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두고 청년 (행20:7-12)
본문
바울 사도가 그 다음날 드로아를 떠나야 하기때문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기 위하여 밤중까지 설교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설교를 듣는 도중 유두고라는 청소년(Teenager)이 3층에서 떨어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오히려 귀한 교훈을 주는 의미심장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3차 전도 여행 도중 안식후 첫날 성찬식을 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건의 문제점을 발견해서 깊은 영적의미와 깨달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말씀을 주님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1.유두고의 이목구비 즉 (귀,눈,입, 코)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지체가 영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나약한 인간성에 더 나약해 지는 것이고, 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1) 유두고는 신령과 진정과 경건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었다면 눈에 셔타를 내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원하니까 뛰쳐 나오지 않고 졸아도 그냥 그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안전한 위치에서 듣고 졸았어도 문제가 되는 데 불안전한 위치에서 졸았으니 십중팔구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설교는 듣긴 들었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잘자라 우리 유두고야”하는 자장가가 되었으며 “혼자 나팔 잘도 분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는 식으로 강론을 들었던 것이니 사단이 “널 죽여 버리겠다”하고 뒤로 밀어 넘어뜨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유두고에게 말씀은 우이독경이었으며 나무가지에 앉아 콩밭을 생각하는 비둘기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듣는 귀가 막혔고 자동적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파이프도 막혔으니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이름 유두고여 불쌍하도다!” 이제 내일이면 바울은 “굳빠이”를 해야하는 판인데 당연히 마지막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했죠! 그러나 헛귀를 가진 유두고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으니 그것은 시간을 놓친 것이 아니라 값진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말씀의 진주를 놓치고 만것입니다. 잠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죽음의 자리에 이른다는 사실을 잘 교훈해 주고 있는 본문 내용 입니다. 남자는 한쪽귀로 들은 말이 한쪽 귀로 빠져나간다고 하지만 여자들은 양쪽귀로 들은 말이 입으로 빠져 나간다고 합디다. 입으로 빠져 나가는 말이 기도와 찬양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입으로 빠져 나가는 말이 기도가 아니라 “종알종알”“쏙떡쏙닥”이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누가 들으면 쑥떡을 해먹자는 말인줄 알겠네요
(2) 졸지 말아야 할 눈이 감겼고 졸지 말아야 할 시간에 졸았습니다. “조는 것은 죽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일본말에서는 조는 것을 눈이 무거워졌다고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설교 시간에 유두고처럼 졸음이 오면 “끄덕 끄덕”하면서 조십시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아! 저 목사님이 말씀을 잘해서 끄덕끄떡하면서 인정을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것은 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와 자살해서 죽는 사람 모두 합하여 하루에 평균적으로 5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육안으로 졸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고 영안으로 졸다가 자살해서 죽는 것입니다.
1 시13:3에 다윗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노라”라고 시를 쓴 다윗이 낮잠을 잔 후 졸린 눈으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다가 큰 시험에 부닥쳤습니다.
2 삼손은 자다가 시험에 들어 두 눈까지 빼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11제자가 기도대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자 모두 다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4 요나는 배밑창에서 자다가 깊은 물에 빠져 큰 물고기에 삼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후7:10에 보면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유두고는 영안에 힘이 없었으니 아무리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뜬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 그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안을 크게 떠야만 보이는 분입니다. 제아무리 눈이 1.5 1.5면 무엇하느냐 그말입니다. 신자들은 시력보다는 영력을 따져야 제대로 된 신자입니다.
(3) 유두고 청소년의 입은 아멘과 찬송이 끊어졌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아멘! 아멘! 으로 화답했더라면 정신이 번쩍! 번쩍!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멘을 잘해야 A-men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에이멘”이라고 합니다. 아멘을 잘해야 A급 사람, 즉 “에이멘”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All-A를 받으면 장학금을 받습니다. 귀와 눈과 입은 항상 같이 행동하는 행동파 삼총사입니다. 귀가 막히면 눈과 입도 막히고 또 눈이 막히면 귀와 입도 막힙니다. 참으로 어쩌면 그렇게 연락이 잘되고 잘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두고의 중심부 수뇌부를 사단이 한손에 쥐고 장악을 하고 있으니 자동적으로 눈,귀, 입은 노예가 되어 피지배를 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열려져 있는 창가에 걸터 앉았던 유두고의 마음의 창은 정반대로 닫혀져 있었습니다. 입술 앞에 하나님이 파송한 파숫꾼이 있었다면 입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입을 열어 외쳐라! 나는 지금 졸고 있으니 제발 꼬집어 주세요! 라고 외쳐라”라고 말입니다. 아니면 “이곳이 비좁은데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좁혀 앉즙시다”라고 파숫꾼은 입에게 말하도록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시141:3에 다윗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4) “이목구”(耳目口) 즉 귀와 눈과 입이 막혔으니 결국 “비”(鼻)가 막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목구와 비의 싸움, 즉 3:1의 싸움에서 코는 결국 숫자의 열세에 밀려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이목구”가 활동을 못하고 있었어도 “비”는 그래도 숨을 쉬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결국은 3층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짐으로 이목구비가 모두다 활동정지하여 All Stop하게 되어 죽음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이목구비 중에서 그래도 코가 가장 활동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왜그런가하니 코는 희생적이 되어서 다들 자는데 코만 깨어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을 하고 있으니 입을 대신하여 “드르렁 드르렁”소리까지 내고 숨까지 쉬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이 유두고는 어떠한 상황 속에 있었는가를 우리 다함께 살펴 봅시다.
(1) 준비없이 바울의 부흥집회에 참예한 유재두가 아니라 유두고는 위험한 곳에 앉아 있었으니 어리석게도 컴컴한 밤에 그것도 일층에 있는 창이 아니라 높은 삼층이나 되는 창에 걸터 앉았습니다. 자신의 위험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은 원래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앉지 말아야 할 곳에 앉았으니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아야 영혼이 기뻐하며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타락을 원하지 않기때문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영혼이 살이 안쪄서 “말라깽이”가 됩니다. 여러분! 타락되서는 안되겠습니다. 비 도덕적이고, 비 양심적이고, 비 위생적인 자리는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즉 될 수 있는 한이 아니랄 반드시입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신앙의 위험지대에서 “정처없는 방랑 삼천리”가 되어 김삿갓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신자들이여! 십자가 본연의 위치를 떠나지 맙시다.! 우리들의 마음의 위치는 진리가 샘솟는 바로 그 곳, 말씀의 터전입니다.아멘! 요즈음 현대판 유두고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교회는 없지만 다른 교회는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 군인, 예술가 할것없이, 말씀이 부족해 심령 영양 결핍증에 걸린 현대판 유두고들이 얼마나 많은지 위태로운 그들을 그 누가 알아주랴! 그 누가 건져주랴! 불상한 영혼들이여! 그들을 아시고 건져 줄 분은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드리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아멘! 할렐루야! 어느 계층인가를 막론하고 신앙의 안전지대를 찾는다면 이 나라가 평안해 질 것이니 그 안전지대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 환난때의 안전지대는 피난처요 보호처입니다.
(2) 결국 드디어 예상했던대로 유두고는 “두고두고 후회할 여유도 없이” 그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탑갑게도 인간인지라 날개 쭉지가 없었던 것이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쉬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날개를 안 주신것도 저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잘 때 목욕할 때등등 여러모로 오히려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가 추락했는지 이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자동차가 높은 곳에서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스피드의 초과달성, 핸들링 미숙, 또는 정비불량등 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준비성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들입니다.
1 추락은 영적타락의 모형입니다. 타락은 선의 자리에서 악의 자리로 떨어져 선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밝은 빛 교회입니다만 선의 자리는 밝고 높은 경지이고, 악의 자리는 어두울뿐 아니라 낮고 비참한 곳입니다. 유두고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 사건은 높고도 높은 말씀의 경지에서 낮고도 낮은 비진리의 컴컴한 어두움의 자리로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면서 떨어뜨릴려고 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락은 등불이 켜져 밝은 곳이였으나(행20:8) 밑에는 암흑이 였던 것이였습니다. 암흑은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2 그가 졸다가 “앗차”하는 순간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순간”이라고 하는 단어가 참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눈을 깜빡하는 동안”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깜빡하는 동안 생각이 정로를 벗어나 타락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눈으로 윙크하는 것은 좋지만 두눈으로 윙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러분! 그와 반대로 “눈을 깜빡하는 동안” 아주 좋은 깨달음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아이디어(Idea)가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눅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고 마귀는 순간을 이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는 신자들에게 천국(천상일국)을 보여주지 않고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우상 경배 사상을 심어 줍니다. 우리들 모두는 순간의 불운한 죽음이냐(욥34:20) 아니면 순식간의 영광스러운 변화냐(고전15:51)는 두가지 기로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3 저는 유두고 청년의 약점만을 들추어내어 비판하자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유두고 교훈을 통해 그를 거울삼아 과오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교훈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유두고의 준비성 부족은 좋은 앞자리를 놓쳤고 은혜의 시간을 뺏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의 준비없이 교회에 오시면 “마귀야 내게로 오라”고 하는 듯이 “끄떡끄떡”하면서 제스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님과 함께 나오시면 졸음의 자리에 않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에 앉혀 주시는 것입니다.
4 두고두고 후회할 유두고라 할지라도 본 받을 만한 한가닥의 빛줄기는 비추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가닥의 가느다란 생명줄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는 창가에 걸터 앉긴 하였지만 그래도 말씀을 들을려고 참예한 한사람으로 볼 때 참석 안한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행20:9에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라는 표현은 졸음을 이길려고 힘을 썼다는 말입니다. 졸음이 조금만 와도 “애라 모르겠다 그냥 자버리자”가 아니라 졸음이 자꾸 도전해 오니 결국 어쩔수 없이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 깊이 조는 상황이 온다하더라도 어둠의 권세를 이길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태도를 보시고, 사단에게 설상 진다하더라도 결국 이기게 되도록 상황을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아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길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아시고 바울을 통해 살려주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3) 유두고는 순간의 죽음이였지만 그는 다시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행20:10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면서 그를 살렸습니다. 유두고의 추락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영적의미는 타락자에 대한 영혼몸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어두운 암흑 세계에 그 귀한 몸을 던져 희생하셨습니다. 유두고의 경우를 통해서 두가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가능성이 있는 타락입니다.(불완전한 타락) 불완전한 타락은 좋지만 불완전한 구원은 나쁜 것입니다. 이는 생명이 있는 타락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즉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은혜로운 타락입니다. 유두고나 탕자의 경우입니다.
2 가능성이 없는 타락입니다.(완전한 타락) “지옥의 자식들”이란 영화제목이 옛날에 있었습니다만 말 그대로 지옥의 자식들로 낙인 찍힌 자들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 못하니 얼마나 불상합니까 이 유두고의 실제적 사건은 비극적인 이야기 같으면서도 결국 해피앤드(Happy End)로 끝나는 교훈적인 사건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주님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예를 들면 “강도를 만나 어떤 사람” “탕자이야기” “잃어버린 양 한마리” 등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계시록의 마지막도 보며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 또는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의 찬란한 모습등 최후의 행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삶도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시고,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1.유두고의 이목구비 즉 (귀,눈,입, 코)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지체가 영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나약한 인간성에 더 나약해 지는 것이고, 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1) 유두고는 신령과 진정과 경건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었다면 눈에 셔타를 내릴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요,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원하니까 뛰쳐 나오지 않고 졸아도 그냥 그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안전한 위치에서 듣고 졸았어도 문제가 되는 데 불안전한 위치에서 졸았으니 십중팔구 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설교는 듣긴 들었어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 “잘자라 우리 유두고야”하는 자장가가 되었으며 “혼자 나팔 잘도 분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하는 식으로 강론을 들었던 것이니 사단이 “널 죽여 버리겠다”하고 뒤로 밀어 넘어뜨린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유두고에게 말씀은 우이독경이었으며 나무가지에 앉아 콩밭을 생각하는 비둘기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듣는 귀가 막혔고 자동적으로 생명을 공급하는 파이프도 막혔으니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 밖에 없었던 “그 이름 유두고여 불쌍하도다!” 이제 내일이면 바울은 “굳빠이”를 해야하는 판인데 당연히 마지막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했죠! 그러나 헛귀를 가진 유두고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으니 그것은 시간을 놓친 것이 아니라 값진 하나님의 보배와 같은 말씀의 진주를 놓치고 만것입니다. 잠2:2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죽음의 자리에 이른다는 사실을 잘 교훈해 주고 있는 본문 내용 입니다. 남자는 한쪽귀로 들은 말이 한쪽 귀로 빠져나간다고 하지만 여자들은 양쪽귀로 들은 말이 입으로 빠져 나간다고 합디다. 입으로 빠져 나가는 말이 기도와 찬양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입으로 빠져 나가는 말이 기도가 아니라 “종알종알”“쏙떡쏙닥”이 되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누가 들으면 쑥떡을 해먹자는 말인줄 알겠네요
(2) 졸지 말아야 할 눈이 감겼고 졸지 말아야 할 시간에 졸았습니다. “조는 것은 죽는 연습”이라고 합니다. 일본말에서는 조는 것을 눈이 무거워졌다고 표현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설교 시간에 유두고처럼 졸음이 오면 “끄덕 끄덕”하면서 조십시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아! 저 목사님이 말씀을 잘해서 끄덕끄떡하면서 인정을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것은 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통사고와 자살해서 죽는 사람 모두 합하여 하루에 평균적으로 5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육안으로 졸다가 교통사고 나서 죽고 영안으로 졸다가 자살해서 죽는 것입니다.
1 시13:3에 다윗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노라”라고 시를 쓴 다윗이 낮잠을 잔 후 졸린 눈으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다가 큰 시험에 부닥쳤습니다.
2 삼손은 자다가 시험에 들어 두 눈까지 빼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11제자가 기도대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자 모두 다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4 요나는 배밑창에서 자다가 깊은 물에 빠져 큰 물고기에 삼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후7:10에 보면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 유두고는 영안에 힘이 없었으니 아무리 눈을 왕방울처럼 크게 뜬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느냐! 그말입니다. 예수님은 영안을 크게 떠야만 보이는 분입니다. 제아무리 눈이 1.5 1.5면 무엇하느냐 그말입니다. 신자들은 시력보다는 영력을 따져야 제대로 된 신자입니다.
(3) 유두고 청소년의 입은 아멘과 찬송이 끊어졌습니다. 바울의 말씀을 아멘! 아멘! 으로 화답했더라면 정신이 번쩍! 번쩍! 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멘을 잘해야 A-men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에이멘”이라고 합니다. 아멘을 잘해야 A급 사람, 즉 “에이멘”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도 All-A를 받으면 장학금을 받습니다. 귀와 눈과 입은 항상 같이 행동하는 행동파 삼총사입니다. 귀가 막히면 눈과 입도 막히고 또 눈이 막히면 귀와 입도 막힙니다. 참으로 어쩌면 그렇게 연락이 잘되고 잘 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두고의 중심부 수뇌부를 사단이 한손에 쥐고 장악을 하고 있으니 자동적으로 눈,귀, 입은 노예가 되어 피지배를 당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열려져 있는 창가에 걸터 앉았던 유두고의 마음의 창은 정반대로 닫혀져 있었습니다. 입술 앞에 하나님이 파송한 파숫꾼이 있었다면 입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렸을 것입니다.“입을 열어 외쳐라! 나는 지금 졸고 있으니 제발 꼬집어 주세요! 라고 외쳐라”라고 말입니다. 아니면 “이곳이 비좁은데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좁혀 앉즙시다”라고 파숫꾼은 입에게 말하도록 지시를 내렸을 것입니다. 시141:3에 다윗은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4) “이목구”(耳目口) 즉 귀와 눈과 입이 막혔으니 결국 “비”(鼻)가 막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목구와 비의 싸움, 즉 3:1의 싸움에서 코는 결국 숫자의 열세에 밀려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이목구”가 활동을 못하고 있었어도 “비”는 그래도 숨을 쉬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결국은 3층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짐으로 이목구비가 모두다 활동정지하여 All Stop하게 되어 죽음의 자리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이목구비 중에서 그래도 코가 가장 활동적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왜그런가하니 코는 희생적이 되어서 다들 자는데 코만 깨어서 일인이역(一人二役)을 하고 있으니 입을 대신하여 “드르렁 드르렁”소리까지 내고 숨까지 쉬고 있습니다.
2. 그러면 이 유두고는 어떠한 상황 속에 있었는가를 우리 다함께 살펴 봅시다.
(1) 준비없이 바울의 부흥집회에 참예한 유재두가 아니라 유두고는 위험한 곳에 앉아 있었으니 어리석게도 컴컴한 밤에 그것도 일층에 있는 창이 아니라 높은 삼층이나 되는 창에 걸터 앉았습니다. 자신의 위험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은 원래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앉지 말아야 할 곳에 앉았으니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말아야 영혼이 기뻐하며 손뼉을 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타락을 원하지 않기때문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영혼이 살이 안쪄서 “말라깽이”가 됩니다. 여러분! 타락되서는 안되겠습니다. 비 도덕적이고, 비 양심적이고, 비 위생적인 자리는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즉 될 수 있는 한이 아니랄 반드시입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자는 신앙의 위험지대에서 “정처없는 방랑 삼천리”가 되어 김삿갓처럼 방황하게 됩니다. 신자들이여! 십자가 본연의 위치를 떠나지 맙시다.! 우리들의 마음의 위치는 진리가 샘솟는 바로 그 곳, 말씀의 터전입니다.아멘! 요즈음 현대판 유두고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교회는 없지만 다른 교회는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정치인, 종교인, 기업인, 군인, 예술가 할것없이, 말씀이 부족해 심령 영양 결핍증에 걸린 현대판 유두고들이 얼마나 많은지 위태로운 그들을 그 누가 알아주랴! 그 누가 건져주랴! 불상한 영혼들이여! 그들을 아시고 건져 줄 분은 진실로 진실로 말씀을 드리니 바로 그리스도 예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아멘! 할렐루야! 어느 계층인가를 막론하고 신앙의 안전지대를 찾는다면 이 나라가 평안해 질 것이니 그 안전지대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 환난때의 안전지대는 피난처요 보호처입니다.
(2) 결국 드디어 예상했던대로 유두고는 “두고두고 후회할 여유도 없이” 그만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도 날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탑갑게도 인간인지라 날개 쭉지가 없었던 것이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쉬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이 날개를 안 주신것도 저는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잘 때 목욕할 때등등 여러모로 오히려 불편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가 추락했는지 이제는 잘 아실 것입니다. 자동차가 높은 곳에서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스피드의 초과달성, 핸들링 미숙, 또는 정비불량등 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준비성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들입니다.
1 추락은 영적타락의 모형입니다. 타락은 선의 자리에서 악의 자리로 떨어져 선으로부터 이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밝은 빛 교회입니다만 선의 자리는 밝고 높은 경지이고, 악의 자리는 어두울뿐 아니라 낮고 비참한 곳입니다. 유두고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 사건은 높고도 높은 말씀의 경지에서 낮고도 낮은 비진리의 컴컴한 어두움의 자리로 떨어짐을 의미합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뛰어내리라고 하면서 떨어뜨릴려고 한 사실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다락은 등불이 켜져 밝은 곳이였으나(행20:8) 밑에는 암흑이 였던 것이였습니다. 암흑은 생명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2 그가 졸다가 “앗차”하는 순간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순간”이라고 하는 단어가 참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눈을 깜빡하는 동안”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깜빡하는 동안 생각이 정로를 벗어나 타락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눈으로 윙크하는 것은 좋지만 두눈으로 윙크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여러분! 그와 반대로 “눈을 깜빡하는 동안” 아주 좋은 깨달음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아이디어(Idea)가 떠오를 수도 있습니다. 눅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것이 되리라” 저는 이 성경구절을 읽고 마귀는 순간을 이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귀는 신자들에게 천국(천상일국)을 보여주지 않고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우상 경배 사상을 심어 줍니다. 우리들 모두는 순간의 불운한 죽음이냐(욥34:20) 아니면 순식간의 영광스러운 변화냐(고전15:51)는 두가지 기로점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3 저는 유두고 청년의 약점만을 들추어내어 비판하자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유두고 교훈을 통해 그를 거울삼아 과오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교훈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유두고의 준비성 부족은 좋은 앞자리를 놓쳤고 은혜의 시간을 뺏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음의 준비없이 교회에 오시면 “마귀야 내게로 오라”고 하는 듯이 “끄떡끄떡”하면서 제스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님과 함께 나오시면 졸음의 자리에 않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에 앉혀 주시는 것입니다.
4 두고두고 후회할 유두고라 할지라도 본 받을 만한 한가닥의 빛줄기는 비추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가닥의 가느다란 생명줄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는 창가에 걸터 앉긴 하였지만 그래도 말씀을 들을려고 참예한 한사람으로 볼 때 참석 안한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행20:9에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라는 표현은 졸음을 이길려고 힘을 썼다는 말입니다. 졸음이 조금만 와도 “애라 모르겠다 그냥 자버리자”가 아니라 졸음이 자꾸 도전해 오니 결국 어쩔수 없이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영적으로 깊이 조는 상황이 온다하더라도 어둠의 권세를 이길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의 태도를 보시고, 사단에게 설상 진다하더라도 결국 이기게 되도록 상황을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아멘! 유두고가 졸음을 이길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하나님이 아시고 바울을 통해 살려주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3) 유두고는 순간의 죽음이였지만 그는 다시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요일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행20:10에 “바울이 내려가서 그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하면서 그를 살렸습니다. 유두고의 추락사건을 통해 보여주는 영적의미는 타락자에 대한 영혼몸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어두운 암흑 세계에 그 귀한 몸을 던져 희생하셨습니다. 유두고의 경우를 통해서 두가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가능성이 있는 타락입니다.(불완전한 타락) 불완전한 타락은 좋지만 불완전한 구원은 나쁜 것입니다. 이는 생명이 있는 타락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즉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은혜로운 타락입니다. 유두고나 탕자의 경우입니다.
2 가능성이 없는 타락입니다.(완전한 타락) “지옥의 자식들”이란 영화제목이 옛날에 있었습니다만 말 그대로 지옥의 자식들로 낙인 찍힌 자들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구원을 받지 못하니 얼마나 불상합니까 이 유두고의 실제적 사건은 비극적인 이야기 같으면서도 결국 해피앤드(Happy End)로 끝나는 교훈적인 사건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주님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 있는데 예를 들면 “강도를 만나 어떤 사람” “탕자이야기” “잃어버린 양 한마리” 등 모두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계시록의 마지막도 보며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 또는 하나님 및 어린양의 보좌의 찬란한 모습등 최후의 행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삶도 불행에서 행복으로 바뀌시고,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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