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삭개오와의 만남 (눅19:1-10)
본문
어떤 분이 사주팔자에 올해 당신은 “귀인을 만날 팔자요”라고 해서 기대를 잔뜩걸었는데 누가 전도를 해서 교회에 나가고보니 그 귀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귀인을 만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야 “뭐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은 누군가 여러분들이 반드시 만나야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보다도 귀한 분은 없네!”하면서 찬송은 잘 부르면서 귀한 생명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을려고 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라고 입만 나불나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하다가도 주일날만 되면, “오늘은 좀 일이 있어서 말야!” 라고 교회의 문을 등지고 마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만난 것이 아닙니다.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나가 보기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리라”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끊어 오르는 듯한 애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애타는 마음이 있는 분들이 앞에 나와서 영혼의 양식인 그 말씀에 간절히 귀를 귀울입니다. 맨숭맨숭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몸만 나와있지 마음은 교회 밖에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삭개오와 같은 “믿음의 열정”과 그리고 “준비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항상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하는 마음이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이 만날 기회를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에 품은 것이 실현화 될 수 있는 기회가 한번씩은 다 지나갑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은 기도와 인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1. 첫번째로 삭개오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1) 삭개오는 겉으로는 세리장이요, 부자이며, 속으로는 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교인이지만, 속으로는 죄인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겉(겉사람)으로는 죄인이지만, 속(속사람)으로 의인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사실, 세상 직업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은 사회적 위치라는 측면에서 신앙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마음의 태도와 위치에서 각자 자신의 신앙을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목사님! 직업상 바빠서 교회에 못 나옵니다.” 그런 소리를 들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의 핑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는 물론 직업상 만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심령적 갈등과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하는 신념을 가지고 만날려고 했던 것입니다. 먼저 죄인(罪人)의 입장에서 고백해야만 그다음, 자녀의 입장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즉 죄인의 입장에서 회심의 단계를 거쳐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은 자녀의 입장에서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웨슬레의 3단계-첫번재 회심 두번째-중생 세번째-성화의 단계를 말했습니다.
(2) 삭개오란 뜻은 “순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이름답지 않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기록했습니다. 바로 의사직업을 가진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세리장이라고 했는데 세리는 부정하게 세금을 받아 들일 뿐아니라 그 중의 일부를 흑심을 가지고 “꿀꺽 삼키고” 그 나머지를 로마에 바치는 로마정부의 앞자비 노릇을 했으니 이름의 뜻하고는 정반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유때문에 세리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도 인정을 못받는 실정이였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대상이 된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에게 “죄인으로 찍힌 사람”으로 인정을 해 버렸고, 그들이 세리에 대한 가치기준은 창기와 똑같이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마21:31)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그 사람의 행함과 삶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그 이름이 본 위치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름이 진균인데 참되고 고르게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참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좋은 이름도 예수님을 만나야 빛이 나고, 축복을 받는 성함이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름 그대로 순결한 자로 되돌아 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름의 획수 보다도 이름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이름이란 성명학의 획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이름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이름을 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조건과 주위 환경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러가지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봅시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눅19:3)
(1)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작아” 한 것은 신체적 결함입니다. 삭개오가 작아서 뽕나무가 유명해 진 것도 아니고 뽕나무가 있어서 삭개오가 유명해 진 것도 아닙니다. 키가 작다, 뽕나무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은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못 생기고, 하는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손가락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은 엄지 손가락인데 힘은 제일 강합니다. 주먹을 쥐면 4손가락은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만 작은 엄지 손가락은 겉으로 나와 네 손가락을 통솔합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7장 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야고보서 2장 1절에 “사람은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체적인 결함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믿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것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데 그 방법은 뇌하수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흰쥐 실험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어려움이 많은 것이 키를 몇 센티미터(CM)를 크게 하는데 돈이 엄청나게 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남대문 국민 학교 다닐 때에 늘 아버님이 공중으로 점프하는 것을 권면하시기도 하시면서 “농구 선수가 되어라”라고 하면서 점프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수 방에서 천정을 향해서 뛰어 오르시면서 시범을 보이시던 옛적일이 생각납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농구 선수가 되라고 하신 것은 진짜 농구 선수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키가 커지도록 하시기 위해 점프를 하게하기 위한 전략이였던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얼마든지 멋지게 아름답게 귀엽게 이쁘게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상에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살 때, 가장 멋지게, 가장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즉 영혼은 지상에서 자라나도록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 하늘나라에서는 영혼이 성장하지를 않습니다.
(2) 둘째로 “사람이 많아” 한 것은 환경적인 이유와 조건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기도 하지만, 환경을 극복하며, 지배하기도 합니다. 불리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해야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지배하며 사는 자가 운명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입니다. 환경에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이 있는데 삭개오의 경우를 보며는 키가 작은 것은 신체에 속한 것이지만 신체는 자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키는 자연환경이며, 세리라는 직업은 사회환경입니다.
(3) 세째로 “할수없어”한 것은 주위환경을 말합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삭개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겨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있고, 사람의 노력으로 불가능를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노력이 최선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어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겠습니까 땅위에서 노력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늘에서 능력이라는 광명이 비출 것입니다.
3. 본문 4절에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앞으로 달려 갔습니다.
1 앞으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뛰어갔는데 이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의도 입니다. 신앙은 달리기와 같은 것이지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착순(군대)에 의해서 상급의 분량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신앙경쟁에 있어서 남보다 빨리 달려 가야 합니다.
2 뒤로 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갔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전진하는 신앙입니다. 눈이 앞에 달린 것은 앞을 바라보고 전진하기 위합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 가노라” 운동경기에 있어서 육상종목을 보면 트랙부분이나 필드부분이나 모두 앞으로 향하는 경기 입니다. 여러분들은 뛰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기어가는 신앙이고, 따근한 신앙은 걸어가는 신앙이고, 뜨거운 신앙은 뛰어가는 신앙입니다. 불같은 신앙은 날아가는 신앙입니다. 히6:18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 왜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습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달려 갔습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만나 주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단순히 볼려고만 했지만 예수님은 만나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려고 했겠습니까 세금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천만예요 그러면 교리상의 논쟁을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기가 높아서 호기심에서 만날려고 했겠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삭개오는 특별한 이유없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를 사랑했기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세리를 미워하던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세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들었을 것으로 보며 그런 이유로 해서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려고 한 것입니다.
4. 삭개오는 부끄러움과 창피한 것과 체면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창피한 것과 체면때문에 전도도 못하고, 교회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전도하거나, 교회에 나오거나 하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낮예배 때도 말씀하셨지만, 기도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 부모님과 함께 식당엘 들어간 생각이 나는데 기도하라는 말에 얼마나 창피하던지 한참 후에야 용기를 내서 억지로 기도한 적이 생각납니다.
(2) 뽕나무에 올라 간것은 예수님을 만날려는 열심과 노력이 엿보이는 행동입니다. 올라가는 신앙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1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릿앗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3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 갔다가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었습니다.
5.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 4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 가시게 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언제다시 같은 기회가 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과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지만 그 기회 속에 있는 또하나의 기회는 믿음의 기회요, 회개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께 향한 믿음의 기회를 놓치면 복록을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욥기30:15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예수님이 구름같이 그저 지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구름이 대지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단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폭풍우를 몰고오는 구름보다 단비를 몰고오는 구름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축복의 단비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삼상10:7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예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잠간 지나가듯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들에게 믿음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재림하시게 되는 데, 그 이전에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먼저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통하지 않고서야 어찌! 만날 수 있겠습니까
(2)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부친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한 세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모두 어부 출신였다는 점을 명시해야 합니다.
(3) 실제로 예수님이 여러분 앞을 지나가신다고 한다면 어떻게 인사를 할 것이며 어떻게 말할 것인지 제가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1 “예수님! 저는 주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하면서 집에 모시고 들어가서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2 “나는 죄인입니다.”하면서 회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3 불신자 같으면 “예수도 별거 아니구먼 우리와 뭐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여러분! 삭개오처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머물도록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요 저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면 “너무기뻐서 말문이 막힐 것 같습니다.” 6. 예수님은 삭개오와의 만남에서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었는가를 검토해 봅시다.
(1) 삭개오에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하는 약속과 누구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는 것은 회개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런 말이 마음에서 우러날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삭개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제일 기쁜 소식이였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 다는 일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인 줄 믿습니다. 육으로 살기때문에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2)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문 목적은 구원이였음을 보여줍니다. “뽕나무가 어떻고” “삭개오 키가 어떻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요는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본문의 결론(Conclusion) 입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야 “뭐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진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분은 누군가 여러분들이 반드시 만나야 하시는 생명의 근원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보다도 귀한 분은 없네!”하면서 찬송은 잘 부르면서 귀한 생명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찾을려고 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여! 주여! 라고 입만 나불나불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입술로 주여! 주여! 하다가도 주일날만 되면, “오늘은 좀 일이 있어서 말야!” 라고 교회의 문을 등지고 마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만난 것이 아닙니다.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나가 보기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리라”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끊어 오르는 듯한 애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교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애타는 마음이 있는 분들이 앞에 나와서 영혼의 양식인 그 말씀에 간절히 귀를 귀울입니다. 맨숭맨숭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몸만 나와있지 마음은 교회 밖에 있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삭개오와 같은 “믿음의 열정”과 그리고 “준비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삭개오는 항상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다”하는 마음이 준비 되어 있었습니다. 만나기를 원하는 자는 하나님이 만날 기회를 반드시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뜻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마음에 품은 것이 실현화 될 수 있는 기회가 한번씩은 다 지나갑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놓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은 기도와 인내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1. 첫번째로 삭개오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1) 삭개오는 겉으로는 세리장이요, 부자이며, 속으로는 죄인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교인이지만, 속으로는 죄인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때가 많이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겉(겉사람)으로는 죄인이지만, 속(속사람)으로 의인이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 있어서는 사실, 세상 직업과 하등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 뜻은 사회적 위치라는 측면에서 신앙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마음의 태도와 위치에서 각자 자신의 신앙을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목사님! 직업상 바빠서 교회에 못 나옵니다.” 그런 소리를 들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의 핑게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는 물론 직업상 만날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입장에서 자기의 심령적 갈등과 고민을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하는 신념을 가지고 만날려고 했던 것입니다. 먼저 죄인(罪人)의 입장에서 고백해야만 그다음, 자녀의 입장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즉 죄인의 입장에서 회심의 단계를 거쳐야만, 의인으로 인정받은 자녀의 입장에서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웨슬레의 3단계-첫번재 회심 두번째-중생 세번째-성화의 단계를 말했습니다.
(2) 삭개오란 뜻은 “순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 이름답지 않게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기록했습니다. 바로 의사직업을 가진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세리장이라고 했는데 세리는 부정하게 세금을 받아 들일 뿐아니라 그 중의 일부를 흑심을 가지고 “꿀꺽 삼키고” 그 나머지를 로마에 바치는 로마정부의 앞자비 노릇을 했으니 이름의 뜻하고는 정반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유때문에 세리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도 인정을 못받는 실정이였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대상이 된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리들에게 “죄인으로 찍힌 사람”으로 인정을 해 버렸고, 그들이 세리에 대한 가치기준은 창기와 똑같이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마21:31) 이름과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그 사람의 행함과 삶에 일치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만나야 그 이름이 본 위치로 되돌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이름이 진균인데 참되고 고르게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참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좋은 이름도 예수님을 만나야 빛이 나고, 축복을 받는 성함이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이름 그대로 순결한 자로 되돌아 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름의 획수 보다도 이름의 뜻이 더 중요합니다. 좋은 이름이란 성명학의 획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이름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 이름을 짖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자신의 조건과 주위 환경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러가지로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봅시다.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눅19:3)
(1)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작아” 한 것은 신체적 결함입니다. 삭개오가 작아서 뽕나무가 유명해 진 것도 아니고 뽕나무가 있어서 삭개오가 유명해 진 것도 아닙니다. 키가 작다, 뽕나무가 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은 키가 크고, 잘 생기고, 못 생기고, 하는 외모를 중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손가락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은 엄지 손가락인데 힘은 제일 강합니다. 주먹을 쥐면 4손가락은 속으로 기어 들어가지만 작은 엄지 손가락은 겉으로 나와 네 손가락을 통솔합니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 7장 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야고보서 2장 1절에 “사람은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신체적인 결함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체적 결함이 신앙으로 승화되어 믿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키가 작은 것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데 그 방법은 뇌하수체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흰쥐 실험을 통해 증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어려움이 많은 것이 키를 몇 센티미터(CM)를 크게 하는데 돈이 엄청나게 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키가 작아서 남대문 국민 학교 다닐 때에 늘 아버님이 공중으로 점프하는 것을 권면하시기도 하시면서 “농구 선수가 되어라”라고 하면서 점프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수 방에서 천정을 향해서 뛰어 오르시면서 시범을 보이시던 옛적일이 생각납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농구 선수가 되라고 하신 것은 진짜 농구 선수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키가 커지도록 하시기 위해 점프를 하게하기 위한 전략이였던 것입니다.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얼마든지 멋지게 아름답게 귀엽게 이쁘게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은 믿음으로 여러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상에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 살 때, 가장 멋지게, 가장 아름답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즉 영혼은 지상에서 자라나도록 기회가 주어진 것이지 하늘나라에서는 영혼이 성장하지를 않습니다.
(2) 둘째로 “사람이 많아” 한 것은 환경적인 이유와 조건입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기도 하지만, 환경을 극복하며, 지배하기도 합니다. 불리한 환경과 조건을 극복해야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지배하며 사는 자가 운명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입니다. 환경에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이 있는데 삭개오의 경우를 보며는 키가 작은 것은 신체에 속한 것이지만 신체는 자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환경에 속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키는 자연환경이며, 세리라는 직업은 사회환경입니다.
(3) 세째로 “할수없어”한 것은 주위환경을 말합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삭개오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옮겨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있고, 사람의 노력으로 불가능를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노력이 최선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어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겠습니까 땅위에서 노력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늘에서 능력이라는 광명이 비출 것입니다.
3. 본문 4절에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앞으로 달려 갔습니다.
1 앞으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뛰어갔는데 이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의도 입니다. 신앙은 달리기와 같은 것이지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착순(군대)에 의해서 상급의 분량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신앙경쟁에 있어서 남보다 빨리 달려 가야 합니다.
2 뒤로 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갔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전진하는 신앙입니다. 눈이 앞에 달린 것은 앞을 바라보고 전진하기 위합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 가노라” 운동경기에 있어서 육상종목을 보면 트랙부분이나 필드부분이나 모두 앞으로 향하는 경기 입니다. 여러분들은 뛰어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은 기어가는 신앙이고, 따근한 신앙은 걸어가는 신앙이고, 뜨거운 신앙은 뛰어가는 신앙입니다. 불같은 신앙은 날아가는 신앙입니다. 히6:18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2) 왜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습니까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달려 갔습니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만나 주십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단순히 볼려고만 했지만 예수님은 만나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 왜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려고 했겠습니까 세금을 받기 위해서 입니까 천만예요 그러면 교리상의 논쟁을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인기가 높아서 호기심에서 만날려고 했겠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삭개오는 특별한 이유없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를 사랑했기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세리를 미워하던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 세리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 들었을 것으로 보며 그런 이유로 해서 삭개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려고 한 것입니다.
4. 삭개오는 부끄러움과 창피한 것과 체면을 무릅쓰고 뽕나무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습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창피한 것과 체면때문에 전도도 못하고, 교회도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전도하거나, 교회에 나오거나 하는 것은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낮예배 때도 말씀하셨지만, 기도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 부모님과 함께 식당엘 들어간 생각이 나는데 기도하라는 말에 얼마나 창피하던지 한참 후에야 용기를 내서 억지로 기도한 적이 생각납니다.
(2) 뽕나무에 올라 간것은 예수님을 만날려는 열심과 노력이 엿보이는 행동입니다. 올라가는 신앙은 만남의 축복입니다.
1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갔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2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릿앗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3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에 올라 갔다가 모세와 엘리야를 볼 수 있었습니다.
5.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 4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 가시게 됨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언제다시 같은 기회가 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과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지만 그 기회 속에 있는 또하나의 기회는 믿음의 기회요, 회개의 기회입니다. 예수님께 향한 믿음의 기회를 놓치면 복록을 놓치는 것과 같습니다. 욥기30:15 “내 복록이 구름같이 지나갔구나!” 예수님이 구름같이 그저 지나가게 해서는 안됩니다. 구름이 대지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단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래도 폭풍우를 몰고오는 구름보다 단비를 몰고오는 구름을 더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축복의 단비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삼상10:7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예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잠간 지나가듯이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들에게 믿음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재림하시게 되는 데, 그 이전에 우리는 예수님의 영을 먼저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통하지 않고서야 어찌! 만날 수 있겠습니까
(2)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부친 세베대와 함께 그물을 깁다가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한 세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모두 어부 출신였다는 점을 명시해야 합니다.
(3) 실제로 예수님이 여러분 앞을 지나가신다고 한다면 어떻게 인사를 할 것이며 어떻게 말할 것인지 제가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1 “예수님! 저는 주님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하면서 집에 모시고 들어가서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싶을 지도 모릅니다.
2 “나는 죄인입니다.”하면서 회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3 불신자 같으면 “예수도 별거 아니구먼 우리와 뭐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여러분! 삭개오처럼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머물도록 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요 저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면 “너무기뻐서 말문이 막힐 것 같습니다.” 6. 예수님은 삭개오와의 만남에서 어떤 문제들이 해결되었는가를 검토해 봅시다.
(1) 삭개오에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하는 약속과 누구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는 것은 회개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런 말이 마음에서 우러날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삭개오의 가정에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소식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제일 기쁜 소식이였습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 다는 일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인 줄 믿습니다. 육으로 살기때문에 구원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2) 눅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머문 목적은 구원이였음을 보여줍니다. “뽕나무가 어떻고” “삭개오 키가 어떻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요는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본문의 결론(Conclusion)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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