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바벨탑 (창11:1-9)
본문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이 땅에 번성해 갈 때 세상에는 구음과 언어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들은 거처를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토착적인 땅의 시대를 열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높은 탑을 쌓게 됩니다. 그 탑은 후에 이름 붙여지기를 바벨이라 했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쌓은 행위는 니므롯의 연장선상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영웅을 기리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는 목적은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힘의 집결에 의하여 땅위에서의 팽창과 복의 창출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은혜의 땅에서 그 땅의 속성과 배치되는 일이기에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들의 뜻을 부정하셨습니다.
1. 인간의 계획 인간이 하는 일은 그 일을 하는 행위보다는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도 악하지만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은 피조물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그 행위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을 만든 동기와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창11:4-5) 사람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아 홍수 심판의 당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로부터 노아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었는지는 들어서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결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아담에게 속한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그 약속과 반대로 행동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홍수 심판을 그렇게 경고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은 모든 생명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홍수 뒤에는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셔서 이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또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물로 뒤덮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이렇듯 홍수를 대처하는 것을 보고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는 깊음의 샘이 터지고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내림으로 물이 땅에 창일하여 천하에 높은 산까지 다 덮이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은 게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면 그 심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 절망적입니다. 항상 반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고수하며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통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 48회나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위하여 성과 대를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일과 동일한 일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뭘까요 주의 이름의 대적자가 누구입니까 바벨탑을 통해서 보면 누가 대적자입니까 인간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하실 일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이름으로 문명과 문화와 종교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름으로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주의 이름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구어 나가는 일과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주시는 일은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십자가는 항상 표출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조에게 내린 약속의 핵심은 인간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우리 이름을 창대케 하자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이름을 낮추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하늘 나라의 특징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 이름을 높이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이름은 없애 버리고 주의 이름만 높이는 곳입니다.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불안감이 인간에게는 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탑을 높이 쌓고 그 탑을 중심으로 하여 모여살기 원했던 것입니다. 흩어져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생활을 버리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혼자 힘으로는 두렵기 때문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몰아내고 다시 하나님이 자신들 안에 들어오는 것을 공동으로 대처하여 막아보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이 이와 같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혼란의 근원을 이루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간섭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이 세상은 혼란에 잠겨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복의 원천인 교회마저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저 구석에서 혼자서 훌쩍이며 울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어용교회도 있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고 울 듯이 말입니다.
2.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원래 인류는 모두 다 동일한 말과 문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기에 굳이 흩어져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한 곳에 집결해 있었으며 그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간주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인간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아진 힘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꿈꾸어 왔던 일을 위하여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힘은 자신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일에 최종적으로 소비되기 마련입니다. 그 일은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도달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땅의 시대를 열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뜻은 금방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다른 의견은 제시되지 않았고 별문제도 없었습니다.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계획과 행위를 하나님이 어떻게 무효로 돌리시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11:6-8)
1 바벨탑을 쌓는 일은 저들이 한 족속으로 하나의 언어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2 이후로는 그들이 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4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심으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습니다. 하늘 끝까지 성과 대를 쌓고자 했던 저들의 계획은 작업도중에 혼란이 생겨 공사는 중지되었습니다. 갑자기 언어가 불통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뜻은 이미 일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혼잡으로 그 뜻이 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 떼지어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란이 생겼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찾아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나님은 언어 혼잡으로 다시 부정하신 것입니다.
3. 그 이름은 바벨이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9)
1 사람들이 쌓고자 했던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셨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부정했습니다. 사람의 피조물 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질서에 혼돈이 왔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인간이 철저하게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그 질서에 대한 무시, 그 혼잡과 혼돈을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그들이 탑을 쌓는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이들의 악한 행위로 언어는 혼잡해졌으나 이는 오히려 질서를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인간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데 갑자기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성경에서는 언어가 갑자기 맞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일종의 징벌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에 창조하신 원초적인 모습이 아니고서는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벌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도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저주로 보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게 된 것도 하나의 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상태와 달라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언어의 혼돈을 인하여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언어를 혼잡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혼잡해진 가운데 서로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도 하나님이 흩으셨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총체적인 반란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박살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결집된 힘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이 우선하며 확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가 불통되니까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전달과정이 원활치 못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습니다. 이게 뭡니까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이주를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가나안 땅, 함의 원조들이 사는 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땅을 누가 정복할 것입니까 노아의 언약을 아는 자만이 노아에게 실려서 그 땅을 정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이 부정한 짐승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정결한 짐승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증표가 무지개입니다. 과거에 이 땅은 피를 머금은 저주의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 씻음받은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땅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나라와 나라가 생기고 갈라졌습니다. 이렇듯 나라의 생성은 이렇듯 인간의 죄악을 연유로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종족과 종족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경계가 확정되고 서로가 고유의 역사와 활동범주를 인정해 줌으로 땅의 인간나라는 다양한 문화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함은 원초적으로 언어의 다양함에서 야기된 결과였습니다. 언어의 혼란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이 아니라 땅이어야 했습니다. 땅은 하늘에 종속되어야 하며 하늘로부터 위탁받은 사명 때문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일이었어야 합니다. 올바른 땅의 정복과 다스림,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선을 감당해야 하늘과 땅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자가 그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서 노아가 자기 자식에게 축복한 것에 의거하며 그 중의 한 종족을 선택하여 진정한 복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이는 흩어진 모든 민족의 운명을 그 선택된 민족에게 그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지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복의 원천이 되는 민족도 저주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특수한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종족의 선조가 아브라함입니다.
1. 인간의 계획 인간이 하는 일은 그 일을 하는 행위보다는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도 악하지만 그 행위를 하게 만든 원인은 피조물의 위치를 떠나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기가 그 행위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을 만든 동기와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창11:4-5) 사람들은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바벨탑을 쌓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홍수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노아 홍수 심판의 당사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조로부터 노아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었는지는 들어서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무지개 언약을 통해서 결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아담에게 속한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그 약속과 반대로 행동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홍수 심판을 그렇게 경고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은 모든 생명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홍수 뒤에는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셔서 이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또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물로 뒤덮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이렇듯 홍수를 대처하는 것을 보고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노아 홍수 때는 깊음의 샘이 터지고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내림으로 물이 땅에 창일하여 천하에 높은 산까지 다 덮이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노아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은 게 아니라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면 그 심판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에 절망적입니다. 항상 반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2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고수하며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통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내 이름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 48회나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위하여 성과 대를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일과 동일한 일로서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게 뭘까요 주의 이름의 대적자가 누구입니까 바벨탑을 통해서 보면 누가 대적자입니까 인간의 이름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이름으로 하실 일이 있듯이 인간은 인간의 이름으로 문명과 문화와 종교를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름으로 만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주의 이름을 가리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구어 나가는 일과 예수님이 직접 우리에게 주시는 일은 계속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 둘 사이에 십자가는 항상 표출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조에게 내린 약속의 핵심은 인간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이름만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인간의 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우리 이름을 창대케 하자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 이름을 낮추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하늘 나라의 특징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 이름을 높이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 이름은 없애 버리고 주의 이름만 높이는 곳입니다.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불안감이 인간에게는 늘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탑을 높이 쌓고 그 탑을 중심으로 하여 모여살기 원했던 것입니다. 흩어져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생활을 버리고 인간들끼리 모여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혼자 힘으로는 두렵기 때문에 모여서 함께 하나님을 몰아내고 다시 하나님이 자신들 안에 들어오는 것을 공동으로 대처하여 막아보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이 이와 같은 혼란상태에 빠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인식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혼란의 근원을 이루는 사상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반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간섭을 거절하고 독자적인 세상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 때문에 이 세상은 혼란에 잠겨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복의 원천인 교회마저 무시당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저 구석에서 혼자서 훌쩍이며 울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어용교회도 있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을 보고 울 듯이 말입니다.
2.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원래 인류는 모두 다 동일한 말과 문자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기에 굳이 흩어져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한 곳에 집결해 있었으며 그곳을 자신들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간주했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인간들이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뭔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아진 힘으로 자기들이 평소에 꿈꾸어 왔던 일을 위하여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의 힘은 자신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일에 최종적으로 소비되기 마련입니다. 그 일은 인간이 신의 영역까지 도달되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자적인 땅의 시대를 열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뜻은 금방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다른 의견은 제시되지 않았고 별문제도 없었습니다.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간의 계획과 행위를 하나님이 어떻게 무효로 돌리시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11:6-8)
1 바벨탑을 쌓는 일은 저들이 한 족속으로 하나의 언어를 가졌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2 이후로는 그들이 하는 일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4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심으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습니다. 하늘 끝까지 성과 대를 쌓고자 했던 저들의 계획은 작업도중에 혼란이 생겨 공사는 중지되었습니다. 갑자기 언어가 불통되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뜻은 이미 일치되었습니다. 그러나 언어의 혼잡으로 그 뜻이 전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함께 떼지어 살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혼란이 생겼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 혼란을 최소로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의 자리를 찾아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부정하는 행위를 하나님은 언어 혼잡으로 다시 부정하신 것입니다.
3. 그 이름은 바벨이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9)
1 사람들이 쌓고자 했던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 탑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셨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 되심을 부정했습니다. 사람의 피조물 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질서에 혼돈이 왔습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지배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고 정복해야 할 인간이 철저하게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그 질서에 대한 무시, 그 혼잡과 혼돈을 끝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사 그들이 탑을 쌓는 일을 중단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이들의 악한 행위로 언어는 혼잡해졌으나 이는 오히려 질서를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인간의 인간됨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열심히 탑을 쌓고 있는데 갑자기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성경에서는 언어가 갑자기 맞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말이 안 통하는 것은 일종의 징벌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처음에 창조하신 원초적인 모습이 아니고서는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벌이라고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도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저주로 보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게 된 것도 하나의 벌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된 상태와 달라진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습니다. 언어의 혼돈을 인하여 사람들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언어를 혼잡케 하신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어가 혼잡해진 가운데 서로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을 향해 떠나갔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도 하나님이 흩으셨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총체적인 반란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박살난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결집된 힘보다 하나님의 계획과 결정이 우선하며 확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어가 불통되니까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전달과정이 원활치 못합니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였습니다. 이게 뭡니까 민족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이주를 시작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가나안 땅, 함의 원조들이 사는 땅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땅을 누가 정복할 것입니까 노아의 언약을 아는 자만이 노아에게 실려서 그 땅을 정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이 부정한 짐승을 대신하여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정결한 짐승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증표가 무지개입니다. 과거에 이 땅은 피를 머금은 저주의 땅이었지만 이제는 물로 씻음받은 은혜의 세계입니다. 이 땅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하여 나라와 나라가 생기고 갈라졌습니다. 이렇듯 나라의 생성은 이렇듯 인간의 죄악을 연유로 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종족과 종족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 경계가 확정되고 서로가 고유의 역사와 활동범주를 인정해 줌으로 땅의 인간나라는 다양한 문화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화의 다양함은 원초적으로 언어의 다양함에서 야기된 결과였습니다. 언어의 혼란 사태가 일어난 이유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정복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이 아니라 땅이어야 했습니다. 땅은 하늘에 종속되어야 하며 하늘로부터 위탁받은 사명 때문에 반드시 책임을 지는 일이었어야 합니다. 올바른 땅의 정복과 다스림,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선을 감당해야 하늘과 땅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할 자가 그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흩어진 민족들 가운데서 노아가 자기 자식에게 축복한 것에 의거하며 그 중의 한 종족을 선택하여 진정한 복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십니다. 이는 흩어진 모든 민족의 운명을 그 선택된 민족에게 그들의 태도에 따라 결정지으려는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그 복의 원천이 되는 민족도 저주에 대한 책임을 홀로 져야 하는 특수한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종족의 선조가 아브라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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