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구원 (창3:21-24)
본문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완전하고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이르러 뱀의 간교함과 인간의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을 이용하여 마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계를 흐트러 놓았습니다.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알기 위하여 이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명령과 금령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창2:17)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이며 금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경계를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2 불신앙과 불순종 그러나 이렇듯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하와는 뱀과의 대화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약화시키고 변개시켰습니다. 뱀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로 하와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3 죄의 근본동기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범죄하게 된 과정은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범죄의 동기였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자기 본래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으로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고 만 것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와 그것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겠습니다.
1. 죄지은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들에게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죽이기 위해서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의 크기를 통해 죄악의 깊이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그 괴로움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고통과 저주에서 건지시고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골1:13)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죽음의 의미도 성경에서는 점점 확대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죽는다는 의미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요3:19, 8:12, 12:35, 12:46) 바울은 죽음의 의미를 마귀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보았습니다.(엡2:1, 히2:14) 그래서 죽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육신에 거하는 동안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고생을 해도 괜찮습니다. 인생은 고생이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생을 안 한다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욕심이 늘 많습니다. 그러나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오히려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2. 부끄러운 수치에서의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죄짓고난 뒤에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창세기 2장에서는 서로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안 부끄러워했습니까 한 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오른손이 왼손을 보고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짓고난 후에 왜 부끄러워합니까 이제 한 몸 됨이 깨어진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물으실 때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줌으로 먹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담과 여자는 남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단절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단절되었음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수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망이며 멸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치를 가려주는 것은 곧 구원이 됩니다. 수치만 가려지면 끊어진 모든 관계는 회복되고 구원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치는 누가 어떻게 가려 줍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때에 수치가 굴러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계시 사건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갈수록 확대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수치를 가렸습니까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안 죽고 그냥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노아에 이르러서는 방주를 만드는 의미로 확산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심판이 면제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구원받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계시는 없으며 구원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달리 제시하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결국 십자가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피흘린 짐승의 가죽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마치 에녹이 안 죽고 하늘나라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수치가 굴러간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육적 몸을 벗는 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진짜 할례입니다.
3. 저주받은 땅에서의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그 땅에서 일생 동안 수고하여야 얼굴에 땀이 흘러야 비로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온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주받은 땅에서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처음에 땅이라고 할 때는 그 땅은 가나안 땅을 국한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땅은 인간의 모든 육신적인 삶의 영역으로 그 의미가 확대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2-5) 하나님은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은 어디에 숨겨져 있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이방 종교인들이 심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땅에 심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라고 하나님이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는 너희가 어디 가서 장사한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안개라는 것은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며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을 때 이것은 땅에 기대를 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낳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아니고 탐심이 아닌 것을 추구하면 영생을 낳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영생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도 믿고 영생얻어 천국 가자고 해 놓고 이 땅에서 사이좋게 지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부터 구원받는 것은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늘의 주님을 생각하고 찾는 것입니다.
4. 생명나무의 길은 차단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죽음의 의미가 점점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방합니다.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죽이면 될텐데 왜 안 죽입니까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고 했으면 죽이면 되는데 안 죽이고 계속 살려두면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추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생명나무 없는 것은 몽땅 죽음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생명나무가 없는 세계는 모두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개념이 점점 더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넓게 확대되어집니다.
영생이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나무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천사가 지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큐티를 하면 생명나무를 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면 생명나무를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나오면 주신다고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생명나무는 차단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복받을 것이다.’ 그것은 소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인만의 착각입니다. 환상입니다. 생명나무는 차단되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생명과 영생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칼을 가지고 몸을 찌르며 기도했습니다. 칼로 사람의 몸을 찌르면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아서 순간적으로 황홀한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되면 게거품 물고 뒤로 자빠집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영생받았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짓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습니다. 그 범죄의 결과는 생명나무로부터의 단절이었습니다. 생명나무의 길에서 차단되었다는 이 한 마디로써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도 받지 않으십니다. 받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아벨이 착한 인간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이 이용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노력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죽을 때만 인간의 되가 용서받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의 제사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화낼 필요 없이 아벨의 제물을 보면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는구나 하고 믿으면 될 것인데 갑자기 안색이 확 달라집니다. 안색이 달라지니까 그 때 가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곡식의 제사를 안 받는다고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안색이 달라지니까 그때 가서 가인에게 죄가 노리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추방당한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방법이 없습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기에 못 따먹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주셔야 먹습니다. 하나님은 노력한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생명으로 다가갈 때만 죽음의 세계에도 생명이 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 명령과 금령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창2:17)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이며 금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경계를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2 불신앙과 불순종 그러나 이렇듯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하와는 뱀과의 대화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여 하나님 말씀을 약화시키고 변개시켰습니다. 뱀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따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로 하와를 설득했습니다. 결국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3 죄의 근본동기 하와가 선악과를 먼저 따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범죄하게 된 과정은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불순종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범죄의 동기였습니다. 마귀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자기 본래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탐욕으로 선악과를 바라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서고 만 것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와 그것으로부터의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보겠습니다.
1. 죄지은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들에게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죽이기 위해서 아니라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고통의 크기를 통해 죄악의 깊이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고통과 괴로움은 인간에게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그 괴로움은 그만큼 줄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런 고통과 저주에서 건지시고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골1:13)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죽음의 의미도 성경에서는 점점 확대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죽는다는 의미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어둠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되었습니다.(요3:19, 8:12, 12:35, 12:46) 바울은 죽음의 의미를 마귀가 활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보았습니다.(엡2:1, 히2:14) 그래서 죽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육신에 거하는 동안 인간에게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고생을 해도 괜찮습니다. 인생은 고생이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고생을 안 한다고 행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욕심이 늘 많습니다. 그러나 고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오히려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2. 부끄러운 수치에서의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죄짓고난 뒤에 제일 먼저 일어난 현상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왜 부끄러워합니까 창세기 2장에서는 서로가 벌거벗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 안 부끄러워했습니까 한 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오른손이 왼손을 보고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짓고난 후에 왜 부끄러워합니까 이제 한 몸 됨이 깨어진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물으실 때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줌으로 먹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담과 여자는 남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각자 제 갈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의 관계단절만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단절되었음을 강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수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망이며 멸망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치를 가려주는 것은 곧 구원이 됩니다. 수치만 가려지면 끊어진 모든 관계는 회복되고 구원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수치는 누가 어떻게 가려 줍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수5: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행할 때에 수치가 굴러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계시 사건입니다. 성경의 계시는 갈수록 확대됩니다. 창세기에서는 어떻게 수치를 가렸습니까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에녹에게는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안 죽고 그냥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노아에 이르러서는 방주를 만드는 의미로 확산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심판이 면제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가 구원받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계시는 없으며 구원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달리 제시하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결국 십자가를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의 수치를 피흘린 짐승의 가죽으로 수치를 가려준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마치 에녹이 안 죽고 하늘나라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음으로 수치가 굴러간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1-12)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것입니다. 육적 몸을 벗는 것을 영적으로 적용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진짜 할례입니다.
3. 저주받은 땅에서의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그 땅에서 일생 동안 수고하여야 얼굴에 땀이 흘러야 비로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온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저주받은 땅에서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처음에 땅이라고 할 때는 그 땅은 가나안 땅을 국한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땅은 인간의 모든 육신적인 삶의 영역으로 그 의미가 확대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3:2-5) 하나님은 땅에 있는 육체를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우상은 어디에 숨겨져 있었습니까 가나안 땅에 이방 종교인들이 심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땅에 심는 것은 모조리 우상숭배라고 하나님이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에는 너희가 어디 가서 장사한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안개라고 했습니다. 안개라는 것은 소중하지 않다는 뜻이며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했을 때 이것은 땅에 기대를 거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에 보면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생을 낳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가 아니고 탐심이 아닌 것을 추구하면 영생을 낳습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영생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뒤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4:4)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도 믿고 영생얻어 천국 가자고 해 놓고 이 땅에서 사이좋게 지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저주받은 땅에서부터 구원받는 것은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늘의 주님을 생각하고 찾는 것입니다.
4. 생명나무의 길은 차단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죽음의 의미가 점점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의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추방합니다. 이 말은 상당히 어려운 말입니다. 죽이면 될텐데 왜 안 죽입니까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고 했으면 죽이면 되는데 안 죽이고 계속 살려두면서 생명나무가 없는 곳으로 추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그들을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생명나무 없는 것은 몽땅 죽음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생명나무가 없는 세계는 모두 죽음의 세계입니다. 이제 죽음의 세계에 대한 개념이 점점 더 확실해집니다. 그리고 넓게 확대되어집니다.
영생이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생명나무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천사가 지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큐티를 하면 생명나무를 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면 생명나무를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나오면 주신다고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생명나무는 차단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됩니다. ‘내가 이렇게 기도했으니까 복받을 것이다.’ 그것은 소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인만의 착각입니다. 환상입니다. 생명나무는 차단되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들이 생명과 영생에 도달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칼을 가지고 몸을 찌르며 기도했습니다. 칼로 사람의 몸을 찌르면 신경세포가 자극을 받아서 순간적으로 황홀한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렇게 되면 게거품 물고 뒤로 자빠집니다.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영생받았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짓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했습니다. 그 범죄의 결과는 생명나무로부터의 단절이었습니다. 생명나무의 길에서 차단되었다는 이 한 마디로써 인간의 모든 종교적인 행위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구원을 위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도 받지 않으십니다. 받는 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아벨이 착한 인간이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입니다.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이 이용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노력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죽을 때만 인간의 되가 용서받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의 제사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화낼 필요 없이 아벨의 제물을 보면서 하나님이 영생을 주는구나 하고 믿으면 될 것인데 갑자기 안색이 확 달라집니다. 안색이 달라지니까 그 때 가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곡식의 제사를 안 받는다고 경고하신 것이 아닙니다. 안색이 달라지니까 그때 가서 가인에게 죄가 노리고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추방당한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방법이 없습니다.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기에 못 따먹습니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주셔야 먹습니다. 하나님은 노력한다고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생명으로 다가갈 때만 죽음의 세계에도 생명이 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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