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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족보, 생명의 족보 (창5:21-24)

본문

성경은 항상 두 가지를 강조해서 비교함으로 참과 거짓을 가르쳐 줍니다. 진리는 그 자체보다는 거짓과 비교해 볼 때 더욱 확실히 밝혀집니다. 별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밝게 빛납니다. 선은 악에 의하여 그 가치를 더하게 됩니다.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분명한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자식이요 뱀의 자식이라는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남들은 물론이요 본인들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들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망과 생명은 상대방에 의하여 더욱 확연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6절 이하의 본문은 사망과 생명을 대비시키며 극명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 사망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들 창세기 5장에서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에녹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900세 이상을 향수했습니다.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오늘날도 사람이 80 이상만 넘기면 장수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상 인간의 수명이 1000년을 육박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가히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목숨에 대하여 추할 정도로 깊은 애착을 갖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늙기 싫어서 이슬을 받아먹으며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몸에 좋다면 보신을 위하여 지렁이, 개구리, 뱀, 굼벵이 등 온갖 혐오식품도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불치병 환자들은 살기 위하여 처절한 몸부림을 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삶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이라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세상에서 장수하는 것보다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 말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루처럼 빨리 흘러 주님 앞에 가기를 소원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고는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고 지옥의 형벌이 두려운 사람은 어떻게든 하루라도 목숨을 더 연장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들에게 1000년 가까이 산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은 구세주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더 살면 무엇하겠습니까 인생에서 길고 짧음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했습니다. 수고와 슬픔뿐인 세상에서 무슨 재미를 보겠다고 그렇게 결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까 여러분, 왜 더 사시려 합니까 아픈 사람에게 물어보면 가족들을 그 이유로 듭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는 것입니다. 십 년만 더 살아서 아이들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갈 나이가 되면 미련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 때문에 내 자녀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 때문에 내 아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공중을 나는 새도,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이 친히 먹이고 입히신다고 했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살리고 죽이십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부러움은 장수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장수가 복이고, 건강이 복이고, 재물이 복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 복과 저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우리의 모든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살았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과 하와의 저주를 남보다 더 오래 지속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2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세기 5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말씀은 낳고 그들이 ‘몇 년을 향수하고 죽었더라’입니다. 동일하게 획일적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각양 다른 모습으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압축해서 정리하면 ‘낳고 살고 죽었더라’입니다. 지혜를 얻고 싶은 중국의 한 왕이 학문이 깊은 신하를 불러서 인생의 지혜를 얻을 만한 책들을 골라 오도록 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신하는 소가 끄는 수레에 수백 권의 책을 싣고 왔습니다. 너무 많은 분량에 입이 벌어진 왕은 신하에게 바쁜 업무를 하면서 그 책을 다 볼 수 없으니 그 중에서 100권만 골라 오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몇 년이 지나자 신하는 100권의 책을 고르고 또 골라서 가지고 왔습니다. 왕은 그 책도 너무 많다 여겨 그 중에 한 권만 골라 오도록 했습니다. 어느 책이 가장 좋은 책일까 신하는 또 몇 년이 지나 한 권의 책을 골라 왕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때 왕은 이미 노쇠하여 병석에 누워 있었고 신하도 늙어 있었습니다. 왕은 이미 자신과 같이 늙은 신하를 보면서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해 보라고 했습니다. 신하는 “인생은 낳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낳고 살고 죽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았다는 개인적인 차이가 다소 있을 뿐 인간은 다 똑같이 낳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이 동일성과 획일성을 인간은 아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 이름이 기록된 이들은 1000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1000년 가까이 살았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이렇게 길게 살았어도 결국은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사람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은 본문 안에 나오는 이들이 1000년 가까이 산 것을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얼마를 살았든지 관계없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끝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모두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자기 죽음의 문제를 맡길 수도 없고 맡아 줄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죽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3 사망의 족보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삯은 다름 아닌 사망이었습니다. 미인도 죽고 영웅호걸도 죽습니다. 이름 없는 민초도 죽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 동시대를 살았으나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왔던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고, 그 뒤를 부자가 뒤좇았습니다. 세상에서 거지와 부자로 살았던 이들이 죽음 후에는 전혀 다른 삶을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부처님도 죽었고 공자도 죽었습니다. 모두가 다 죽었고, 오늘 생명을 호흡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 죽을 것입니다. 죽음은 존재의 소멸이 아닙니다. 존재의 분리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영적인 죽음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둘째 육체의 죽음은 육체와 자기 영혼의 분리입니다. 셋째 영원한 죽음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던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던 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0-21) 개나 고양이에게는 영혼도 없고 심판도 없습니다. 흙으로 말미암은 육체는 다 흙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동물과 사람이 동일합니다. 육체의 호흡이 끊어졌을 때 동물은 영혼이 없기에 그 존재의 소멸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는 흙이 되어 사라져도 영혼은 영원히 남아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1000년 가까이 산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장수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닙니다. 이만큼 살고 결국은 다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사망의 족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부러운 눈으로 이들을 보지 말고 죽음과 심판 앞에 숙연함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2. 생명을 향해 걸어갔던 사람들 창세기 5장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녹에게 이르러서는 ‘죽었더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또 부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자식이 없어 멸시받던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식을 낳고 어떻게 신앙을 고백하는가를 보십시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식이 있을 것이라 하면 본인이 믿든지 안 믿든지 그들에게는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이삭,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 등입니다. 반대로 죽으리라 한 사람은 또 반드시 죽었습니다. 나봇이 피흘린 곳에서 네가 죽고 네 피를 개들이 와서 핥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대로 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역사를 40년 동안 친히 목격한 사람입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시90:3-5)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고 불신앙하고 원망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사람들도 남김없이 다 죽었습니다. 40년 동안 200만이 죽었습니다. 하루에 137명꼴로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세는 하나님이 인간의 생명을 홍수처럼 쓸어 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은 잠깐 잠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아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말라진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120세로 자기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늙고 기력이 진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120세였으나 그의 건강은 어떠했습니까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34:7) 건강한 모세의 생명도 하나님이 부르시니 모든 미련을 접어두고 가는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반석을 두 번 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40년이 흘러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세가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하나님이 다 주장하십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이라면 사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향수하고 죽었더라’ 했을 때 ‘죽었더라’는 말을 지워 버릴 재간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고 죄값으로 죽는데 안 죽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에녹의 경우를 통해서 그 사실을 살펴보겠습니다. 에녹은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할 수 있었습니까
1 하나님이 그와 동행해 주셨습니다. 본문에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창5:22)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이 하나님을 믿고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게 하시고 동행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믿고 동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셔야만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면서 그가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에게 왔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3:25) 했습니다. 에녹이 믿었다면 굳이 그가 65세에 믿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믿었으면 더 좋았을 것 아닙니까 그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살았었는데 므두셀라를 낳던 그 해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실 때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천국은 내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셔야 합니다. 자신과 동행하던 에녹을 하나님이 어느 날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믿어 내 힘으로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게 하셔야 하며 하나님이 데려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은 죽기 싫어서 안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육신의 죽음에 이르지 않은 시기에 그를 데려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4 생명의 족보 에녹은 아담의 7대손입니다. 에녹의 이름이 창세기 5장에서 부각되는 것은 죽음과 생존이 강하게 대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의 한계를 깨뜨리는 능력으로 다가옵니다. 에녹은 죽음과 상관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받은 사람은 그냥 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사망의 족보입니다. 이 사망의 족보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죽었더라’는 사망의 역사가 단절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기에 생명의 족보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1:1-3) 창세기 5장과 비교해 볼 때 드러나는 마태복음 1장 족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향수하고 죽었더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물론 이들은 다 자기의 연수를 살고 육신적으로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기에 이들은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었으나 산 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는 살아 있어도 죽은 자입니다. 여러분은 이 두 개의 족보 가운데 과연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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