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창22:9-19)
본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받을 때, 그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그를 인도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밖에 없었습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번성합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번성의 복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 번성의 근거를 자신의 번식 능력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번성의 근거는 오히려 아브라함의 무생산력이고 무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으로 아브라함을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며 죽은 데서 살려내시는 분입니다. 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아브라함을 통해 나타내려면 아브라함의 무능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남자이면서 남자 구실을 못 하는 조상이 되게 하시고, 사라는 여자이면서 여자 구실을 못 하는 조상이 되게 하십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약속의 능력은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일어서게 됩니다.
1.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이 하는 일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셨을 때 이것을 자신을 통한 육신의 씨의 번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의 번성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동원한 방법들을 살펴봅시다.
1 조카 롯을 후사 삼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날 때에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없다는 말이요, 고대 사회에서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마침 형 하란이 죽고난 뒤에 조카 롯은 보호자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로부터 줄곧 롯을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조카 롯을 떠나보내도록 역사하십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할 때에 땅은 비좁고 소유는 많아 그들이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종들 사이에는 서로 자기의 양떼에게 물과 풀을 먹이려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떠나가고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거하게 됩니다.
2 다메섹 엘리에셀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대처럼 빨리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늙어가고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져갑니다. 이제는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와 상급이라며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 했습니다. 이제는 자식 낳는 일은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유산은 충성스러운 종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주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를 걸고 자식이 태어날 것을 고대했습니다.
3 이스마엘 그러나 자식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10년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사라는 불임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가정에 자식이 없는 것은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최대의 수치요 비극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사라는 애굽에서 데려온 하갈을 남편과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드디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 나이 90세에 이삭이 태어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씨가 약속대로 태어난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혈통과는 무관한 아들 이삭
1 여자의 후손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의 씨는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던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사라가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완전한 남성이었다는 점이 어디서 밝혀집니까 그의 나이 86세에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127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창23:1)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도 재혼하여 그두라라는 여인을 통해서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과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창25:1-4) 아브라함은 140세 이후에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몇 살까지 낳았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이삭 전에, 이삭 후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 사라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삭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삭과 같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몇 명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헬도 사라처럼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남편 이삭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엘가나는 브닌나에게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태를 열어 주심으로 자식을 낳게 됩니다. 불임여성이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처녀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통해 이 땅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할례 이삭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상관된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최초의 할례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난 뒤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0-14) 할례는 남자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생식기에 끊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인간 혈통의 버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인간 혈통에서 끊겨지고 하나님에게 연결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약속의 후손들뿐입니다. 인간 혈통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할례로써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혈통은 마땅히 버려짐을 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고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창조력을 발휘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 이레의 의미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속에 이삭이라는 자식을 허락받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을 통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어떤 대상을 상징으로 예표로서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1 이삭까지 거부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장의 약속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받게 하시고 이삭은 버리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끊음과 버림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의사 표현입니다. 이삭이 죽음으로 없어지면 12장에서 창대케 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삭은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지만 도리어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 버려짐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혈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도록 명령하셨지만 그가 순종할 때 이삭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수양이 나타나 아들의 죽음을 대신해서 이삭을 살려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22:13-14)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도록 하심으로 아브라함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죽는 모습을 통해 메시야의 피흘림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되돌려 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대상은 이삭을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되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핏줄을 창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그분과 이어짐이 성사된 것입니다. 복을 받는 노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인물이 되기 전까지 죽음의 자리에 놓은 이삭을 통해 자기 혈통의 단절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복의 인물들만이 이 지상에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며 영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되찾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됩니다. 그래서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제공한 것이지 지상에 있는 아브라함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점을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혈통과 상관된 인물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하나님과 관련된 인물이란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할 때 이삭 대신 수양이 희생되는 모습을 통해 비로소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가 갖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삭의 관계였습니다. 버리고 되찾는 능력입니다. 이삭을 되찾을 때는 약속에 준해서 되찾아집니다. 약속의 실체가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수양의 희생을 인하여 이삭이 살았습니다. 약속의 실체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또 죽은 데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창조하고 또 새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력만이 지상에 영원해야 합니다. 이 창조의 능력은 약속의 핏줄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마련했습니다. 이삭이 수양의 희생으로 다시 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가 살았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혈통적 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선택을 차례로 거절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삭까지 거절하셨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다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예비하시는 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이삭을 바치게 하는 사건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인데 그 씨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준행하신 분은 십자가 죽음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얻는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이 하는 일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셨을 때 이것을 자신을 통한 육신의 씨의 번성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후손의 번성을 위해 기울였던 노력과 동원한 방법들을 살펴봅시다.
1 조카 롯을 후사 삼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날 때에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미래가 없다는 말이요, 고대 사회에서 이것보다 더 큰 저주는 없습니다. 마침 형 하란이 죽고난 뒤에 조카 롯은 보호자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자신의 후사로 삼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로부터 줄곧 롯을 대동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조카 롯을 떠나보내도록 역사하십니다.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할 때에 땅은 비좁고 소유는 많아 그들이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같이 종들 사이에는 서로 자기의 양떼에게 물과 풀을 먹이려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롯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하여 떠나가고 아브라함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거하게 됩니다.
2 다메섹 엘리에셀 하나님은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라함의 기대처럼 빨리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늙어가고 아이를 낳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져갑니다. 이제는 거의 포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와 상급이라며 나타나셨을 때 아브라함은 “.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15:2) 했습니다. 이제는 자식 낳는 일은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유산은 충성스러운 종 다메섹 엘리에셀에게 주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약속에 기대를 걸고 자식이 태어날 것을 고대했습니다.
3 이스마엘 그러나 자식을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10년이 지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사라는 불임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가정에 자식이 없는 것은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최대의 수치요 비극이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사라는 애굽에서 데려온 하갈을 남편과 동침하게 했습니다. 그 둘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스마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되던 해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창17:19) 드디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 나이 90세에 이삭이 태어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노력은 다 수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씨가 약속대로 태어난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혈통과는 무관한 아들 이삭
1 여자의 후손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의 씨는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던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자식을 낳을 만한 능력이 있었지만 사라가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완전한 남성이었다는 점이 어디서 밝혀집니까 그의 나이 86세에 하갈과의 사이에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사라는 127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창23:1)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도 재혼하여 그두라라는 여인을 통해서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과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창25:1-4) 아브라함은 140세 이후에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몇 살까지 낳았는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이삭 전에, 이삭 후에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여인 사라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이삭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삭과 같이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난 몇 명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라헬도 사라처럼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불임여성이었습니다. 남편 이삭은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엘가나는 브닌나에게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태를 열어 주심으로 자식을 낳게 됩니다. 불임여성이 자기 힘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처녀도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통해 이 땅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2 할례 이삭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상관된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된 인물입니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최초의 할례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난 뒤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10-14) 할례는 남자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생식기에 끊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인간 혈통의 버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인간 혈통에서 끊겨지고 하나님에게 연결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약속의 후손들뿐입니다. 인간 혈통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할례로써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의 모든 혈통은 마땅히 버려짐을 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고 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창조력을 발휘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 이레의 의미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 속에 이삭이라는 자식을 허락받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을 통해 자신에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에 대한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어떤 대상을 상징으로 예표로서 보여주는 인물들입니다.
1 이삭까지 거부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2장의 약속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는 증거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받게 하시고 이삭은 버리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끊음과 버림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의사 표현입니다. 이삭이 죽음으로 없어지면 12장에서 창대케 되는 인물이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삭은 비록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태어나지만 도리어 아버지 아브라함의 손에 의해 버려짐을 당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 혈통과의 철저한 단절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죽이도록 명령하셨지만 그가 순종할 때 이삭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난데없이 수양이 나타나 아들의 죽음을 대신해서 이삭을 살려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22:13-14) 하나님은 이삭을 죽이도록 하심으로 아브라함 자신이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대신하여 수양이 죽는 모습을 통해 메시야의 피흘림으로 죄인이 구원받는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다시 되돌려 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대상은 이삭을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되살아나게 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새로운 핏줄을 창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그분과 이어짐이 성사된 것입니다. 복을 받는 노선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러한 인물이 되기 전까지 죽음의 자리에 놓은 이삭을 통해 자기 혈통의 단절을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복의 인물들만이 이 지상에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하며 영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되찾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됩니다. 그래서 그 약속은 하나님이 제공한 것이지 지상에 있는 아브라함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점을 수용하고 믿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혈통과 상관된 인물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의 하나님과 관련된 인물이란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할 때 이삭 대신 수양이 희생되는 모습을 통해 비로소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가 갖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이삭의 관계였습니다. 버리고 되찾는 능력입니다. 이삭을 되찾을 때는 약속에 준해서 되찾아집니다. 약속의 실체가 어떠함을 알게 됩니다. 수양의 희생을 인하여 이삭이 살았습니다. 약속의 실체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또 죽은 데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창조하고 또 새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위력만이 지상에 영원해야 합니다. 이 창조의 능력은 약속의 핏줄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마련했습니다. 이삭이 수양의 희생으로 다시 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가 살았습니다. 여호와 이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노력이나 혈통적 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로 하나님이 예비해 주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선택을 차례로 거절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이삭까지 거절하셨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다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예비하시는 자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이삭을 바치게 하는 사건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6-18)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게 될 것인데 그 씨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죽기까지 준행하신 분은 십자가 죽음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얻는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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