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 (창2:18-25)
본문
세상에는 많은 기관과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중에 하나님은 단 두 개의 공동체만을 세우셨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정과 교회. 이 둘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축이 되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가 없어도, 한쪽이 부실해도 안됩니다. 이 둘 중에 어떤 기관이 더 중요하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교회보다는 가정이 더 소중합니다. 왜 그런가 이유를 봅시다.
1 가정이 교회보다 먼저 세워졌습니다.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세워졌고, 교회는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세워졌습니다.
2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 잠자는 시간이 보통 8시간입니다. 여기에 식사시간과 휴식시간까지 합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가정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교회생활은 어떻습니까 모든 예배를 빠짐없이 다 참석한다 해도 가정생활만큼의 시간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떤 것도 이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가정은 인간생활의 뿌리와 열매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느 곳에 가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무시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통해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가정은 교회에서 받은 바 은혜를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장소입니다. 성도는 교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가정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바로 되어야 교회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역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가정이 바로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교회생활이 없는 가정은 아무리 외형적으로 볼 때 행복해 보여도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두 가지가 두 개의 자전거 바퀴처럼 잘 굴러가야 행복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복하지 못한 많은 기독교 가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가정은 솔직히 행복합니까 여러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원만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은 결과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잘못한 결과입니까 성도는 반드시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행복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깨어지는 가정
1 불행의 시작-분리 인간의 고통은 여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했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왜 하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남편에게도 저지르게 한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와가 범죄하자 아담이 집을 나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때 하와는 “여자는 나밖에 없어요.”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흥, 나에게는 아직도 갈비뼈가 개나 더 있는 걸” 하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후 위기의식을 느낀 하와가 감언이설로 남편을 속여서 범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죄는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시작은 하와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하와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들어 둘이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로 보면 하와는 남편을 떠나면 안 되며, 아담도 하와를 홀로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함께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5에는 부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싸웠어도 같은 방에서 자야 합니다. 하와가 범죄한 것이 잘못이라면 그 순간에 아담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와가 큰 죄를 저지른 게 사실이지만 아내를 혼자 남겨둠으로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도록 방치한 남편의 책임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담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겠지요. 그는 무척 바빴을 것입니다. 넓은 에덴동산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가정을 돌봐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는 동물이 아니라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을 다 못해도 아내만은 보살폈어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정이 제일 중요합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범사에 불행합니다. 사람은 일단 남녀가 결혼하면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누가 뭐래도 가정의 중심은 남편과 아내입니다. 여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분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아도 부모나 자식 중심이 아니라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반드시 남편을 제일 우선시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에 문제가 없습니다. 결혼한 부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해주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의 불행은 아담이 아내를 혼자 있게한 것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2 책임전가 아담이 아내를 혼자 있게 함으로 그 가정에 죄가 개입되어 둘의 관계가 깨어지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 하와를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이 때 아담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물론 범죄의 시작은 하와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을 바로 옆에서 듣는 하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런 사람을 내가 남편이라고’ 하와는 무너지는 가슴으로 크게 절망했을 것입니다. 깨어지는 불행한 가정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상대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행복하다면 그 행복의 원인은 누구 때문입니까 불행하다면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상대방에게 “나 때문인줄 알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행하다면 “다 당신 탓이야!”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다면 첫 번째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상대방의 공로입니다.
반대로 불행하다면 그 제일 원인은 나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어떻게 말합니까 상대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에게 마저 그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12절을 읽겠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아담은 제일 먼저 범죄의 책임을 하니님에게 돌렸습니다. 물론 아담은 하나님에게 아내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위하여 여자를 만들어 함께 살게 하신 것입니다. 잘 살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오자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자 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담은 범죄의 책임을 아내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말을 뒤집어서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그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아내에 대한 원망과 책임전가로 일관합니다. 이 모습이 행여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만큼 여러분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떠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 책임도 아니고, 저 사람의 책임도 아니고 바로 내탓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까지는 절대로 여러분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1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는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로 옷을 해입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동산나무 뒷편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불러내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숨어버린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고자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오셨습니다.
2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듯이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해 주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3 가죽옷을 지어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하와가 입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입혀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점이 있습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고한 한 짐승이 죽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문제 이전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세워주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희생하신 그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3.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
1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십시오. 창조의 질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능력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보다 우선하십니다.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에게 관계된 계명 네 가지를 먼저 말씀하시고 그 뒤에 사람에게 관계된 여섯 가지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율법사가 와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물었을 때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다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신 뒤에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9-40) ‘그와 같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에서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되 사랑의 농도에서는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하나님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큼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죽은 아비에 대한 장사도, 살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작별인사도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은 모두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뒤에는 이웃을 하나님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와 지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안 믿던 아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남편들은 대부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교회에 나감으로 아내가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에서 해야 할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제는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모두가 축하해 줍니다. 그리고 모두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직 믿지 않는 남편과 가족들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정말 집에 돌아와보니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마귀의 자녀라고 하더니 정말 마귀같이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면 할수록 가정은 더욱 소홀해지고 남편의 핍박은 심해만 갑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서 열심하 하다보면 언젠가 남편과 자식들도 돌아오는 날이 있겠지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날은 오지 않습니다. 드디어 어떤 날이 오는지 아십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불평 원망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여러분의 잘못입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만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믿는 아내가 자신을 하나님만큼 사랑하는데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신을 하나님만큼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안 믿을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가족들을 하나님만큼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여러분과 똑같이 사랑할 때 여러분의 기정은 행복할 것이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저도 저의 가정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잘못하고 있는 점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가정중심,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입장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 큰 교회를 목회하고 계시면서도 가정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목사님들을 더러 보게 됩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지나치게 교회일에 헌신함으로 가정에 소홀하게 되는 점입니다. 목회자로서 성공한 목회, 대교회 목회의 꿈을 모두가 꾸게 됩니다. 가정은 물론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목회에 전념합니다. 이 와중에 사모님과 자녀들은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받아야 할 사랑,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할 때 가족간에 괴리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이 될 때 가정을 돌아보면 이제는 때가 늦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정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성공적인 목회자, 대교회 목회자로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으로는 곪아터지는 것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저는 이런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실패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잘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정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가정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가정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워가십시오. 가정이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목회를 꿈꾸지 말고 행복한 목회를 가꿔 가십시오.” 이게 단순히 목회자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돈 좀 덜 벌어도 관계없습니다. 남만큼 출세 못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도 괜찮습니다. 가정만 행복하면 됩니다. 여러분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 천국은 어떤 곳이야” 물을 때 “천국은 마치 우리집과 같단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혹시 아이들이 “지옥이 어똔 곳이야” 물을 때 말로는 그러지 않을지라도 속으로라도 ‘지옥이 따로 있니. 우리집이 지옥이지.’ 이런 생각을 갖지는 않습니까 행복한 가정은 아무런 수고없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애쓰고 힘쓰며 서로가 기도하며 힘쓸 때 세워집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것도 세상에서 억울한 일인데 불행하게 마저 살지 마시기 바립니다.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명령은 행복한 가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은 부부가 한몸되어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천국을 이 땅 위에 세운 가정입니다. 그 가정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가정이 교회보다 먼저 세워졌습니다. 가정은 에덴동산에서 세워졌고, 교회는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세워졌습니다.
2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가정에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루 잠자는 시간이 보통 8시간입니다. 여기에 식사시간과 휴식시간까지 합하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가정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교회생활은 어떻습니까 모든 예배를 빠짐없이 다 참석한다 해도 가정생활만큼의 시간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떤 것도 이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없습니다. 가정은 인간생활의 뿌리와 열매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느 곳에 가서도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가정의 행복을 무시하는 사람이 다른 일을 통해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가정은 교회에서 받은 바 은혜를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장소입니다. 성도는 교회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가정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바로 되어야 교회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역으로 해서 신앙생활을 잘 해야 가정이 바로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이 맞습니다. 교회생활이 없는 가정은 아무리 외형적으로 볼 때 행복해 보여도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두 가지가 두 개의 자전거 바퀴처럼 잘 굴러가야 행복한 삶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행복하지 못한 많은 기독교 가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가정은 솔직히 행복합니까 여러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원만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은 결과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자신이 잘못한 결과입니까 성도는 반드시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행복하지 못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치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우리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넘쳐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깨어지는 가정
1 불행의 시작-분리 인간의 고통은 여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범죄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했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왜 하와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남편에게도 저지르게 한 것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와가 범죄하자 아담이 집을 나가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때 하와는 “여자는 나밖에 없어요.”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흥, 나에게는 아직도 갈비뼈가 개나 더 있는 걸” 하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후 위기의식을 느낀 하와가 감언이설로 남편을 속여서 범죄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죄는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시작은 하와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책임이 전적으로 하와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혼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자를 만들어 둘이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부부는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리로 보면 하와는 남편을 떠나면 안 되며, 아담도 하와를 홀로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부부는 함께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5에는 부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분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싸웠어도 같은 방에서 자야 합니다. 하와가 범죄한 것이 잘못이라면 그 순간에 아담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와가 큰 죄를 저지른 게 사실이지만 아내를 혼자 남겨둠으로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도록 방치한 남편의 책임도 간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담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겠지요. 그는 무척 바빴을 것입니다. 넓은 에덴동산을 돌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가정을 돌봐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제일 중요한 존재는 동물이 아니라 아내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을 다 못해도 아내만은 보살폈어야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가정이 제일 중요합니다.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면 범사에 불행합니다. 사람은 일단 남녀가 결혼하면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누가 뭐래도 가정의 중심은 남편과 아내입니다. 여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분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결혼한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아도 부모나 자식 중심이 아니라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정에서 반드시 남편을 제일 우선시해야 하고, 아내는 남편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에 문제가 없습니다. 결혼한 부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해주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의 불행은 아담이 아내를 혼자 있게한 것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2 책임전가 아담이 아내를 혼자 있게 함으로 그 가정에 죄가 개입되어 둘의 관계가 깨어지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 하와를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느냐” 이 때 아담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물론 범죄의 시작은 하와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을 바로 옆에서 듣는 하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런 사람을 내가 남편이라고’ 하와는 무너지는 가슴으로 크게 절망했을 것입니다. 깨어지는 불행한 가정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상대방의 책임으로만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행합니까 행복하다면 그 행복의 원인은 누구 때문입니까 불행하다면 누구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상대방에게 “나 때문인줄 알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행하다면 “다 당신 탓이야!” 책임을 전가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정이 행복하다면 첫 번째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는 상대방의 공로입니다.
반대로 불행하다면 그 제일 원인은 나 때문입니다. 그게 사실이고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어떻게 말합니까 상대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에게 마저 그 책임을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12절을 읽겠습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아담은 제일 먼저 범죄의 책임을 하니님에게 돌렸습니다. 물론 아담은 하나님에게 아내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혼자 외롭게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여 그를 위하여 여자를 만들어 함께 살게 하신 것입니다. 잘 살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와를 이끌어 아담에게 데려오자 그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자 죄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담은 범죄의 책임을 아내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말을 뒤집어서 자세히 살펴 보십시오. “그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아내에 대한 원망과 책임전가로 일관합니다. 이 모습이 행여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만큼 여러분 가정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과 상대방에게 떠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 책임도 아니고, 저 사람의 책임도 아니고 바로 내탓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까지는 절대로 여러분 가정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1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다시 만나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 하와는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무로 옷을 해입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며 하나님이 찾아오셨을 때는 동산나무 뒷편으로 숨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담을 불러내어 구원하십니다.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숨어버린 인간을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우리를 찾아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회복시키고자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오셨습니다.
2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인간의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문제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듯이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해 주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3 가죽옷을 지어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하와가 입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치마를 벗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입혀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점이 있습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고한 한 짐승이 죽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없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문제 이전보다 더 행복한 가정을 세워주시기 위하여 독생자까지 희생하신 그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3.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부부
1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십시오. 창조의 질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때 우리는 생명을 얻고 능력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보다 우선하십니다.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에게 관계된 계명 네 가지를 먼저 말씀하시고 그 뒤에 사람에게 관계된 여섯 가지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율법사가 와서 어느 계명이 제일 큽니까 물었을 때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22:37) 다함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결코 하나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신 뒤에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9-40) ‘그와 같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랑의 우선순위에서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되 사랑의 농도에서는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하나님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필요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만큼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죽은 아비에 대한 장사도, 살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작별인사도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말씀은 모두가 우선순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뒤에는 이웃을 하나님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2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와 지는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안 믿던 아내가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는 것을 남편들은 대부분 싫어합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교회에 나감으로 아내가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에서 해야 할 자기 책임을 잘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이제는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모두가 축하해 줍니다. 그리고 모두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직 믿지 않는 남편과 가족들은 마귀의 자녀입니다. 정말 집에 돌아와보니 남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마귀의 자녀라고 하더니 정말 마귀같이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와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면 할수록 가정은 더욱 소홀해지고 남편의 핍박은 심해만 갑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하면서 열심하 하다보면 언젠가 남편과 자식들도 돌아오는 날이 있겠지 인내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날은 오지 않습니다. 드디어 어떤 날이 오는지 아십니까 내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충성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불평 원망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여러분의 잘못입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만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믿는 아내가 자신을 하나님만큼 사랑하는데 감격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머니가 자신을 하나님만큼 사랑하는데 하나님을 안 믿을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가족들을 하나님만큼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여러분과 똑같이 사랑할 때 여러분의 기정은 행복할 것이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저도 저의 가정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아내에게 자식들에게 잘못하고 있는 점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늘 부족함을 느끼지만 가정중심, 부부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입장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 큰 교회를 목회하고 계시면서도 가정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목사님들을 더러 보게 됩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가 지나치게 교회일에 헌신함으로 가정에 소홀하게 되는 점입니다. 목회자로서 성공한 목회, 대교회 목회의 꿈을 모두가 꾸게 됩니다. 가정은 물론 개인의 사생활까지도 철저하게 희생하면서 목회에 전념합니다. 이 와중에 사모님과 자녀들은 이해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에게 받아야 할 사랑,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할 때 가족간에 괴리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교회가 성장하고 안정이 될 때 가정을 돌아보면 이제는 때가 늦어버렸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정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남들이 볼 때는 성공적인 목회자, 대교회 목회자로서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으로는 곪아터지는 것입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에게 저는 이런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 실패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잘 하면 됩니다. 그러나 가정을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가정은 외면할 수 없습니다. 가정은 버릴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행복한 가정의 기초 위에 교회를 세워가십시오. 가정이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성공한 목회를 꿈꾸지 말고 행복한 목회를 가꿔 가십시오.” 이게 단순히 목회자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돈 좀 덜 벌어도 관계없습니다. 남만큼 출세 못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아도 괜찮습니다. 가정만 행복하면 됩니다. 여러분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 천국은 어떤 곳이야” 물을 때 “천국은 마치 우리집과 같단다.”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혹시 아이들이 “지옥이 어똔 곳이야” 물을 때 말로는 그러지 않을지라도 속으로라도 ‘지옥이 따로 있니. 우리집이 지옥이지.’ 이런 생각을 갖지는 않습니까 행복한 가정은 아무런 수고없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애쓰고 힘쓰며 서로가 기도하며 힘쓸 때 세워집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것도 세상에서 억울한 일인데 불행하게 마저 살지 마시기 바립니다.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명령은 행복한 가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가정은 부부가 한몸되어 위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아래로 자녀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천국을 이 땅 위에 세운 가정입니다. 그 가정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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