차이가 왜 생겨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나는 훌륭한 사람은 아니어도 쓸 만한 인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릅니다. 착각은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동물로 말하면 우리는 정결한 짐승에 속하여 방주에 들어갔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전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인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방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우리는 잘나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못나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잘나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못났는데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잘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듯이 못남 역시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나는 정결한 짐승에 속한 사람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못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늘어놓게 만드는 것입니다.
1. 노아가 여호를 위하여 단을 쌓고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8:20)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한 일이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1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을 보면 방주가 시작된 날이 노아 육백세 되던 해 2월 17일이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홍수 사건을 겪고 방주에서 나온 날은 언제입니까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 칠일에 땅이 말랐더라”(창8:13-14) 육백일년 1월 1일에 물이 걷히고 2월 27일에 땅이 말라서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장장 1년 10일 즉, 375일을 방주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방주에 일년 넘게 있었던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이나 공간 안에 갇혔다가 나오면 대개 육신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남자들은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는 날에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술집으로 갑니다. 감옥에서 몇 년을 살고 나온 친구를 동료들이 데리고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술집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대학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어디를 제일 먼저 갔겠습니까 영화관, 호프집으로 갔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일년을 방주 안에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내 육신의 욕구들은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습니까 드디어 방주 뚜껑이 열리는 날 뛰쳐나와 육신의 욕망을 발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방주에 갇혀 자유를 구속받고 제한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 또한 저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고 구원받았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배는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행위였습니다.
2 제물은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골랐습니다. 노아의 제사는 형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제물을 선택할 때 정결한 짐승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제물을 말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노아가 드린 가장 좋은 제물은 겉보기에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릴 때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둘째, 정결과 부정은 그 제물 이전에 그 사람 내면의 신앙에 있다는 점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물은 신앙에 대한 투영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물이 정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물 자체의 정결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제물을 드릴 때 그 가슴에 품었던 믿음, 그 믿음의 대상이 정결했을 뿐입니다.
3 번제로 단에 드렸습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과 새를 골라 번제단에서 불태워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재가 되도록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완전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2.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8:21)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없는 정결한 짐승의 향기만을 흠향하십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부정한 짐승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어 봅시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무엇입니까 노아가 드린 제물 자체가 정결해서 받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 정결한 짐승이 정말로 정결한 그 누군가를 예표하고 있기에 받으신 것입니까 제물의 부정함과 정결함은 그 짐승의 종류나 상태에 있지 않고 그 상징성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정결한 제물이 없고, 정결한 인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어떻습니까 “.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 ”(창8:21)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즉각적인 심판을 받습니다. 사무엘상 6장을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자 오만 칠십 인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6장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소들이 뜀으로 법궤가 떨어지려 할 때에 웃사가 떨어질까봐 법궤를 붙들었는데 오히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에 벌어지는 심판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제사에서 필요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성전, 제물,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세 가지가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으신 뒤에는 제사장으로 나타납니다.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던 것은 오직 인간의 역사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그 상태밖에 없습니다.
3.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노아의 제사 가운데 쉽게 이해가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들이 부정한 인간을 상징한다면 방주에서 나온 뒤에도 부정한 동물이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동물은 살고 오히려 정결한 동물이 죽었습니다. 홍수 이전의 인간이나 이후 인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요 한계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못받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부정한 짐승들을 대신하여 희생당한 정결한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정결한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부정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 속의 노아 자신도 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왜 구원받았습니까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니요! 자신이 제사할 때 드렸던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결한 짐승은 노아가 지은 방주 안에 들어가 생명을 보존했던 동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아가 그 짐승의 희생 때문에 살았다는 그런 논리가 가능합니까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죄인입니다. 그녀가 누구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이 들어와 홍수 때에 자기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노아가 살고 구원받은 것은 방주에서 나온 뒤에 제물로 드려진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정결한 짐승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인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하나의 도식이 있습니다. 바로 죄와 심판과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지만 표를 주사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이 도식이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시지만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는 어려서부터 항상 악함을 아셨습니다.(창6:5) 죄인인지라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죄를 짓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노아 홍수 때처럼 모든 생물을 심판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 곧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을 종말 때까지 보존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이후 이 땅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노아가 드린 제사 때문이 아닙니다. 짐승의 희생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제사와 그 희생이 의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후손으로서 인류 가운데 이 은혜와 이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 때문이라면 말이 안됩니다. 노아가 뭔데 하나님이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까 노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라는 말은 내 쪽에서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는 절망적인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어떤 세상입니까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평범한 세상처럼 보여도 역시 예수님을 못박은 세상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입니다. 거기에 노아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은혜입지 않은 세상과 사람은 다 망한다는 말입니다. 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가 할 일은 방주를 만드는 일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방주 속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노아언약이 보여주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정결한 짐승의 피의 향기만을 흠향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으로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있다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노아 홍수 때는 방주 안에 들어간 여덟 명만 살고 나머지는 다 죽었는데 왜 그 이후에도 아름다운 세상은 이루어지지 못했을까요 인간은 아무리 세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도 개선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모두가 항상 악할 뿐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이며 방어적입니다.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하여는 냉철하지만 본인에게 있어서는 관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잘못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하여는 서슴없이 비판과 공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부정한 동물이 방주 안에 있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큰 불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차이가 왜 생겨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나는 훌륭한 사람은 아니어도 쓸 만한 인간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릅니다. 착각은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동물로 말하면 우리는 정결한 짐승에 속하여 방주에 들어갔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전혀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인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방주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우리는 잘나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못나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잘나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못났는데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잘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듯이 못남 역시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나는 정결한 짐승에 속한 사람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못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항상 불만을 늘어놓게 만드는 것입니다.
1. 노아가 여호를 위하여 단을 쌓고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창8:20)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한 일이 무엇인가 살펴봅시다.
1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7장 11절을 보면 방주가 시작된 날이 노아 육백세 되던 해 2월 17일이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홍수 사건을 겪고 방주에서 나온 날은 언제입니까 “육백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 물이 걷혔더니 이월 이십 칠일에 땅이 말랐더라”(창8:13-14) 육백일년 1월 1일에 물이 걷히고 2월 27일에 땅이 말라서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장장 1년 10일 즉, 375일을 방주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방주에 일년 넘게 있었던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이나 공간 안에 갇혔다가 나오면 대개 육신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남자들은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는 날에는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술집으로 갑니다. 감옥에서 몇 년을 살고 나온 친구를 동료들이 데리고 제일 먼저 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술집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대학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시험을 마친 학생들이 어디를 제일 먼저 갔겠습니까 영화관, 호프집으로 갔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일년을 방주 안에 갇혀 있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내 육신의 욕구들은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습니까 드디어 방주 뚜껑이 열리는 날 뛰쳐나와 육신의 욕망을 발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방주에 갇혀 자유를 구속받고 제한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 또한 저 방주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죽어 마땅한데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받고 구원받았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배는 너무나 당연하고 마땅한 행위였습니다.
2 제물은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골랐습니다. 노아의 제사는 형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제물을 선택할 때 정결한 짐승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제물을 말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노아가 드린 가장 좋은 제물은 겉보기에 좋은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물을 드릴 때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부정한 제물은 받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둘째, 정결과 부정은 그 제물 이전에 그 사람 내면의 신앙에 있다는 점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물은 신앙에 대한 투영입니다. 노아가 드린 제물이 정결할 수 있었던 것은 제물 자체의 정결함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제물을 드릴 때 그 가슴에 품었던 믿음, 그 믿음의 대상이 정결했을 뿐입니다.
3 번제로 단에 드렸습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과 새를 골라 번제단에서 불태워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재가 되도록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완전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2.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8:21)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없는 정결한 짐승의 향기만을 흠향하십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부정한 짐승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어 봅시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구별은 무엇입니까 노아가 드린 제물 자체가 정결해서 받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그 정결한 짐승이 정말로 정결한 그 누군가를 예표하고 있기에 받으신 것입니까 제물의 부정함과 정결함은 그 짐승의 종류나 상태에 있지 않고 그 상징성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정결한 제물이 없고, 정결한 인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죄가 전혀 없는 분입니다. 이에 비하여 인간은 어떻습니까 “.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 ”(창8:21)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상대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즉각적인 심판을 받습니다. 사무엘상 6장을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자 오만 칠십 인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6장을 보면 이런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소들이 뜀으로 법궤가 떨어지려 할 때에 웃사가 떨어질까봐 법궤를 붙들었는데 오히려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에 벌어지는 심판의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받아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제사에서 필요한 것이 세 가지입니다. 성전, 제물, 제사장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세 가지가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자기의 육체를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는 희생제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으신 뒤에는 제사장으로 나타납니다. 성전과 제물과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했던 것은 오직 인간의 역사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그 상태밖에 없습니다.
3.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노아의 제사 가운데 쉽게 이해가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정한 동물들이 부정한 인간을 상징한다면 방주에서 나온 뒤에도 부정한 동물이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동물은 살고 오히려 정결한 동물이 죽었습니다. 홍수 이전의 인간이나 이후 인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요 한계입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못받고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부정한 짐승들을 대신하여 희생당한 정결한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정결한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부정한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본문 속의 노아 자신도 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살았습니다. 구원받았습니다. 왜 구원받았습니까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입니까 아니요! 자신이 제사할 때 드렸던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그 정결한 짐승은 노아가 지은 방주 안에 들어가 생명을 보존했던 동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노아가 그 짐승의 희생 때문에 살았다는 그런 논리가 가능합니까 이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죄인입니다. 그녀가 누구 때문에 구원받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이 들어와 홍수 때에 자기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노아가 살고 구원받은 것은 방주에서 나온 뒤에 제물로 드려진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정결한 짐승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인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하나의 도식이 있습니다. 바로 죄와 심판과 은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지만 표를 주사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이 도식이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시지만 희생제물을 받으시고 다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1-22)1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는 어려서부터 항상 악함을 아셨습니다.(창6:5) 죄인인지라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죄를 짓더라도 그 일로 인하여 노아 홍수 때처럼 모든 생물을 심판하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은혜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 곧 앞으로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을 종말 때까지 보존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이후 이 땅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는 일이 없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희생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면 노아가 드린 제사 때문이 아닙니다. 짐승의 희생 때문이 아닙니다. 그 제사와 그 희생이 의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후손으로서 인류 가운데 이 은혜와 이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 때문이라면 말이 안됩니다. 노아가 뭔데 하나님이 이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합니까 노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할 때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라는 말은 내 쪽에서 착하게 살았기 때문에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나는 절망적인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어떤 세상입니까 아무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평범한 세상처럼 보여도 역시 예수님을 못박은 세상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악이 관영한 세상입니다. 거기에 노아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다는 말은 은혜입지 않은 세상과 사람은 다 망한다는 말입니다. 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이 노아 언약입니다. 노아가 할 일은 방주를 만드는 일이었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방주 속에 있는 정결한 짐승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무지개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이것이 노아언약이 보여주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정결한 짐승의 피의 향기만을 흠향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으로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있다는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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