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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뜻 (눅10:33-37)

본문

자비의 뜻은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자비와 사랑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9가지 열매중에 사랑도 들어가고, 자비도 들어가는데 뚜렷하게 자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사랑과 자비를 비교해서 그 의미를 뚜렷하게 알고 지나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맺어지는 계약의 의미가 포함되지만 자비는 계약의 의미가 없이 사랑은 하지만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기반으로 약속을 맺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서 결혼한다는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남편이라고 표현 했습니다.(호2:16) 이것은 바로 약속을 맺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약속의 책으로 신약, 구약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사랑의 책도 됩니다. 가엾게 여기는 것은 사랑보다 자비가 더 적절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대자대비”란 말을 쓰지만, 기독교에서는 지극히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강조합니다. 불교의 핵심적 교리는 자비입니다.서로 불상히 여기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서로 자비심을 가지고 불상히 여기니 불상을 섬길 수 밖에 없습니다. 불교에서 쓰는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 설교하면서 아뿔싸! 라고 하는 말을 했다가 아버님으로부터 충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퍽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기독교가 차지 한 것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석가”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자비로운 석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기독교가 갖는 권위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이며, 이것은 약속의 종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자비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싸드”리고 헬라어로 “엘레오”로서 그 뜻은 뿔쌍히 여긴다, 측은히 여긴다, 자비를 베푼다,친절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은 “아가페”인줄 여러분들이 다 아십니다만 아가페라는 원어의 의미 속에는 “존경”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을 존경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높여 줄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의 미덕입니다. 사랑이 기독교의 핵심이지만 존경하지 않고, 서로 비판하고 무시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빵점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존경, 인격적인 의미의 존경은 나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나이를 따져도 영은 시간을 초월하기때문에 나이를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니까 할아버지가 어린아이에게 아주 공손히 절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아니 왜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공손하게 절을 합니까라고 질문을 하니 이 어린아이는 나보다 훨씬 천국에 먼저 들어 온 할아버지 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존경심을 갖고 베푸는 일이 아니라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돕는 것입니다.
2.본문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가엾게 여겨 도와준 사건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우리는 사마리아 이방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어떻게 하였는가 사랑한 것인가 자비를 베푼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하여 친절을 베풀었으니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까 ” 피가 나는 사람을 그냥 짐승에 태워 조급하게 여관(주막)으로 데려간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기름, 포도주을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괴테는 말하기를 친절은 사회를 결합하는 금사슬이라고 하였습니다.
(2) 영어로 자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봅시다.
1 자비는 영어로 “Mercy”인데 자비라는 뜻외에 “고마운 일”이란 말의 뜻도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생명의 은인과 같습니다.
2 영어의 “머시(Mercy)는 “마음대로 하는 힘”이란 뜻도 있습니다. 사랑은 마음대로 하는 힘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지만 자비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사 마음대로 하는 힘을 주셨으니 우리는 자비지심을 가지고 마음껏 남을 불상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선을 행해야 될 것입니다.
(3)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으니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본문 33절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 36-37절에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세사람 중에 (레위인, 제사장, 선한 사마리아인)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율법사는 대답하기를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는 데 참으로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만일 “사마리아 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예수님이 또다시 질문을 하셨을 것입니다. “어째서 사마리아 인이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대답을 잘 했기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은 질문을 하지 아니하시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3.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비뿐만 아니라 사랑을 한 사람입니다.
(1) 강도 만난 사람을 중간에 두고 주막 주인과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36절에 “데나리온 둘을 주며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 갚으리라” 예수님은 우리 불쌍한 인간들을 중간에 두고 아버지와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자와 성부의 약속, 성자와 인간의 약속, 성자와 성령님의 약속, 약속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2) 이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해 볼 때 현실적으로는 자비이지만 영적으로 해석을 내린다면 사랑입니다. 따라서 타락한 존재인 불상한 육신은 자비를 영혼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대하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육신 위주의 종교인 불교는 자비에 중점을 두지만, 영혼 위주의 종교인 기독교는 사랑에 더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9가지 열매가 중요하겠지만 사랑이 제일 귀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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