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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냐 선악이냐 (창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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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얼마나 선할 수 있을까요 또 반대로 얼마나 악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선악에 대한 평가는 누가 내리는 것이며, 어떻게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흔히 들어왔고, 해 왔던 말이 권선징악입니다. 착한 사람이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며, 이렇게 되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은 의아해 하며 하나님을 원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고를 성경은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선과 악 중에 선한 일을 통해서 생명을 얻으려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선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를 거부합니다. 결론부터 말해 봅시다. 참된 선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결국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하게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고, 오직 그의 생명을 인하여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천국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악을 행하면 저주와 형벌을 받고 지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선악적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선악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 볼 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말씀을 통해 확인해 봅시다.
1. 선악적 사고와 생명적 사고 창세기 2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여러 가지 나무가 있었는데 그 중에 아주 중요한 두 종류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금하셨습니다.(창2:17)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을 먹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고, 선과 악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사고하게 되며 그 결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을 생명적 존재로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적 존재로 지음받았기에 인간은 끝없이 사느냐 죽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범죄한 뒤에는 생명에 관한 부분을 옳으냐 그르냐 하는 도덕적 관점으로 바꿔 버렸습니다. 범죄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뒤 이들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창3:7) 수치를 가리고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와 부르시자 그들은 동산나무 뒷편으로 숨어버렸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느냐!” 물으실 때에 아담은 그 책임을 하나님과 하와에게 전가시켜 버렸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는 이와 같은 태도는 선악적 사고의 단편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인간은 모든 것을 선악으로 분별하게 되고 그 결과는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선악적 사고는 옳으냐 그르냐, 누가 참이고 누가 거짓이냐 하는 끝없는 대결구도를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적 사고는 내가 부족하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가 생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또 타인을 향해서도 어떻게 저 생명을 살릴 수 있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생명적 사고만이 인간에게 살길을 열어 줍니다. 인간의 문제는 착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원 문제를 말할 때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았는데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냐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착하고 바르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 말씀한 곳이 없습니다. 사람은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살고난 뒤의 일입니다. 생명은 선함보다 소중합니다. 생명을 얻고 나서 착함을 논하는 것이 순서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이처럼 철저하게 생명적 사고를 선악적 사고로 전환시켜 버린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닌 옳으냐 그르냐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생명의 길을 말씀하시는데 마귀는 선악개념으로 끝없는 대결구도로 인간들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2. 어느 것이 옳으냐 인생을 살다 보면 남의 자식이지만 너무 잘했고, 내 자식이지만 너무 잘못한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누가 옳고 그른가는 너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나에게는 잘한 남의 자식이 중요하지 않고 못난 내 자식이 더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식은 내 생명이요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는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하는 선악적 사고보다는 내 핏줄이라는 생명적 사고가 먼저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인 일에는 선악적 사고가 적용되지만 극단적인 경우, 최종적으로는 옳았느냐 틀렸느냐 하는 선악개념으로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앞에 두고 잘했느냐 잘못했느냐, 잘났느냐 못났느냐를 따지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두둔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것입니다. 못나고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타인을 향해서는 멸시와 분노의 감정이 되지만 자식을 향해서는 측은함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날마다 잘잘못만 따진다면 그 앞에 당당하게 설 자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옳고 그름과 선악으로 따져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이 살아서 그렇게 잘잘못을 따졌으므로 누가 옳은지 한번 따져보자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는 선악이 아니라 자녀된 신분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잘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가 통하지 않습니다. 잘 생겼느냐 못생겼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이냐 사망이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평생을 나사로처럼 가난과 질병 속에 살다가 임종을 만난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가빠올 때에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지금까지 가난해서 못 배웠고, 남에게 무시도 많이 당했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어 일평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꿈도 많았기에 한도 많았는데 죽음을 앞두고 나니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나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어요. 주님 앞에 섰을 때 잘살았던 것도, 건강했던 것도, 내가 그렇게 부러워했던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주님 앞에서 나는 이 말 한마디를 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앞에서 모든 고통을 끝내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제 곧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는 이 한마디 말의 위력을 체험케 될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정말 그렇다고 확신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확신은 누가 준 것이며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의 통념이 그러하다고요 그들이 당신을 구원해 줍니까 당신 자신이 그렇게 자신합니까 당신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살지 못하고 죽는 겁니까 평상시에는 자신이 쌓은 공적을 가지고 구원받겠다 말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직전에도 그 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쌓은 선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하직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선악으로 그렇게 따지기 좋아했던 사람은 선악으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간 중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얻을 육체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 생명 안에 거하십시오. 평생을 같이 살기로 굳은 언약을 한 부부가 함께 살다가 이혼하는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왜 이혼하게 됩니까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신 한 몸으로서의 생명관계를 끝내고 옳고 그름의 선악관계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다가 끝내는 갈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몸, 한 지체라는 생명관계는 아무리 잘못해도 다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지만 선악관계는 잘잘못을 따지기 때문에 함께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서로가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생명관계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가를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을 선악이라는 구조 속에서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율법을 지켰고, 자기가 굶는 한이 있어도 구제하는 일에는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그토록 분노하시고 징계의 채찍을 드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선악적 사고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의 생명을 끊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하는 선악적 사고는 그만큼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에 집중하는 만큼 인간은 생명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적 사고의 폐단은 그 생각 자체보다는 그 결과가 생명에 대한 무관심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저주와 심판에 빠져버린 인간에게 다른 구원의 길이 없으므로 유일한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받으라 하는데 선악적 사고에 빠진 사람은 자기 행위, 자기 공로,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으려 합니다. 이런 자기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것은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무효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지키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도 결국은 마귀의 자녀된 신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만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의 피 속에는 이와 같은 선악적 사고구조가 고정화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뒤틀려버린 이와 같은 인간의 선악적 사고를 생명적 사고, 즉 믿음으로 바꿔놓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마귀는 생명을 나누고 전달하는 기관으로서의 교회를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장소인 것처럼 위장시켜 버렸습니다. 교회가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기관이라면 교회보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굳이 교회를 나와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마귀가 교회를 타락시켜 가는 증거는 성도들의 초점이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 선행과 구제에 쏠려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귀는 가장 고상한 것을 가지고 교회를 부수는 악한 술수를 부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악이 아닌 생명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선악적 사고가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방향으로 일하셨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른 날에도 일을 하셨지만 주로 안식일에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여 육신을 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불쌍한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면 안된다는 선악적 개념보다 안식일에 사단에게 매인 아브라함의 딸을 고치는 것을 더 우선시 하셨던 것입니다.(눅13:16)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중풍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셨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안식일에 보게 했습니다.(요9:14)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잘못했다며 고소의 빌미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고 안 지키는 선악적 개념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생명적 관점에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안식일을 어겼다고 선악적 관점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2:27-2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눅6:9) 사람들은 선악의 구조 속에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생명적 사고를 하셨기에 안식일에 온갖 비난과 위협을 무릅쓰고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악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공로, 자기 자랑이 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게 선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그에게 전해주는 것이 선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선악적 관점에서 그녀의 잘못을 들어 죽이려 했지만 주님은 생명적 관점에서 복음으로 그 여인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죄라는 것은 간음, 살인과 같은 윤리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텐데 그것은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여인에게 주신 구원은 간음죄를 안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인을 불신앙의 저주에서 건져주시는 것이며,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는 것은 구원받은 네가 다시 불신앙의 죄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적 구조에서 보면 이해가 안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그 여인이 간음 안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수가성 여인이 복잡한 남자 관계를 청산하고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잘해서 구원받고 잘못해서 멸망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십계명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부모를 공경하면 구원받습니까 살인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간음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다 지킬 수도 없지만 지켰어도 지옥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키고 안 지킨 선악의 개념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에게 아무리 오래도록, 아무리 많은 구제를 했다 할지라도 그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은과 금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을 준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선입니다. 그만이 참되고, 그만이 진리이며, 그만이 생명이며 영생입니다. 생명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복음서에만 생명이라는 단어가 21번 나옵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는 31번 나옵니다. 이 모두가 다 예수님과 연결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의 생명을 얻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땅에 있는 것을 많이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잘하고 잘못했다는 사람들의 판단과 평가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구원입니다. 내가 그 구원, 즉 생명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을 이 생명 앞으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다른 것 다 뒤로 물리고 여러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판단해 보십시오. 선악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의 생명 안에 거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여러분 자신을 몽땅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 풍성한 사랑 안에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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