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의 제사, 아벨의 제사 (창4:1-8)
본문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믿음이라고 정의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추상적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믿음을 어떤 방법으로든 보이는 것으로 가시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면 그것을 보고 위안을 삼고 만족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큰 건물이 있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히 큰 축복을 받은 교회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작은 교회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진의는 작은 교회 목사로서 큰 교회가 잘못되었다, 작은 교회만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잣대는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사무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인데 왜 보이는 왕을 구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계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사무엘이 슬픈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저들이 나를 버림이라 말씀하시면서 저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워 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공통적인 종교적 속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기독교 문화의 확연한 특징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는 미술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는 문학과 음악은 발달되었으나 미술문화는 제로점에 가깝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 사도 바울, 열두 제자의 조각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문화라고 자랑하는 것은 천주교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니까 그들의 요구대로 만들어 놓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형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또 어떤 형상을 그려 놓고 그것을 하나님처럼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화 액자가 하나도 걸려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가정이 등록할 때 저는 성구 액자를 선물하지 성화액자를 선물하지 않습니다. 그 그림에 나오는 분이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으니까 그런 그림을 통해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는 마음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심에 불과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생겨지는 것만이 참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겨난 믿음 아니면 그것은 다 가짜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 365일, 우리의 생명이 호흡하는 동안 우리는 주님 앞에 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더욱더 그 감사의 의미를 아로 새기면서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감사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감사 역시 눈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나타내기도 어렵고 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내가 평소에 신세지고 많은 도움을 베풀어주신 분에게 선물을 사고 찾아가 감사드리는 일은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것을 또 원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찾아가지도 않고 선물도 드리지도 않으면서 감사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감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진심을 전달하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3년 동안 매일 꽃 한 송이를 바치며 구애를 하여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대단한 사랑의 소유자라고 할 것입니다. 매일 한 통씩 편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며 약간의 관심과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여인을 사랑하는 가난한 사람이 시간도 돈도 없어서 꽃 한 송이 편지 한 통을 못쓰고 십 년 동안 변치 않는 애정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진실한 사랑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고 풍성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이 외식이며 가식이라도 세상은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맨입으로 할 때는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감사와 예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양치는 자 농사하는 자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4:2)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에덴 동산을 쫓겨난 뒤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 농사하는 자 가인이 농사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땅만 바라보고, 땅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입어야 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성도의 삶의 방법과 기준은 언제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음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조카 롯은 육신을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해서 내려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 수풀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삶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는 믿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편안한 환경 가운데 있어도 더 좋은 육신의 안일을 추구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범죄 후에 이 땅에 집착하는 본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뱀은 땅에 자신의 온몸을 밀착시키며 살아갑니다. 저주받은 인생의 본모습이 그러합니다. 이 땅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더 잘살고 더 잘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일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해도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저주받은 삶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2 양치는 자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당시에 양치는 직업은 육신의 삶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창세기 9장에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는 모든 식물이 홍수로 쓸려간 뒤라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가서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벨 당시에 양치는 직업은 육신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양은 오직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사할 양을 기르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믿음을 선택했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직업 선택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영적인 선택을 하면 육신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주일날 일하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될 것만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그렇게 될 것을 각오하고 양치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오늘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육신의 삶에 뭔가 유익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반대로 손해볼 것을 각오하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장사하는 일에 교회 다니는 것이 유익하고 결혼하는 일에 예수 믿는 일이 유익해서 믿는다면 그 믿음은 다 가짜입니다. 돈버는 일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아벨이 양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일을 위하여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2. 세월이 지난 후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창4:3-4) 사람은 처음에는 누구나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끝까지 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 분명하게 시간을 못박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수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옷을 벗기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인 너희들을 위하여 이 짐승처럼 죽으실 터인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아담은 두 아들에게 이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사하며 하나님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어느 시점까지는 똑같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가인은 땅에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새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지나면서 두 가지 형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세월이 지난 후에 믿음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하숙했던 경제학과 후배가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울먹이면서 말을 합니다. “형님, 우리 누나가 아파요.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 누나만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면 나도 목사가 될래요.” 그러나 누나는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예배 참석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가보면 나도 예전에는 잘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 천지입니다. 과거 믿음이 오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오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욕보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세월이 지난 후에 더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의 신앙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보십시오. 어린 시절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소년 다니엘은 왕이 주는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믿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에스겔서 14장을 보면 노아, 다니엘, 욥을 가리켜 의인이라 했습니다. 이중에 노아와 욥은 믿음의 잘한 측면과 실수하고 잘못한 부분도 함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 대해서만큼은 잘못한 것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보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신앙은 점점 더 올라가는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는 믿음이었습니다. 빨리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은 신앙이었습니다. 출발할 때 작은 차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지기 마련입니다. 조카 롯과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롯은 모압과 암몬이라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과 예배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4:4-5) 예배에는 받으시는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목적은 그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있습니다.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도 지성과 열성과 열심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은 항상 예배를 두 종류로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인은 어떻게 제사했고 아벨은 어떻게 제사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어떤 제사가 되는 것입니까
1 가인의 제사 가인은 내가 땀흘린 것으로, 내가 수고한 것으로 제사한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여 내가 최선을 기울인 것으로 구원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대충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아까워서 형식적으로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인이 드린 제사는 자기가 기울일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고백이 여기에 어울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수천 수만 마리의 짐승의 제사를 드릴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을 제물 삼아 드릴까 그것도 안되면 내 몸을 드릴까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딴에는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 때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은 형식적으로 드린 것이라면 그렇게 화가 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를 드렸는데 안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바리새인의 제사였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2 아벨의 제사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자기가 기르던 양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는 피흘리며 죽어가는 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양처럼 주님 앞에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에는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양처럼 내가 죽어야 하는데 장차 오실 메시아가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고백으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예배는 땅의 소산을 많이 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아벨이 드린 고백을 더욱 크게 풍성하게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출발과 최종적인 종착점은 무엇입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의 예를 하박국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런 상황이라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가장 큰 예배로 받으셨습니다. 하박국이 그해에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가장 큰 것을 받으셨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집사님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한참 동안 자기가 받은 축복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전에 사는 아들이 MBC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은행에 다니다가 명예 퇴직을 했는데 후에 경제위기가 터져 명예 퇴직하기를 백 번 잘했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퇴직금도 못 받을 뻔했는데 미리 퇴직하여 손해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퇴직한지 몇 달만에 다시 상호신용금고에 이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보너스가 600%고, 한 달에 월급이 250만원이나 된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가정을 축복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들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분 나빠 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집사님의 입에서 나 같은 죄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너무 감사합니다. 이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력 좋으면 어떤 직장이든 취직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수 좋으면 퇴직한 다음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못 받습니다. 자랑하려면 그걸 자랑해야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자랑은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 말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감사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어야 그것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잡동사니를 갖다 붙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감사 다 집어치우시고 이 사실만 매일 같이 감사할 수 있는 분이 참으로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제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때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 앞에 더 많이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많이 드리지 못한 것, 그것을 미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물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에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만은 갑절로 넘쳐야 할 것입니다. 물질로는 하나도 드리지 못하나 맨입으로라도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의 기쁨을 주님 앞에 영광으로 돌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린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가인은 땅에 농사하여 얻은 소출로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쌀, 과일, 무우, 배추 등으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내가 땀흘려 수고한 것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어떻습니까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래적으로 바라보며 드린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지만 우리는 양을 잡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미리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맨입으로 이 사실을 고백하면 됩니다. 많은 물질로 많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힘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림으로 대속해 주신 구원에 대하여 넘치는 감사와 감격으로 나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가시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그냥 우러러 나오지 않는 한 그렇게 보이려고 가식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믿음을 사람들 앞에 감추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없이 맨입으로 하십시오. 믿음으로만 하십시오. 온몸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잘먹고 잘살고 건강하게 하신 사실보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육신에 관련된 것은 얼마든지 바뀌고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아벨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일년 365일, 우리의 생명이 호흡하는 동안 우리는 주님 앞에 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더욱더 그 감사의 의미를 아로 새기면서 감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감사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감사 역시 눈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표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는 나타내기도 어렵고 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내가 평소에 신세지고 많은 도움을 베풀어주신 분에게 선물을 사고 찾아가 감사드리는 일은 쉽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것을 또 원합니다. 이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찾아가지도 않고 선물도 드리지도 않으면서 감사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감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 진심을 전달하는 것은 이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3년 동안 매일 꽃 한 송이를 바치며 구애를 하여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대단한 사랑의 소유자라고 할 것입니다. 매일 한 통씩 편지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며 약간의 관심과 시간과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한 여인을 사랑하는 가난한 사람이 시간도 돈도 없어서 꽃 한 송이 편지 한 통을 못쓰고 십 년 동안 변치 않는 애정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이 더 진실한 사랑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고 풍성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것이 외식이며 가식이라도 세상은 그것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맨입으로 할 때는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감사와 예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양치는 자 농사하는 자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창4:2) 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에덴 동산을 쫓겨난 뒤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 농사하는 자 가인이 농사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땅만 바라보고, 땅만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마시고 입어야 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성도의 삶의 방법과 기준은 언제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믿음보다는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13장을 보면 조카 롯은 육신을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해서 내려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 위하여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나무 수풀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삶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조건에서도 우리는 믿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편안한 환경 가운데 있어도 더 좋은 육신의 안일을 추구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땅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범죄 후에 이 땅에 집착하는 본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저주의 상징입니다. 뱀은 땅에 자신의 온몸을 밀착시키며 살아갑니다. 저주받은 인생의 본모습이 그러합니다. 이 땅에 가치와 소망을 두고 더 잘살고 더 잘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농사하는 일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해도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저주받은 삶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1-3)
2 양치는 자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 당시에 양치는 직업은 육신의 삶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는 때였습니다. 창세기 9장에 노아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는 모든 식물이 홍수로 쓸려간 뒤라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가서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벨 당시에 양치는 직업은 육신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양은 오직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벨은 하나님 앞에 제사할 양을 기르는 일을 자기 직업으로 선택했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믿음을 선택했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직업 선택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기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영적인 선택을 하면 육신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주일날 일하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면 손해가 될 것만 같습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벨은 그렇게 될 것을 각오하고 양치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오늘 왜 교회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내 육신의 삶에 뭔가 유익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반대로 손해볼 것을 각오하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장사하는 일에 교회 다니는 것이 유익하고 결혼하는 일에 예수 믿는 일이 유익해서 믿는다면 그 믿음은 다 가짜입니다. 돈버는 일에 손해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 안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아벨이 양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고 그 일을 위하여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2. 세월이 지난 후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창4:3-4) 사람은 처음에는 누구나 다 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끝까지 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 분명하게 시간을 못박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에 수치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옷을 벗기고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인 너희들을 위하여 이 짐승처럼 죽으실 터인데 그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아담은 두 아들에게 이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사하며 하나님 섬기는 삶을 살아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어느 시점까지는 똑같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가인은 땅에 소산으로, 아벨은 양의 첫새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세월이 지나면서 두 가지 형태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세월이 지난 후에 믿음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하숙했던 경제학과 후배가 목사님 아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울먹이면서 말을 합니다. “형님, 우리 누나가 아파요.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 누나만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면 나도 목사가 될래요.” 그러나 누나는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그 친구는 예배 참석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나가보면 나도 예전에는 잘 믿었다고 말하는 사람 천지입니다. 과거 믿음이 오늘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믿음이 오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짓밟고 욕보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찮은 것으로 여겨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 세월이 지난 후에 더 믿음이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의 신앙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믿음을 보십시오. 어린 시절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소년 다니엘은 왕이 주는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그의 믿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에스겔서 14장을 보면 노아, 다니엘, 욥을 가리켜 의인이라 했습니다. 이중에 노아와 욥은 믿음의 잘한 측면과 실수하고 잘못한 부분도 함께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에 대해서만큼은 잘못한 것을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게 죄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을 보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신앙은 점점 더 올라가는 신앙이었습니다. 세상을 버리는 믿음이었습니다. 빨리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은 신앙이었습니다. 출발할 때 작은 차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커지기 마련입니다. 조카 롯과 아브라함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롯은 모압과 암몬이라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과 예배 “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창4:4-5) 예배에는 받으시는 대상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목적은 그 하나님이 받으시는데 있습니다. 옛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도 지성과 열성과 열심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은 항상 예배를 두 종류로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가인의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인은 어떻게 제사했고 아벨은 어떻게 제사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로 말하면 어떤 제사가 되는 것입니까
1 가인의 제사 가인은 내가 땀흘린 것으로, 내가 수고한 것으로 제사한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여 내가 최선을 기울인 것으로 구원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대충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가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이 아까워서 형식적으로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인이 드린 제사는 자기가 기울일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고백이 여기에 어울릴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수천 수만 마리의 짐승의 제사를 드릴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을 제물 삼아 드릴까 그것도 안되면 내 몸을 드릴까 고민하고 고민해서 내딴에는 최선의 것,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그 때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은 형식적으로 드린 것이라면 그렇게 화가 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를 드렸는데 안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화가 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는 바리새인의 제사였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2 아벨의 제사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로서 자기가 기르던 양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그는 피흘리며 죽어가는 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양처럼 주님 앞에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아벨이 드린 제사에는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이 그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양처럼 내가 죽어야 하는데 장차 오실 메시아가 대신 죽어 주심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고백으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고백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받으십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예배는 땅의 소산을 많이 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아벨이 드린 고백을 더욱 크게 풍성하게 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드려야 할 감사의 출발과 최종적인 종착점은 무엇입니까 구원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의 예를 하박국에서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런 상황이라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가장 큰 예배로 받으셨습니다. 하박국이 그해에 아무것도 드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가장 큰 것을 받으셨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집사님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집사님이 한참 동안 자기가 받은 축복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전에 사는 아들이 MBC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은행에 다니다가 명예 퇴직을 했는데 후에 경제위기가 터져 명예 퇴직하기를 백 번 잘했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퇴직금도 못 받을 뻔했는데 미리 퇴직하여 손해를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퇴직한지 몇 달만에 다시 상호신용금고에 이사로 취직을 했습니다. 보너스가 600%고, 한 달에 월급이 250만원이나 된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가정을 축복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들으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기분 나빠 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집사님의 입에서 나 같은 죄인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너무 감사합니다. 이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력 좋으면 어떤 직장이든 취직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재수 좋으면 퇴직한 다음날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못 받습니다. 자랑하려면 그걸 자랑해야 합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자랑은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이 말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이 감사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은혜가 너무 커서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어야 그것이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잡동사니를 갖다 붙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것은 다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감사 다 집어치우시고 이 사실만 매일 같이 감사할 수 있는 분이 참으로 믿음이 좋은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제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때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 앞에 더 많이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많이 드리지 못한 것, 그것을 미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물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절기에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만은 갑절로 넘쳐야 할 것입니다. 물질로는 하나도 드리지 못하나 맨입으로라도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의 기쁨을 주님 앞에 영광으로 돌리면 하나님은 그것을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린 것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가인은 땅에 농사하여 얻은 소출로 하나님 앞에 제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쌀, 과일, 무우, 배추 등으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내가 땀흘려 수고한 것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은 어떻습니까 양의 첫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미래적으로 바라보며 드린 것입니다.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지만 우리는 양을 잡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미리 다 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냥 맨입으로 이 사실을 고백하면 됩니다. 많은 물질로 많은 땅의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기 위해 힘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림으로 대속해 주신 구원에 대하여 넘치는 감사와 감격으로 나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가시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그냥 우러러 나오지 않는 한 그렇게 보이려고 가식을 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양만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믿음을 사람들 앞에 감추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없이 맨입으로 하십시오. 믿음으로만 하십시오. 온몸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잘먹고 잘살고 건강하게 하신 사실보다 구원받은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육신에 관련된 것은 얼마든지 바뀌고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아벨 같은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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