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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하나님 (마28: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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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삼위일체에 대한 신관입니다. 이 교리를 똑바로 이해 할 수 있다면 어느정도의 신앙의 기초가 다져진 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만을 가지고 그저 “삼위일체를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모르고 믿어서 안될 것은 없지만 알고 믿는 것만 못한 것이니 이단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르고 믿다가 이단에 걸려 들기가 쉬운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인 것입니다. 이단 종교들은 대부분 삼위일체를 부인하는데 그것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이단 종교가 그리스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게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가장큰 적은 바로 그리스도의 세력이기때문입니다. 앞으로 대환난때 공중에서 대 결투를 벌릴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적대 관계이기때문에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마음을 성도들의 마음에 심어줌으로 자기 편으로 삼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단 편이 된다는 말은 사단의 종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편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1.일단 삼위를 뺀 일체(一體)라는 말 속에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생각해 봅시다. 삼위일체는 말 그대로 삼위가 일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다신론을 가르치는 삼위신이 아닙니다. “일체”라고 하는 말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말입니다. 일체라고 하는 말이 바로 “단일신론”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일체”를 뺀 삼위신이라고 표현 한다면 “삼신론”이 되는 것이니, 그것은 다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신이 있고, 예수신이 있고, 성령님신이 있다는 뜻인데, 이것은 삼위일체에서 어긋나는 말입니다. 각각 제각기 다르게 존재한다면 기독교 교리에서 일체라는 용어를 빼고 삼위라고 해야 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즉 다른 시간 속에서 존재 했을 지라도 같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1) 성부, 성자, 성령님은 같은 진리 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진리란 여기서 동질성(Homogeneity,호모우제니어티)을 말합니다. “호모우제니어티”는 “같은 원리”라는 뜻이 입니다.
1 성부, 성자, 성령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 신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아들신이 탄생하셨고, 이 두분을 통해 성령님이 오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시간적으로 이론적으로 서열이 있다는 논리가 형성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서열을 따진다면 1위는 성부, 2위는 성자요, 3위는 성령님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서열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삼위는 세 인격자가 있다는 표현이지, 일위,이위,삼위를 가려내기 위해 삼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한분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일위, 이위, 삼위로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구태여 따져 본다면 예를 들어 성부하나님이 일위가 될 수도 있고 이위도 될 수도 있고 삼위도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성자,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2) 부부처럼 육체적인 면에서의 일체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때 삼위일체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실존하시는 존재인고로 영안으로 보아야 삼위일체의 확신이 생기는 것이며 이해가 됩니다. 삼위일체는 신의 존재 양식이기때문에 인간의 존재 양식에 대비하여 생각하거나 이론을 세울 수 없다고 합니다. 삼위일체를 알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 믿고자 하는데 있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느냐를 알아야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한 연약성과 하나님의 전능성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부부일체(夫婦一體)는 설명을 안해도 천주교 신부들이나 따지면 따졌지 삼위일체처럼 까다롭게 교리적으로 따지거나 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는 남녀 이성간의 일체를 말하지 않고, 말씀의 일체를 말합니다.
1 말씀의 일체를 말합니다.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약의 말씀이 성자 예수님이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왜 신약시대 오신 예수의 이름에는 “님”자를 붙이면서 구약시대 여호와의 이름에는 “여호와님”이라고 하여 “님”자를 붙이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럽디다 억양이 이상해서 그렇겠지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억양때문에 존경어를 뺀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왜 불공평하게 예수님의 이름에만 “님”자를 붙이는지 이해가 안되고, 또하나는 성령님은 이름이 아닌데도 성령님이라고 하여 “님”자를 붙입니다. 따라서 성부님, 성자님이라고 하여 님자를 다 붙여야 하나님을 존경하는 의미가 됩니다. 삼위일체를 믿는다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님의 말씀을 동일한 권위로서 그 말씀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성자를 무시하고,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고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부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위치에서 동일한 권위로 받아 들이고 있지 않기때문입니다.
2 사랑의 일체를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을 당하셨으니 예수님의 사랑이 성부의 사랑보다 더 강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삼위일체의 신앙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성부의 사랑, 성자의 사랑, 성령님의 사랑은 말씀이 동일한 권위를 지니신 것처럼, 사랑도 동일한 사랑인줄 믿습니다. 아멘! 부부일체라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육체적인 일체보다 사랑 안에서의 일체가 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삼위일체의 사랑속에 자신의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그리스도와 동질성을 느끼는 경지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3) 일본의 유명한 “우찌무라간죠”는 기독교 문답이란 책에서 하나님은 삼위의 일치(Union)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찌무라 간죠 그분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입장에서 일치한다고 한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인정하시면서 신학적인 표현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삼위에 일치라는 용어를 써서는 안될 것이다하는 생각이 제 소견입니다.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면 일치란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데 협동, 조화, 합치라는 뜻이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과 조화가 된다든가, 서로 협동한다든가 하는 교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조화라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일체라는 말에 대응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체”란 말과 “일치”란 말에는 서로 차이가 있는 말로서 일체가 더 심도깊은 표현입니다. 일치는 서로 다른데도 불구하고 일치할 수 있다는 의미이지만 일체는 서로 다른데 일체한다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서로 같기 때문에 일체가 되는 것으로 일체는 One Body, 또는 One Flesh를 말합니다.
2. 영어로 삼위일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Trinity"(트리너티)라고 합니다. 세개가 한조로 된 것도 삼위일체라고 한다고 영어사전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를 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별해서 사용해서 거룩성를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God, Spirit, Lord, Kingdom, 좌우지간 하나님과 관련된 단어들은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대문자로 써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합어로서 Tri+Unity가 합해서 된 말로서 “트리”는 셋이라는 뜻이고, “유너티”는 통일성, 불변성, 일관성, 결합성, 하나로 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삼위일체는 삼위가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습니다. 통일은 하나로서, 신약과 구약은 하나입니다. 그 말은 즉 신약과 구약이 하나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1600년이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놀라운 사실은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시대의 사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또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각계각층으로서 신분과 지식이 다를지라도 마치 한사람이 기록한 것처럼 완전한 통일성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삼위일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멘!
(2) 삼위일체는 삼위가 불변성이 있습니다.
1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와서도 불변합니다. 구약의 율법이 신약에 와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은 그 시대에 합당한 말이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 달라졌으며, 예수님의 피로 율법의 범죄는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용서의 힘은 있지만 범죄의 상처는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죄를 지어서 상처를 많이 남길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2 약속이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약속은 변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이에따른 약속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3) 삼위일체는 삼위가 결합성이 있습니다. 요일5:8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님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것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그 만남을 통해 우리 만민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세 분의 신이 세 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 분이 합해서 완전한 신성을 이루고, 한 분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3. 삼위일체로 결정된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살펴 봅시다.
(1) 칼빈 당시에 제네바에서 이 교리에 반대하다가 체포되어 화형을 당한 세르베투스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2) 삼위일체 교리가 니케아(Nicaea)에서 AD 325년 6월14일부터 42일 동안 회의한 결과 정립이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정식으로 교회에서 채택이 되기까지는 많은 논란과 학설이 있었습니다만 그것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주장 속에서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니케아”라는 곳에서 318명이 참여한 가운데 지금의 정통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니케아 신조”가 채택이 된 것입니다.
1 니케아 신조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 전승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자를 믿습니다.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이는 아버지로부터 특유하게 나셨고,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이요, 빛으로부터의 빛이요,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시되 만들어지지는 아니하셨고 아버지와 동일 본질입니다” 이와같이 니케아 신조에는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이때 반대파는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 유사 본질이라고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불행하게도 유사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로마황제가 출현하여 니케아 신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를 당하는 고난을 초래했는데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정통교리를 수립한 유명한 이론가입니다. 그러나 니케아 신조가 완전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이 같다는데 중점을 두다가 보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의 개체성이 흐려지기때문에 니케아 신조가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여러가지 논란 끝에 결국 한 본질에 세 인격이 있다는 정확한 교리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의 핵심 “하나의 동일한 본질에 세 인격”이라는 이 교리가 “콘스탄티노풀”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결말을 보게 되기까지는 니케아 신조가 발표된 후 56년간의 몇몇 사람들(바실래, 나지안 루스의 그레고리, 나사의 그레고리)의 피 눈물나는 선교와 설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2 콘스탄티노풀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완성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케아 신조보다 더 삼위일체에 대해 정확하게 기록을 해 놓은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기 까지는 100여년이라는 기간동안 논쟁과 연구 속에서 형성된 것인데도 오늘날 교인들은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그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간단하게라도 알 필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100여년 동안에 정립된 전통적인 정통에 입각한 중요한 삼위일체의 교리를 한 순간에 버리고, 이단에 빠져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볼 때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불트만”같은 현대 신학자들도 삼위일체를 없애 버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4. 신약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를 살핌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그 교리가 형성될 만한 내용들은 신구약 전체에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세계 선교명령”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1 삼위일체 교리의 근거는 인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본문에 아버지,아들,성령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 삼위가 일체가 된다고 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근거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이름이 “The name”으로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님이 일체가 아니라면 “Names”라고 복수로 나올텐데 여기서 분명히 단수로 나왔기 때문에 하나의 신임을 명시하는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2) 바울은 “축복사”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이 따로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한 심령위에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 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또 그리스도의 은혜는 있는데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없다면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성부만을 믿는 유대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3) 요한복음 14장 7절에서 11절까지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예수님 당신 자신 스스로가 성부 아버지와 동질성, 또는 동일 본질을 소유하고 계심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특히 23절에 보면 삼위일체가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이 성경구절을 살펴보면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와 동일한 것으로 보시기때문에 우리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한 것은 성령님으로 와서 내주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해 살펴 봅시다.
(1) 창세기 1장1절이 삼위일체 교리를 나타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에 성경 원문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명사는 단수가 아닙니다. 히브리의 엘로힘은 하나님의 복수입니다. 태초에 한분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한 분이상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분명히 다신론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분명히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하나님은 복수이지만 “창조하다” 단수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문장에서 복수와 단수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문장이 틀린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삼위이면서 일체가 된다는 뜻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2) 창1장 26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내용처럼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나타낸 성경 구절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형상은 성부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의 모양은 성자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성령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한 것은 삼위의 세 인격을 말하는 것이지 세 본질이 별도로 따로따로 있어서 우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삼위는 서로 유사본질이냐 아니면 동일 본질이냐 삼위일체는 다신론인가 단일신론인가 삼위는 서열이 있는 것이냐등 몇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에대한 해답은 동일본질이며, 단일신론이며,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즉 삼위는 인격을 말하는 것이고, 일체는 그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위는 다 동일한 분이요, 동일한 말씀이요, 사랑이요, 인격임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다 하나님의 성령님을 받아 그 본질에 참여하는 가장 큰 축복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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