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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와 선악과 (창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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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두 갈래 길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다른 길로 나갈 수 있었으나 여러분들은 예배를 선택한 것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그 기준과 목적이 있으며, 반드시 그 결과를 동반합니다. 인간은 언제나 최선을 선택합니다. 그 선택은 언제나 내 육신을 위한 선택, 나의 현실을 위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선택은 하나님을 위한 선택, 내 영혼을 위한 선택을 하게 합니다. 최초의 선택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주어졌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아주 특별한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 나무를 중앙에 두고 살았습니다. 이 두 나무는 각각의 열매를 맺었는데 생명나무의 실과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일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두 나무 중에 한 나무를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오늘 우리도 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 듯 싶으나 사실은 이 두 나무 사이에 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먹느냐 안 따먹느냐 과연 어떤 나무의 실과를 따먹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합니다. 누가 뭐래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100원짜리 동전 두 개와 500원짜리 동전 하나를 놓고 선택하라 하면 어린아이들은 동전 두 개를 선택합니다. 화폐의 가치를 모르는 아이들은 숫자를 놓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결과는 유익을 위하여 행한 선택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선택이 중요한 이유는 그 선택이 결과를 확정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결과는 사람의 판단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신자요, 그 사실을 믿고 선택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위한 선택을 하며 일생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1. 생명나무 모든 만물의 창조자가 하나님이듯 생명나무를 만드신 이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창2:9) 동산 중앙에 두셨다는 말은 삶의 한복판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인간의 최대의 관심이며 삶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삶의 질보다 우선하는 게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전도서 9장 4절에 보면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은 자를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생명나무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요한계시록 22장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제한없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었습니다.(창2:16) 아담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은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환경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실과를 자유롭게 따먹을 수 있는 무한한 자유였습니다. 언제나 생명 곁에서 호흡하며 마음껏 따먹고 살아갈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이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생명의 풍성함은 그 반대편되는 사망쪽에서 바라보면 더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성경은 사망의 세력을 마귀가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일생 마귀에 매여 죽기를 두려워하며 일생 종노릇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으로서 죽음을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사람으로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병원 중환자실에 가보면 사망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몸부림을 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수원에 가서 중국에서 5년간 한방을 배우고 돌아오신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혈압을 재고 진맥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그곳에 간 네 사람 모두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픈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진찰해보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체질적으로 약한 부위가 다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처방을 받고 돌아왔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문을 나올 때 목사님이 하신 한 마디 말씀이 조금 위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 부분이 아프다고 말하면 금방 죽는 것처럼 걱정을 하는데 분명한 것은 그 부위만 아픈 것입니다. 잘 치료하시고 관리를 잘 하시면 건강하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에덴 동산에는 아프고 병들고 죽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임의로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지만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다. 손을 대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선악과만 먹지 않으면 그 상태로도 죽음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생명에 대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생명나무를 가까이 하지 않게 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죽음은 두려워하면서도 생명에 대하여는 무관심한 모습과 동일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나무를 하나님이 만드셨듯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또 생명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듯이 선악과의 나무도 그리하셨습니다. 동산 중앙에 두셨다는 말은 삶의 한복판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생명과와 마찬가지로 선악과 역시 인간 삶의 핵심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생명나무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아담 하와의 관심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집중되었습니다. 생명나무에 대한 무관심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유혹으로 이어집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모든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따먹을 수 있는 자유가 마음껏 주어진 반면에 선악과만은 반대로 절대 따먹지 말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엄히 경고하셨습니다.(창2:17) 이 말씀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분리되고 그 결과 자동적으로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만일 명령을 어기고 따먹으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하나님의 경고가 담겨 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생명과 자유의 축복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며 식언치 않으십니다. 친히 말씀하신 바를 실행치 않으실 수 없는 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뒤 인간의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생명나무의 길로부터 차단되었습니다. 범죄 후에 생명과를 따먹으면 죄지은 상태로 영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3-24) 그들은 축복의 땅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었고, 그 땅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한 저주받은 환경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아무런 수고없이 열매를 얻을 수 있었으나 범죄한 후에는 일생 비지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육신은 죄값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 이후에 주어진 모든 인간의 운명이었습니다.
3. 두 갈래길 우리는 에덴 동산을 가보지 않았습니다. 꿈에도 못 가보았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에 우리는 에덴 동산이 실제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나 타락에 관한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 그대로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과 선악과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실과들이 오늘날은 누구를 상징하며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에 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만 따먹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360°방향 중에 오직 그 길로만 행하지 않으면 그들의 삶은 안전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 한 길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에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다른 어떤 길로 행해도 그 길은 선악과의 길이 됩니다. 생명과와 선악과의 길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중심에도 두 나무가 서 있습니다. 예수님을 벗어난 모든 길은 선악과의 사망길입니다. 360°각도 중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만이 생명길입니다. 오늘날의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길만이 생명과의 길입니다. 성경에서 생명, 영생과 관련된 모든 단어를 다 찾아보십시오.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서 예수님을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는 자신을 생명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는 자신을 죽어도 사는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28절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20절에서는 주 예수에 관한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나무요, 생명과요,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일한 길이기에 찾는 이도 적으며 구원얻는 이도 적다고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문이 좁아도 우리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길이 협착해도 우리는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도 생명과와 선악과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항상 두 갈래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나무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이 어디인지로 알지 못하며 또 안다 할지라도 그룹들이 두루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지키고 있기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생명나무를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생명나무로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생명과와 선악과가 생명과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는 신불신과 순종 불순종은 삶에 깊은 영향을 줍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5-20) 하나님은 우리 인생길에 네 가지를 두셨다고 했습니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저주입니다. 생명과 사망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는 것이며, 축복과 저주는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생명과의 길은 우리에게 생명과 축복을 주지만 선악과의 길은 사망과 저주를 가져다 줍니다. 생명과와 선악과는 우리의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현실의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척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생명나무의 길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축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이미 결과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에 대한 결과는 인간의 뜻대로 되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계십니까 우리는 선악과를 선택한 아담과 하와의 삶이 얼마나 불행해졌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인류의 시조로서의 아담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어떤 길을 선택하고 있으며, 어떤 결과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 또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길로 행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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