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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창2:18-25)

본문

창세기 1장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도 창조 사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창조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하나님은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11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호와만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사역을 하실 때에 사람은 제일 마지막에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에 어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지켜 가십니다. 여호와만이 참신이며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아주 싫어합니다. 우리는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다른 이방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들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침범해 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은 한분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일신을 믿는 종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이슬람교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고 알라를 하나님으로 믿으며 모하메드를 선지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2 우리가 믿는 신도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믿는 신을 여호와와 함께 하나님의 반열에 슬며시 올려놓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너희에 대하여 우호적이듯 너희도 우리에 대하여 배타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희가 믿는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해 주듯이 너희도 우리가 믿는 신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백한 주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을 허용치 않습니다. 기생 라합이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만이 유일무이한 상천하지의 하나님인 것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만이 창조의 하나님이요, 유일한 구원자인 것을 믿었습니다.(수2:11-12) 이스라엘 땅에서는 아합 왕과 간악한 이세벨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삼 년 반 동안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이 기근이 과연 누구 때문에 왔는지, 누가 참 하나님인지 갈멜산 꼭대기에서 신들의 대결을 펼치기로 했습니다. 그 때 엘리는 백성들 앞에 서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왕상18:21) 그러나 아무도 엘리야의 편에 서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는 고통스럽게 하나님을 향해서 말했습니다. “나만 홀로 남았나이다.” 엘리야는 상대방은 850인이나 되고 자신은 홀로 남았지만 여호와만이 하나님임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온종일 바알과 아세라를 목터지게 불렀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기도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왕상18:36-37)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불을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아 버렸습니다. 그 때 모든 백성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한 말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그렇습니다. 오직 여호와 그만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 다른 이름을 개입시키는 것, 다른 이름을 대치시키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1. 하나님은 살게 하셨고 죽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창5:3-5) 우리는 위의 세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육신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어기고 따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죽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 전반에 어떻게 흐르고 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1 없는 생명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 100세에 경수가 끊어진 사라 90세에게서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불임 여성 리브가에게 결혼 20년만에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게 하셨습니다. 라헬도 불임 여성이었으나 하나님이 그녀를 생각하사 요셉을 낳게 하셨습니다. 한나도 아기를 낳지 못하던 여인이었으나 간구할 때에 귀한 사무엘을 낳게 하셨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은 할머니로서 세례 요한을 낳았습니다. 이 모든 여인들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처지에서 볼 때 여자의 후손을 낳을 처녀 마리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낳은 아이들은 처녀 몸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죽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죽는 자연사를 말씀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으로 죽이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말씀합니다. 아담이 930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늙어서 죽었습니까 아니요!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후손들의 족보는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몇 살까지 살다 죽은 족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이 그 나이에 죽이신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없는 생명을 태어나게도 하시고 펄펄 살아 있는 생명을 죽게도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를 가지고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습니다. 불치병 걸렸을 때 의사의 손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왕하20:2)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8-19)
주님은 베드로의 죽음에 대하여 두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팔을 벌리고 십자가에서 순교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악한 헤롯이 주의 사도 야고보를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싫어하던 유대인들이 크게 기뻐했습니다. 민심을 파악한 헤롯은 이번에는 베드로도 죽이려고 잡아들였습니다. 유월절 후에 죽이기로 하고 감옥에 가두고 열 여섯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베드로는 죽게 됩니다. 죽기 전날 밤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 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행12:6-9)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천사는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띠라고 했습니다. 신을 들라고 했습니다. 겉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내일 죽을 사람인데 자기집 안방에서 잠을 자는 것처럼 달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피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결코 헤롯은 내 생명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의 약속에 근거하여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담대함이 저와 여러분의 것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하나님은 복도 주시고 저주도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천지와 만물을 만드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은 아담이 살아갈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천지와 우주만물의 창조에서 2장으로 넘어오면 아담 개인에게로 시야가 좁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환경을 너무나 축복된 환경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무성했습니다.(창2:9) 그리고 그 동산에는 네 개의 축복된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인간의 육신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에덴동산 중앙에서는 강이 발원하여 한 줄기로 흐르다가 네 개로 나뉘어 흘러 각각 강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네 개의 강을 두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강이 가지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흙에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물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 70% 이상이 수분입니다. 몸 안팎으로 필요한 것이 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네 개의 강을 두셔서 그 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삶의 원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강이 있어야 우리가 육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 강은 영적인 면으로는 우리 인생 가운데 꾸준히 흘러야 할 물줄기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네 개의 강은 우리 인생 가운데 흘러야 할 넘쳐야 할 축복의 강입니다.
1 첫 번째 강은 비손강입니다. 그 뜻은 풍요, 부요 입니다. 에덴동산은 부족한 것이 없는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이 풍요롭습니까 어떤 것을 얼마나 채워야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산더미같이 재물을 쌓아 놓고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가난 가운데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이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2 두 번째 강은 기흔강입니다. 그 뜻은 은혜 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은혜가 강물처럼 넘쳤던 곳입니다. 에덴동산은 아담이 일군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땅입니다. 다윗은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혜의 잔이 넘쳤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말하기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딤전1:14)고 했습니다.
3 세 번째 강은 힛데겔강입니다. 그 뜻은 결실 입니다.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 열매가 언제나 풍성했습니다.(창2:9) 여러분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열매들이 맺히고 있습니까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열매가 열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실하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 안에 오십시오. 풍성한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4 네 번째 강은 유브라데강입니다. 그 뜻은 능력 입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했던 곳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 모든 것을 쓸어버릴 능력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창13:10)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께서 멸하기까지는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물과 풀이 풍성한 땅이었습니다. 애굽땅과 같았더라 말씀한 것을 보면 애굽땅도 참으로 사람 살기에 좋은 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뀌는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19:24-25)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땅을 멸하실 때에 그 성과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뒤집어엎어서 멸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땅을 온 땅을 뒤집기도 하시고 엎으시기도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노아 호수 때는 깊음의 샘이 터지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도 구멍내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이 땅을 다시 멸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행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하나님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면 화와 저주도 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은 권세를 세우기도 하시고 무너뜨리기도 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하나님이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질서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입니다. 그 영역을 넘어가지 않음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자신은 피조물이 됨을 인정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의 상태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
1 혼돈에서 질서에로의 창조였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창1:2)
2 공허에서 충만함으로의 창조였습니다. “. 공허하며 ”(창1:2)
3 흑암에서 광명에로의 창조였습니다. “.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1:2) 혼돈, 공허, 흑암이 창조 이전의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태에서 질서와 충만과 광명으로 창조세계를 이루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하신 세계가 어떻게 유지되어 가야 하는지를 보십시오. 선악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역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게 하신 역사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는 처음부터 어떤 질서가 존재했었습니까
1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2:19-20)
3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여자라 지어 주었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2:23)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도 이름을 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아담의 아내의 이름도 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아담의 이름만을 지어 주셨습니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신 것입니까 아담은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속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이름도 지어줌으로써 아내도 남편에게 속한 사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의 이름을 지어 주심으로 그 자신은 하나님께 속한 존재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내와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을 나의 소속으로 두고 있는 나 자신은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임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위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살아갈 때 나는 나에게 소속된 저들 모두도 나에게 복종하고 살아가는 삶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 질서를 세우시고 유지해 가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굳이 한 일이라면 자기에게 나아오는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과 갈빗대를 뽑아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을 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그가 무슨 일을 했다는 차원에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차원에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하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노력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것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상태를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행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위한 행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내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려는 인간과 마귀의 모든 행위를 무너뜨리며 질서를 세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하는 최종의 순간에 그 절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느헤미야가 했던 고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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