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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신앙 (창5: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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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습니다. 창세기 5장의 900세 이상을 살았던 사람들의 명단은 장수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라 사망의 족보에 속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들이 이렇게 오래 살았어도 결국은 죽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심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습니다. 에녹부터 노아까지는 하나님의 생명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망과 반대되는 생명에 속하여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 홍수가 터졌습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방주를 120년 동안 지을 때까지 므두셀라는 생존해 있었고 방주 만드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그는 777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노아 600세 되던 해에 홍수가 있었습니다. 라멕이 노아를 낳은 나이 182에 노아 나이 600세를 더하면 782가 됩니다. 라멕은 777세를 살았으니까 홍수가 일어나기까지 5년 전까지 생존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 라멕은 노아와 더불어 방주 만드는 일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들은 노아를 노아되게 하고, 노아로 하여금 노아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 라멕의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이름을 노아라 하여 라멕은 182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노아’라 했습니다. 그 뜻은 ‘안식’, 혹은 ‘위로’입니다. 우리는 라멕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한 사실을 통해 그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사랑하는 자녀를 낳고 장난하듯 이름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심사숙고해서 짓는 것입니다. 생각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전화번호부를 갖다 놓고 좋은 이름을 고르기도 합니다. 국어사전을 뒤척이며 의미를 생각하며 짓습니다. 불신자들은 아이의 운명을 생각하여 작명가에게 이름짓는 일을 맡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친히 이름을 지어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이 짓는 이름과 하나님이 지으시는 이름과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1 사람이 짓는 이름 인간이 짓는 이름은 아이의 장래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인간적인 바램을 갖고 짓습니다. 대부분 땅에서 잘되고 번성하기를 원하는 이름들입니다. 크고 높게, 많고 강하게 되기를 바라며 자녀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러한 이름들은 철저하게 인간적이며 기복적이며 세속적입니다. 그러나 자녀에게 그렇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좋은 이름을 지어도 그 이름대로 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부천에 기면 기둥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원로 목사님이 고용봉 목사님입니다. 높을(高), 용(龍), 봉황봉(鳳)입니다. 이 이름을 짓기에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심하셨을까요 제가 볼 때도 인간적으로는 참 좋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볼 때는 너무 안 좋은 이름입니다.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보니 자기 이름이 너무 나쁜 이름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목사가 되려면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름을 바꿔야 할까보다 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예수 안에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습니다. 이름이 중요하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후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목회에 전념하여 큰 교회를 이루시고 지금은 은퇴하셔서 원로 목사님으로 계시면서도 복음사역에 힘쓰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이 짓는 이름 하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친히 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은 내가 이 아이를 내 뜻대로 사용하겠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깊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담, 므두셀라, 노아, 아브라함, 이스라엘, 베드로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름들은 하나 같이 신앙적이며 소망적이며 내세적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소원을 담아 자녀의 이름을 지었다 할지라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꼭 그 이름의 의미대로 되었습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이 그들의 생애를 그렇게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3 관계를 형성하는 이름 이름은 상대방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지만 그 호칭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형성된 관계에 의하여 불려집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이찬희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은 아들이 효린인데 부를 때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아들아!”하고 부르십니다. 대신 사모님을 부를 때 “효린아!” 하십니다. 그 이유를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굳이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아들임을 자타가 다 압니다. 그래도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부를 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의 관계를 다시 확인하게 되고, 부자간의 정이 더 깊어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당히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라멕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면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신자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야 할까요
2. 저주받은 땅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저주받은 땅은 다시 인간에게 가시와 엉겅퀴를 주었습니다. 인간이 먹는 모든 음식물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쌀, 보리는 물론이고 각종 채소에도 인간을 찌르는 가시가 다 있습니다. 사람인 이 가시에 찔리며 살기 위해 수고의 땀을 흘리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이 흐르는 수고는 죄지은 인간에게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고를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거부할 때는 더 큰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거부해서 거부될 수 있는 사안도 아닙니다. 다만 수고의 땀을 흘리면서 인간의 죄를 깨닫는 믿음과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의 크기를 통해서 인간의 죄의 크기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우리는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큰 아픔과 고통이 있어도 그것은 지옥의 영원한 형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옥의 저주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아는 사람은 어려움 중에 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 어떤 환경 속에 있어도 항상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생 살아야 할 이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곳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살다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다같이 어려움이 많습니다. 남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저 사람은 죄를 많이 지었는가보다’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왜 나만 이 고통을 다 겪어야 하나.’ 원망할 필요 없습니다. 나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시간에 각기 다른 문제 때문에 각기 다른 고통을 다 겪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더욱 고통스러워 집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왜 나만 이런 병에 걸려야 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은 몇 배나 가중되는 것입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받아야 돼!’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뒤집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논리대로라면 다른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도 괜찮고 나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에 또 있습니까 나는 병걸리면 안되고 남은 걸려도 괜찮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남과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았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구원 때문에 나는 고통받아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습니다. 나는 예수님 한 분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만났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다만 내 개인의 문제로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이 고통도 아픔도 예수님 때문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여러분은 가장 큰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은 저주받은 땅입니다. 이 땅은 마지막 날에 다 불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이 땅에 살기는 하지만 날마다 이 땅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서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이 땅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히11:13)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1:1) 베드로는 성도들을 가리켜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했습니다.(벧전2:11)가장 큰 저주는 저주받은 땅에 미련과 애착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뱀(마귀)은 범죄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보다 더욱 큰 저주를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3:14) 뱀은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존재로 몸의 형체가 변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 온 몸을 밀착시키고 기어다니는 뱀의 모습은 저주받은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이 땅에 재물과 명예를 쌓고, 애착과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의 소유에 상관없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빠져 나올 때에 뒤를 돌아다 본 연고로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땅을 보지 말고 눈을 들어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3:1-6) 라멕의 신앙은 이 땅이 저주받은 곳임을 알고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3.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다시 정리해 봅시다. 라멕의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었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고 그가 한 맨 처음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이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안위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라멕의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라멕은 ‘이 아들이 우리를 안위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노아가 안위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안위하시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므두셀라와 라멕과 노아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무엇인가 열심히 만들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와서 무엇을 만드느냐고 물었습니다. 방주를 짓는 것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방주는 배입니다. 배는 바다를 떠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산위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방주를 바닷가에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방주는 바닷물로 떠오를 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 방주는 하늘에서 40주야를 쉬지 않고 쏟아질 비와 깊음의 샘이 터져서 넘쳐 날 물에 의하여 떠오를 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계시를 받지 못한 남들이 볼 때 노아 일행은 완전히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므두셀라와 라멕과 노아는 많은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라멕은 처음부터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습니다. 그리고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했습니다. 라멕은 믿음대로 사는 생활 때문에 핍박받을 것을 처음부터 결심한 것입니다. 위로는 슬픔과 고통과 수고를 경험한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했습니다.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는 반드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복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11-12) 주를 위한 핍박은 복입니다. 주의 위로가 기다리고 있으며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라멕은 사람의 인정이나 위로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인정, 우리 주님의 위로만을 소망했습니다. 핍박을 받은 자에게 주님의 위로나 안식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은 그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심판 개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로받을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조롱과 멸시를 안겨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로 대적한 이들에 대한 심판이 그들로 인하여 고난받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 안에 계시는 주님이 노아와 라멕과 므두셀라를 위로하듯 오늘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나와 애통하는 자와 여러분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알고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알고 인생을 살아가면 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문제들 앞에서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듯 고난과 아픔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몸으로 체험하게 되며 다시 한번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라멕은 그 믿음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갔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를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고난 중에 있는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실 위로를 믿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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