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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라 (창9:20-27)

본문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자기의 공로나 행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위인들을 영웅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부족하여 그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여도 성경속의 인물들 뒤에 숨어 하나님을 대면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정도 하면 완전하지는 못해도 구원의 조건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노아와 욥과 같은 이를 의인이라고 말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창6:9)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했습니다.(욥1:1) 사람들이 노아와 욥 등을 의인화하며 영웅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만한 인물은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노아와 욥을 뒤에서 밀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해도 이렇게까지 산 사람은 구원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욥이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의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별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 하려는 시도를 성경은 전적으로 부인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다고 했습니다.(욥25:5) 신앙은 사람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본문은 노아의 잘못을 놓고 그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을 높이는 이유는 신앙의 위인들을 말할 때 언제나 그 사람의 최고 신앙경지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노아를 말할 때 비웃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120년간 방주를 지은 인내를 언급합니다. 아브라함을 말할 때는 독자 이삭까지 바치는 헌신을 떠올립니다. 다윗을 말할 때는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 다니는 사울 왕을 용서하는 마음의 이야기합니다. 다니엘을 말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 사자굴에 들어간 때를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높이지만 그 무의식 속에는 스스로의 행위도 자랑하는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같은 인간의 시도를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듯 인간이 자신에 관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정해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노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노아를 영웅시 할 때 우리는 본문에 와서는 말문이 막혀 버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추앙하는 노아가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당혹감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포도농사를 지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고 자신의 장막 안에 누웠습니다. 둘째 아들 함이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보았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형과 동생을 찾아 아버지의 망령된 행동을 고해 바쳤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접한 셈과 야벳은 재빨리 장막으로 달려가 옷을 취하여 뒷걸음질을 쳐서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 드렸습니다. 술이 깬 뒤에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은 노아는 자신을 비방한 함을 저주하고 수치를 덮어 준 셈과 야벳은 축복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웅 노아가 대낮에 술 취하여 장막 안에 벌거벗고 누운 것만으로도 큰 실수인데 어떻게 자신의 잘못은 제껴두고 아들을 향해 저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따지지만 본문이 가장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노아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시대였습니다.(창6:5) 생각이 악하면 행동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창6:11-12)노아는 이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홍수를 통해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그 시대 사람들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전폭적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노아가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 시대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하나님은 그 시대 가운데 노아의 가정만큼은 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노아와 그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지 구원받을 만한 특별한 일을 해서 구원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달라지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면 언젠가는 반드시 크게 실망할 때가 찾아옵니다. 인생을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사람에게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남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이승만 정권 때 야당이 내걸었던 선거표어가 무엇이었습니까 못살겠다 갈아보자! 였습니다. 그때 여당에서는 뭐라고 대응했습니까 갈아봤자 소용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흘러온 역사를 볼 때 대통령 바뀌었지만 나아진 것이 뭐가 있습니까 구관이 명관도 아니었지만 바뀐 사람도 그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는 게 좋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기대나 소망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신앙의 거장들에게 실수나 잘못을 허락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처음부터 끝까지 쓸모없는 절망적인 존재인가를 알고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대가 없어야 실망도 없습니다. 오직 성도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잘못을 통해 나의 잘못을 보아야 합니다. 노아의 연약함을 통해 나의 연약함을 보아야 합니다.
2.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고(창9:25)
노아와 함을 놓고 잘잘못을 따지자면 노아가 먼저 잘못했습니다. 노아가 함보다 더 크게 잘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먼저 인정하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런데 노아는 용서를 빌기는커녕 함을 저주함으로 우리를 더욱 실망시켜 버렸습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9:25) 노아가 아들 함에게 얼마나 엄청난 저주를 퍼부었는지 보십시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비천한 자’입니다. 가나안이 누구입니까 18절에서 그는 함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잘못은 아버지 함이 범하고 저주는 아들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저주는 가나안에 대한 저주로 끝나지 않고 아버지 함에 대한 저주이기도 했습니다. 자식이 저주받는데 기분좋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저주는 함의 아버지인 노아 자신에 대한 저주이기도 합니다. 함이 받은 저주의 형태를 잘 살펴 보십시오.
1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대를 물리는 저주입니다.
2 그 형제들의 종들의 종이 되는 저주입니다. 형제들의 종만 되어도 비참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은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가나안이 셈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25,26,27절에 걸쳐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저주는 노아, 함, 가나안, 그의 후손, 셈과 야벳 모두에게 내린 저주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대적하는 모든 인간에게 내린 영원한 심판의 저주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너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은 그들이 어떻게 행하든 관계없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저주를 받고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본 모습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4-5)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후손들에게 이어집니다. 다시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서 그 저주가 후대 자손 대대로 물려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을 향한 저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회복되지 않은 인간의 처참함, 참담성, 저주의 영원성을 깨닫게 됩니다.
3.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9:26)
본문에서 가지는 두 번째 궁금증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드리는 선한 행동을 셈과 야벳이 했는데 하나님은 이들을 높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해서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찬송과 영광을 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잘했든 잘못했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잘하게 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지 잘한 인간이 높임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경우든 인간의 행위를 찬송하면 그것은 가장 크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셈과 야벳에게 아버지에 관한 소식을 들을 때 그 수치를 소문내지 않고 덮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창9:27) 야벳을 창대케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를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았을 뿐입니다. 셈과 야벳도 함도 다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 줄 수 있었고, 축복의 장중에 들어올 수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은 영웅을 거부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에게 여러 가지 흠이 있는 이유는 사람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임을 알게 하사 오직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노아 시대를 방불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다르거나 나은 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뿐입니다. 그래서 입술을 가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할 뿐입니다. 오늘 내가 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은혜입니다. 내 공로는 없습니다. 내 자랑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없듯 다른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있습니다. 나에게, 그리고 여러분에게 오직 한분 그분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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