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창11:27-32)
본문
창세기 11장 바벨탑 이후에 다시 기록된 것이 셈의 족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창세기 9장 26절에서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1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셈이 처음입니다. ‘1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그 외에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1의 하나님’의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신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셈이 여호와를 하나님 삼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스스로 셈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냐 물을 때에 내가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합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셈의 하나님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그것은 셈과 그의 후손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셈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셈의 10대 후손입니다. 그는 욥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사는 곳이 달랐습니다. 욥은 동방 우스 땅에 살았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 조상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당시에 그는 절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사람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기준을 내세우는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에 비하여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모로 아브라함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갈대아는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르는 달의 신을 가리킵니다. 갈대아 우르는 달의 신 우르를 섬기는 우상숭배 지역입니다. 셈의 후손들은 방주에서 나와서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나아와 셈이 가졌던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지역에 살면서 이방신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불신앙의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셈의 하나님이 되신 분이 다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행하신 선택적 주권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으니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며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와 기준과는 전혀 다르게 일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일을 일체 허용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선택과 주권도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열두 제자의 이력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 문화,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종교적으로나 신분 사회적으로 출중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빼놓고는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뇨’ 할만큼 천한 동네 사람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의 직업을 한 번 보십시오. 마태는 세리로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 어부 출신입니다. 왜 주님이 이런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답변은 간단하게 두 마디입니다. “내 맘이다.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한다.” 아브라함이 어떤 처지에 있든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음을 받을 만한 상황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습니다. 왜요 셈에게 주신 약속과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셈의 후손을 사용하기로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셈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있을 뿐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거나 취소시킬 수 있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2.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까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단히 훌륭한 믿음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즉각 순종하여 약속의 땅이 가나안인 줄도 모르고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행하시고 그렇게 예쁘게 보아주실 뿐이지 아브라함이 그렇게 칭찬받을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과정과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세 가지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1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11:27-28)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과 나흘과 하란이라는 삼형제를 낳고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라는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땅을 떠나도록 지시했으나 그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떠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형 하란을 데려가셨습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보다 더 큰 불효가 없습니다. 자식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들을 잃고난 데라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식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그는 자식을 잊기 위해 할 수 없이 정든 고향 본토를 떠나게 됩니다. 데라는 사적인 이유로 떠났으나 그 이면에는 본토를 떠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2 친척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는 아브라함의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형이 죽고 고향을 떠남으로 아브라함은 친척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조카 롯만은 가나안까지 대동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하셔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결국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아비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1-32)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라는 죽은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하란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아들 생각에 고향을 떠났지만 아들의 향수를 지우지 못하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의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는데 가다가 하란에서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들 생각도 나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가는 일에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이름의 뜻은 ‘지연하다’, ‘연기하다’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발목을 잡고 가나안 땅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데라의 생명을 불러 가십니다.
첫째,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는데 아들을 아버지 데라가 자꾸 막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에게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가 살아 있는 한 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데라와 함께 가나안 땅에 가면 그것은 아비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집을 떠나게 하시려고 데라의 생명을 거두신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보고 말하기를 마침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알게 모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가나안 땅은 함의 아들 가나안이 일군 땅입니다. 가나안은 자기의 이름을 붙여 그 땅을 가나안이라 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9:25) 가나안은 할아버지 노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가서 사는 땅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가 일군 땅도 저주를 받습니다. 그가 하는 일들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아담이 저주를 받으니까 그 아담이 살아가는 땅도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저주받은 자가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저절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그 땅은 본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던 정말로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그 땅에 거하므로 저주를 받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습니까 빌라도가 나는 예수 죽인 일과 무관하다며 손을 씻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 죽인 죄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 돌리라고 겁도 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저주받은 사람이 들어가면 그 땅은 저주를 받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이 들어가면 그 땅은 축복을 받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함께하시는 요셉이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 어떤 축복이 임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1-23) 땅이 복받기 위해서는 복받은 사람이 그곳에 와야 한다는 원리를 누가 알았습니까 애굽의 바로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으로부터 꿈해몽을 받고난 바로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창41:38-40) 이런 것을 볼 때 바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결국 땅은 그 땅의 현재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차 누가 들어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들어가 사는 사람에 의하여 그 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흔히 집주인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를 잘못 주면 집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감으로 가나안 땅은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을 인하여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와 가나안 땅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장소를 옮긴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동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 귀신, 즉 마귀에게서 빠져나와 예수 그리스도 나실 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이동이었습니다. 축복은 영적인 의미가 육신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아브라함 생애 면면에 흐르는 축복을 영적인 축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축복을 사모하십시오. 젖과 꿀이 여러분의 생애에 풍성하게 흐르도록 하십시오. 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나눠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1의 하나님’의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 자신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셈이 여호와를 하나님 삼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스스로 셈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를 보낸 하나님이 누구냐 물을 때에 내가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합니까 질문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3:1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답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 다른 사람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을 셈의 하나님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그것은 셈과 그의 후손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셈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셈의 10대 후손입니다. 그는 욥과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사는 곳이 달랐습니다. 욥은 동방 우스 땅에 살았고,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 살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 조상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당시에 그는 절대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욥과 아브라함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생각에는 믿음의 조상이 될 만한 사람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기준을 내세우는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에 비하여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수24:2-3)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모로 아브라함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갈대아는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르는 달의 신을 가리킵니다. 갈대아 우르는 달의 신 우르를 섬기는 우상숭배 지역입니다. 셈의 후손들은 방주에서 나와서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나아와 셈이 가졌던 신앙을 다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지역에 살면서 이방신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불신앙의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셈의 하나님이 되신 분이 다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행하신 선택적 주권이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으니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며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 마음대로 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치와 기준과는 전혀 다르게 일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를 자랑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일을 일체 허용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선택과 주권도 하나님과 동일합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 열두 제자의 이력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 문화,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종교적으로나 신분 사회적으로 출중한 예루살렘 사람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빼놓고는 다 갈릴리 출신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뇨’ 할만큼 천한 동네 사람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의 직업을 한 번 보십시오. 마태는 세리로 세관에 앉아 있다가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모두 어부 출신입니다. 왜 주님이 이런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답변은 간단하게 두 마디입니다. “내 맘이다. 아무 자랑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한다.” 아브라함이 어떤 처지에 있든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음을 받을 만한 상황에 있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셨습니다. 왜요 셈에게 주신 약속과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셈의 후손을 사용하기로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셈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 있을 뿐입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계획을 막거나 취소시킬 수 있는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2.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까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대단히 훌륭한 믿음으로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즉각 순종하여 약속의 땅이 가나안인 줄도 모르고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다 행하시고 그렇게 예쁘게 보아주실 뿐이지 아브라함이 그렇게 칭찬받을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과정과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세 가지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1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를 떠나게 하셨습니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창11:27-28)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는 아브람과 나흘과 하란이라는 삼형제를 낳고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데라는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땅을 떠나도록 지시했으나 그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나지 않을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떠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형 하란을 데려가셨습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보다 더 큰 불효가 없습니다. 자식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아들을 잃고난 데라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자식 생각에 괴로웠습니다. 그는 자식을 잊기 위해 할 수 없이 정든 고향 본토를 떠나게 됩니다. 데라는 사적인 이유로 떠났으나 그 이면에는 본토를 떠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2 친척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는 아브라함의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형이 죽고 고향을 떠남으로 아브라함은 친척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조카 롯만은 가나안까지 대동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하셔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로 떠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결국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아비집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창11:31-32) 갈대아 우르를 떠난 데라는 죽은 아들의 이름과 똑같은 하란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아들 생각에 고향을 떠났지만 아들의 향수를 지우지 못하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의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는데 가다가 하란에서 머물러 버린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아들 생각도 나고, 생면부지의 땅으로 가는 일에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의 역사가 개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이름의 뜻은 ‘지연하다’, ‘연기하다’입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의 발목을 잡고 가나안 땅에 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데라의 생명을 불러 가십니다.
첫째, 가나안 땅으로 가려 하는데 아들을 아버지 데라가 자꾸 막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에게 ‘아비집을 떠나라’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데라가 살아 있는 한 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데라와 함께 가나안 땅에 가면 그것은 아비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집을 떠나게 하시려고 데라의 생명을 거두신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고 싶어서 떠난 사람이 아닙니다. 떠날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보고 말하기를 마침내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알게 모르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가나안 땅은 함의 아들 가나안이 일군 땅입니다. 가나안은 자기의 이름을 붙여 그 땅을 가나안이라 했습니다. 가나안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9:25) 가나안은 할아버지 노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가서 사는 땅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가 일군 땅도 저주를 받습니다. 그가 하는 일들이 저주를 받습니다. 이 원리를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아담이 저주를 받으니까 그 아담이 살아가는 땅도 그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은 저주받은 자가 들어가 살았기 때문에 저절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그 땅은 본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던 정말로 살기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이 그 땅에 거하므로 저주를 받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왜 망했습니까 빌라도가 나는 예수 죽인 일과 무관하다며 손을 씻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 죽인 죄를 우리와 우리 후손에 돌리라고 겁도 없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저주받은 사람이 들어가면 그 땅은 저주를 받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이 들어가면 그 땅은 축복을 받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복을 받고 함께하시는 요셉이 종의 신분으로 애굽에 들어갔습니다. 보디발의 집과 감옥에 어떤 축복이 임했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1-23) 땅이 복받기 위해서는 복받은 사람이 그곳에 와야 한다는 원리를 누가 알았습니까 애굽의 바로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으로부터 꿈해몽을 받고난 바로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창41:38-40) 이런 것을 볼 때 바로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결국 땅은 그 땅의 현재 상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장차 누가 들어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들어가 사는 사람에 의하여 그 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흔히 집주인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를 잘못 주면 집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감으로 가나안 땅은 저주의 땅에서 축복의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을 인하여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빠져나와 가나안 땅으로 이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는 장소를 옮긴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동은 구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 귀신, 즉 마귀에게서 빠져나와 예수 그리스도 나실 땅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이동이었습니다. 축복은 영적인 의미가 육신적인 것을 우선합니다. 아브라함 생애 면면에 흐르는 축복을 영적인 축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인 축복을 사모하십시오. 젖과 꿀이 여러분의 생애에 풍성하게 흐르도록 하십시오. 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적인 복을 나눠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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