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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으로부터의 구원 (창6:14-22)

본문

심판과 구원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다만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똑같은 시기에 누구에게는 심판자로, 누구에게는 구원자로 하나님이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심판 가운데 구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말하면 내가 무엇이 부족해서 구원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구원은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게 아닙니다. 가난이나 부족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미국의 거지는 에디오피아에 가면 재벌 수준입니다. 구원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의 대상이 되어 심판을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나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마3:7,10) 심판이 코앞에 닥친 것은 모르고 누가 잘났는가만 따지고 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은 롯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러 온 천사들을 끌어내라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여야 하리라 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 역시 임박한 심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심판을 전제로 해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리석기가 한량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질책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가을에 소출을 해보니 너무 풍년이었습니다. 기존의 가지고 있던 곡간으로는 곡식을 다 보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자는 낡은 곡간을 헐어 냈습니다. 새로 넓고 크게 곡간을 짓고는 그곳에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했습니다. 이 부자를 향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눅12:20) 인생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심판이 있음을 알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그와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는 죽음과 심판에 대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전7:2)
1. 하나님의 심판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창6:17) 하나님은 사람들의 불신앙과 악함 때문에 세상을 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누가 심판합니까 ‘내가’라고 했습니다. 그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심판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을 행하시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 심판의 방법-‘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심판의 주체가 하나님이듯 심판의 방법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홍수를 땅에 일으켜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했습니다. 시기와 대상에 따라 심판의 방법도 달라집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소돔과 고모라는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셨습니다.
2 심판의 대상-‘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심판의 대상은 천하에 호흡이 붙어 있는 모든 생명체였습니다.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6:7) 사람과 동물, 공중의 새까지도 다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여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탈주범 신창원도 경찰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3 심판의 결과-‘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심판은 이 땅에서 호흡하는 모든 생명들의 죽음이었습니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창7:21-23)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인하여 코로 호흡하던 모든 생명들이 다 죽었습니다. 다른 모든 생명들은 그것으로 심판이 끝났으나 인간만큼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제 죽어도 죽습니다. 어떻게 죽어도 죽습니다. 이들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은 불타 죽었습니다. 누구는 늙어 죽고, 어떤 사람은 병들어 죽습니다. 그러나 죽는 것이 심판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합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태어난 생명은 한번은 다 죽게 되어 있고 심판은 그 후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홍수로 인하여 죽은 것을 보고 비참하다고 말하거나 그것으로 그들의 심판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심판은 죽음 이후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떠나 육체가 된 사람들의 호흡을 홍수로 끊으시고 그 영혼들을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고통받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2.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앙에 빠져 죄악된 삶을 살아갈 때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갔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시대와 풍조에 밀려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과 환경 탓으로 돌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삶은 달랐습니다. 노아의 삶은 ‘그러나’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창6: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과 환경 탓으로 돌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갈지라도 나는 그들과는 달리 세상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에 있어서 ‘그러나’가 항상 강조되고 드러나는 사람이 온전한 성도입니다. 그러면 ‘그러나’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노아에게 주셨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너와는 언약을 세우리니’ 하나님은 그 당시의 모든 사람을 버려두시고 오직 노아하고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신과 세우신 언약대로 시행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식언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신 약속이 본문 18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창6:18-20) 심판 이전에 하나님이 구원하실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정과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 쌍과 부정한 짐승 암수 한 쌍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들은 다 살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에 의하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심판 가운데 이미 구원해야 할 백성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요18:9)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사람이 맞습니까 하나님께서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맞습니까 구원받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렇다 말하지 말고 정말로 그런 믿음과 확신이 나에게 있는지 스스로의 구원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3. 구원을 주신 하나님 구원은 심판 가운데 구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나 노력이 자기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가진 구원에 대한 보편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 내면에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고 안 짓고에 관계없이 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죄의식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구원을 위해서 끝없는 노력을 기울이게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나의 노력과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으로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철 종정입니다. 그는 평생 무명옷 한 벌을 걸치고 생식을 하며 수도에 정진했던 사람입니다. 죽을 때 남긴 열반송 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 하늘에 가득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산에 걸려 있다. 성철 스님은 자기 입으로 나는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간다고 말했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철저하게 물어야 할 것은 그 주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어서도 유일한 한 길이었습니다. 구원을 위한 다른 카드가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계셨던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모든 사람이 그를 믿어서 구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죄없는 의인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죄인의 모습으로 죽어야 죄인인 우리가 의인처럼 사는 역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만큼은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순종했던 것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다른 말을 하고 행위를 내세우는 것은 십자가를 심히 욕보이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어도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왜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한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데 다른 한 사람은 전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낯설기만 합니까 주의 성령님이 그에게는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님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성령님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며 구원은 내가 받고 싶다고 받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도 못 믿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반 동안 따라다니고도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보고도 믿지 못했는데 우리는 보지 않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믿고 있는데 내가 믿고 싶어서 믿었습니까 아니면 믿기 싫은데 억지로 오다보니까 이 자리입니까 내 힘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나를 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믿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에 있어서 자기를 자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노아와는 하나님이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노아가 잘나서입니까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은혜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선물로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심판이 전제되지 않고는 구원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원인과 심판의 방법과 심판의 결과를 아는 자만이 바른 구원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그 숱한 사람들을 버려두시고 나를 찾아와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건지고 계십니다. 앞으로 건지실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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