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만을 자랑하리라! (갈6:14)
본문
본문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하는 결단을 내리고, 그의 전 생애를 오로지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살아갔던 내용입니다. 십자가는 고대 앗수르나 바벨론, 메데, 파사와 같은 나라에서 아주 극악한 죄수들을 집행했던 무서운 형틀입니다. 죄중에서도 가장 죄가 무거운 죄수들을 십자가에 매달고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아 피를 다 흘리게 해서 죽기까지 매달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이나 달려 있으면서 견딜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못을 박아 형을 집행할 때 옷을 다 벗기우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수치를 당하시면서 온 몸에 물과 피를 다 쏱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면서 욕을 하고 저주를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정치범이나 사형수들을 극형에 처하는 무서운 형틀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를 자랑하겠다고 하면서 모든 희생을 각오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는,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속해 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존귀한 신분이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생활에 습관화된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나 흠이 없고, 율법에 대해서도 정통적인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보수적인 신앙 노선을 걸은 사람입니다. 또한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하겠다고 했을까. 성경 롬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즉, 에덴동산 이후에 모든 인간은 죄를 가지고 태어 났습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남긴 말은 “사람은 어떠한 신분이나 어떠한 계층을 막론하고 선한 자는 하나도 없다. 정치가, 문학가,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우리 인간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구세주가 필요하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의인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면 금생과 내생에서 반드시 그 죄값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에 지나갔던 고대 사람이나 현대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이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다(롬3: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면, 세개의 큰 골짜기가 있는데 첫째는 에덴의 법이고, 두 번째는 시내산의 법이며, 세 번째는 갈보리산 언덕의 법입니다.
이 세가지 법중에서 첫 번째 에덴의 법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가깝게도 가지 말고 따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유혹이 이끌려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시내산의 법은 ‘지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내산의 법도 연약한 인간은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영원한 법을 주셨는데, 갈보리산의 제사 제도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음부에 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내려 가게 하신 은혜의 법입니다. 누구든지 이 갈보리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마11:28). 요3:15-16절 말씀에서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1/3정도가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1/4, 요한복음에는 거의 절반 이상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바로 나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엄청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이단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이 임하여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예수만을 전하고 예수만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디오 하나를 훔치다가 들켜서 감옥 생활을 했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앙심을 품고 출옥을 하자마자 그 집에 가서 도끼로 온 가족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잡혀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얼마나 성격이 못되었는지 교도원이 오면 두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가 하면 온갖 욕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음담 폐설을 하고 사람들을 해롭게 하고, 욕을 해서. 이사람은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러 와서는 “나는 자네 보다 더 못된 사람이었는데 이 말씀을 읽고 변화가 되었네 자네도 이 말씀을 읽어 보게나!” 하면서 성경책을 던져 주는 것이었습니다. 형목이 설교하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도 받고, 성경을 읽다가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는데 당시에 가장 흉악한 강도도 옆에 십자가에 달려 같이 죽어 가면서 “예수여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하고 부탁을 하였을 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 하시는 그 말씀을 읽고. 고재봉은 감격을 하면서 “나와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니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 잠깐 기도할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나를 사형 집행할 사수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오니 그에게 죄를 더하지 마옵소서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 하고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많은 죄수들도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사망입니다. 반드시 보응이 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자유인이 되는 엄청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5절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서 예수만을 증거하고 예수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복음의 빚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1:14절 말씀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빚진자가 되었기에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보다는 교수 목사가 되고자, 대학원 등록금을 만든다고 빚을 여기 저기서 얻어 사업을 하다가 그만 망쪼가 들었습니다. 기숙사비하고 등록금을 내고, 직원들 이자 나가고, 봉급을 다 주어도 될 것 같았는데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날부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자가 늘어나고 빚쟁이들이 찾아 오는데 “권선생!”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다가도 누가 면회를 왔다고 하면 또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 그 햇빛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활기가 있고 신바람이 나고 소망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빚을 못 갚으니 살맛이 없고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서야 그 빚을 다 갚아 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들어 봤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마치 빚진 죄인 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상점에 물건을 돈을 주고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가져간 죄인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빚을 예수님이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을 다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자식이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 이상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성정입니다.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곧 그 아비와 어미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고통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갚지못할 빚진 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며 음부에 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마침내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셨지만, 이는 곧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니. 바울은 평생을 두고도 이 빚을 갚을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출세하고 호강하며 살 수 잇었지만, 좋은 가문에 수준 높은 교육, 그리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직 예수 십자가만 자랑하다가 주 앞에 간 것입니다.
셋째는,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골2:15절에 보니까 “십자가로 승리하셨노라” 했는데, 인생의 삶을 승리롭게 하시니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격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벧전2:19절 이하에서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은 첫째로 아무런 이유없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죄값으로 받는 고난이 있고, 셋째는 의를 위해서 받는 주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여러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일단 고난이 오면 그 고난만 생각하지 “왜 내게 고난이 임했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스러운 것만 바라보고 짜증만 내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런 부류의 시람들을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죄값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빨리 돌아서고 죄를 회개하면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무슨 잘못도 없고, 아무런 원인도 없는데 고난이 왔을 경우에는 무슨 뜻인지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되고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 알브레트 윌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나비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색상이 아주 화려한 천정 나비가 누에 고치에서 나올려고 애를 쓰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칼로 찢어 주면서 빨리 나오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오기는 빨리 나왔는데 결국은 빌빌거리다가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연구해 보니까, 나비가 누에 고치에서 발버둥을 치며 나올려고 애를 쓰다가 힘이 생기고 액체가 나와서 잘 빠지게 되고, 또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발버둥을 치는 것을 통하여 정상적으로 성장을 하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고, 바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고난이 찾아 오는 것은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저 너머에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고 있음을 깨닫고 주를 더욱 의지하고 바라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은 기도를 할 때에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고난이 오면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편에게 전가하고, 아내에게 전가하고, 자녀들에게 전가합니다. 직장에서는 높은 사람에게 혹은 낮은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맡깁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주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인내를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소망의 영을 주시고 담대한 힘을 주시고 장부다운 영을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고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난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면 분별하게 되고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사람은 남모르는 기쁨이 일어나고 살 맛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갔는데 옥중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고통속에서 기도하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전도하라는 깨달음을 주셔서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통하여 결국은 왕족들에게 전하여 지고, 또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로마가 기독교화 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이 로마에서 미주로, 미주에서 우리 한국으로 복음이 전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가슴 가슴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를 맺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1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2복음의 빚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바울과 같이 자나깨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고, 복음에 빚진자 되어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십자가를 자랑하겠다고 하면서 모든 희생을 각오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십자가를 자랑하게 되었겠습니까
첫째는,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속해 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존귀한 신분이었습니다. 종교적 경건생활에 습관화된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나 흠이 없고, 율법에 대해서도 정통적인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보수적인 신앙 노선을 걸은 사람입니다. 또한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하겠다고 했을까. 성경 롬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했습니다. 즉, 에덴동산 이후에 모든 인간은 죄를 가지고 태어 났습니다.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남긴 말은 “사람은 어떠한 신분이나 어떠한 계층을 막론하고 선한 자는 하나도 없다. 정치가, 문학가,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다. 우리 인간은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 위하여 구세주가 필요하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의인이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면 금생과 내생에서 반드시 그 죄값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에 지나갔던 고대 사람이나 현대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이나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성서에서 말씀하고 있다(롬3: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면, 세개의 큰 골짜기가 있는데 첫째는 에덴의 법이고, 두 번째는 시내산의 법이며, 세 번째는 갈보리산 언덕의 법입니다.
이 세가지 법중에서 첫 번째 에덴의 법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에는 가깝게도 가지 말고 따먹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유혹이 이끌려 따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시내산의 법은 ‘지켜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내산의 법도 연약한 인간은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영원한 법을 주셨는데, 갈보리산의 제사 제도입니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죄를 지은 모든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음부에 까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내려 가게 하신 은혜의 법입니다. 누구든지 이 갈보리 십자가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했습니다(마11:28). 요3:15-16절 말씀에서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4복음서에 보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1/3정도가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1/4, 요한복음에는 거의 절반 이상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복음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바로 나의 죄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엄청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을 가만히 보니까 이단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이 임하여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바울은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예수만을 전하고 예수만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한 것입니다.
고재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디오 하나를 훔치다가 들켜서 감옥 생활을 했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앙심을 품고 출옥을 하자마자 그 집에 가서 도끼로 온 가족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잡혀 사형 언도를 받았는데, 얼마나 성격이 못되었는지 교도원이 오면 두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가 하면 온갖 욕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음담 폐설을 하고 사람들을 해롭게 하고, 욕을 해서. 이사람은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도를 하러 와서는 “나는 자네 보다 더 못된 사람이었는데 이 말씀을 읽고 변화가 되었네 자네도 이 말씀을 읽어 보게나!” 하면서 성경책을 던져 주는 것이었습니다. 형목이 설교하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음도 받고, 성경을 읽다가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는데 당시에 가장 흉악한 강도도 옆에 십자가에 달려 같이 죽어 가면서 “예수여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하고 부탁을 하였을 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거하리라” 하시는 그 말씀을 읽고. 고재봉은 감격을 하면서 “나와 같은 죄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가 되니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되었고, 사형이 집행되던 날에 잠깐 기도할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나를 사형 집행할 사수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오니 그에게 죄를 더하지 마옵소서 또한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예수 믿고 구원을 받게 하옵소서!” 하고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있는 많은 죄수들도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나온 것입니다. 죄의 값은 반드시 사망입니다. 반드시 보응이 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자유인이 되는 엄청난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3:5절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서 예수만을 증거하고 예수를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두번째는, 복음의 빚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롬1:14절 말씀에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빚진자가 되었기에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학생시절에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회하는 목사보다는 교수 목사가 되고자, 대학원 등록금을 만든다고 빚을 여기 저기서 얻어 사업을 하다가 그만 망쪼가 들었습니다. 기숙사비하고 등록금을 내고, 직원들 이자 나가고, 봉급을 다 주어도 될 것 같았는데 하루 아침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날부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자가 늘어나고 빚쟁이들이 찾아 오는데 “권선생!” 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강의실에서 공부하다가도 누가 면회를 왔다고 하면 또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밤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 햇살을 바라보면 그 햇빛이 그렇게 싫었습니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뭔가 활기가 있고 신바람이 나고 소망이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빚을 못 갚으니 살맛이 없고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서야 그 빚을 다 갚아 주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못들어 봤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마치 빚진 죄인 처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상점에 물건을 돈을 주고 가져가야 하는데 그냥 가져간 죄인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빚을 예수님이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땅에 내려와서 인간의 모든 죄의 값을 다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은 자식이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 이상의 괴로움을 받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성정입니다. 자식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곧 그 아비와 어미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성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고통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니 너무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갚지못할 빚진 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며 음부에 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마침내 부활하셔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셨지만, 이는 곧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이니. 바울은 평생을 두고도 이 빚을 갚을길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출세하고 호강하며 살 수 잇었지만, 좋은 가문에 수준 높은 교육, 그리고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직 예수 십자가만 자랑하다가 주 앞에 간 것입니다.
셋째는, 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골2:15절에 보니까 “십자가로 승리하셨노라” 했는데, 인생의 삶을 승리롭게 하시니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격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벧전2:19절 이하에서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은 첫째로 아무런 이유없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이 있고, 또 하나는 죄값으로 받는 고난이 있고, 셋째는 의를 위해서 받는 주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당할 때 여러가지의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일단 고난이 오면 그 고난만 생각하지 “왜 내게 고난이 임했는가” 하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고통스러운 것만 바라보고 짜증만 내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이런 부류의 시람들을 동물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죄값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빨리 돌아서고 죄를 회개하면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무슨 잘못도 없고, 아무런 원인도 없는데 고난이 왔을 경우에는 무슨 뜻인지를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되고 더 좋은 길로 이끌어 주실 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생물학자 알브레트 윌스 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나비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색상이 아주 화려한 천정 나비가 누에 고치에서 나올려고 애를 쓰고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칼로 찢어 주면서 빨리 나오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오기는 빨리 나왔는데 결국은 빌빌거리다가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고 연구해 보니까, 나비가 누에 고치에서 발버둥을 치며 나올려고 애를 쓰다가 힘이 생기고 액체가 나와서 잘 빠지게 되고, 또한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발버둥을 치는 것을 통하여 정상적으로 성장을 하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고, 바로 살려고 애를 쓰는데도 고난이 찾아 오는 것은 더 좋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저 너머에 놀라운 축복이 예비되고 있음을 깨닫고 주를 더욱 의지하고 바라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은 기도를 할 때에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고난이 오면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고 그 책임을 전가합니다. 남편에게 전가하고, 아내에게 전가하고, 자녀들에게 전가합니다. 직장에서는 높은 사람에게 혹은 낮은 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맡깁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주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인내를 가르쳐 준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소망의 영을 주시고 담대한 힘을 주시고 장부다운 영을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라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고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난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하면 분별하게 되고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사람은 남모르는 기쁨이 일어나고 살 맛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죄수의 몸으로 로마까지 갔는데 옥중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고통속에서 기도하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전도하라는 깨달음을 주셔서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것을 통하여 결국은 왕족들에게 전하여 지고, 또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로마가 기독교화 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복음이 로마에서 미주로, 미주에서 우리 한국으로 복음이 전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가슴 가슴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를 맺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하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1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2복음의 빚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3승리로운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바울과 같이 자나깨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고, 복음에 빚진자 되어 주 안에서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