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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바벨탑 (창11:1-9)

본문

본문 5절에 “인생들이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였더라” 바벨탑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와있지 안습니다.
그런데 왜 바벨탑이라고 흔히들 말하는가를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탑이라고 부르게 된 동기는 4절에 “또 말하되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성과 대(臺)에서 “대”라는 말은 “높이 쌓은 곳”을 말합니다. “대”라고 하는 말이 탑에 대치되는 말입니다. 원어상으로는 “탑”(공동번역성경)이나 “대”나 같습니다. 영어에는 tower로 되어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그 당시 사람들은 하늘에 끝이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한 어리석은 인간의 무지스러운 행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탑을 쌓았다는 뜻은 하나님께 도전한 것이요 그것은 최초의 하나님께 향한 집단반역행위입니다. 국민학교때 어린이들이 부르던 동요에 보면 “순이야 나와라 달따러 가자!” 허황된 노래를 가르쳤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그 식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무지개를 잡을려고 애를 썼다고 합니다.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몰랐는데, 현대에 사는 우리들도 역시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를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의 우주선이 우주 랑데뷰를 하고 하지만 벼륙이 뛰는 것 밖에는 안됩니다. 하늘이 높은줄을 모른다는 뜻은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입니다. 고대인이나, 현대인들도 각기 다른 양상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보좌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온 우주을 통치하는 곳입니다. 현대인들이 정말 하나님의 실존을 안다면 오늘날 눈에 보이지 않는 바벨대를 쌓지 않을 것입니다. 1957년 10월 1일 소련은 스푸트닉 1호를 지구위 230km-900km에 걸치는 궤도에 쏘아 올렸습니다. 이 사건에 뒤이어 개를 궤도에 보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달에 사람들을 보내고 돌아오게하였습니다. 무인우주 탐사용 로게트를 화성, 금성으로 그리고 저공 비행 편대를 태양계내의 다른 행성들로 보냈습니다.
1. 눈에 보이지 않는 현대의 바벨탑이나 노아시대의 보이는 바벨탑이나 모두 그 뜻은 일맥상통합니다. 먼저 노아시대의 바벨탑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1) 하나님께 향한 도전입니다.
1 유식한 도전이 아니라 무식하고 어리석은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 곳과 그의 큰신 능력을 모르는 어리석은 所致(소치)입니다. 유식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겉유식 속무식) 겉사람은 유식해 보여도 속사람은 무식합니다. 여러분! 권투를 보시며는 알겠지만 챔피언에 도전하는 자가 상대방의 전력을 탐색하고 실력이 어느정도인가를 알고 도전합니다. 무모하게 무턱대고 도전하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호랑이에게 도전하지 않을려고 할 것이며 쥐새끼가 호랑이를 이기겠다고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는 행위는 쥐새끼가 호랑이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습니다.
2 하나님이 어떠한 자인가를 모르는 자들이 두려움도 없이 마구잡이로 도전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神無識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아무리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모르면 영적 무식쟁이일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다윗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왕인줄 알았더면 대접을 극진히 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로서 우주의 왕이 되심을 사람들이 깨닫고 안다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결코 도전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3 불순종의 태도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은 반역자의 상투 수단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량에 판 것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행동으로 죄악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도전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로서 용서 받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홍수 이전에 배를 만들라는 명령이 있었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배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홍수 이후에 그 노아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을 건져준데에 대하여 한나님께 전혀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단을 쌓지 않고, 우상의 세력에 이끌려 무모하게 바벨탑을 쌓고 있었으니,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최후의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 결단은 바로 언어를 혼돈시켜 심판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교만입니다.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 그들이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자”고 의도했던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그 후손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에 닿을려고 하는 시도는 하나님과 동등해 지고 싶은 교만에서 우러난 욕망입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고 교만하려고 했던 아담과 하와에 비교될 수 있습니다.
2 교만은 하나님의 이름대신 자기 자신의 이름을 내 세워 자기 중심적 생활이 되게 합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은 바벨론에서 만들어진 달력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 김일성 달력을 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대신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려고 하는 자의 결과는 멸망뿐입니다. 도전해서도 안되고 도전 할 수도 없는 전능하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그 자체가 바로 어리석은 생각이요, 교만한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만은 쓸데 없는 욕망에서 시작됨으로 끝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바벨 타우어(Tower)가 하늘에 닿아다고 생각한다면 하늘을 찔러 하늘을 통과 할려고 할 것이 “뻔할 뻔자”입니다.
(3) 하나님의 뜻보다는 군중 심리를 더 중하게 여기는 집단들이였습니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한것은 “집단주의의 군중심리”를 이용할려는 사단의 계획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집단주의 군중심리가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대형교회에 나가시는 분들의 일부분은 군중심리에 미혹된 자들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의한 맹목적인 추종자들은 줏대없이 “너도 그렇게 하니 나도그렇게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니까 너도 나도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용기는 좋았지만 목적과 그 동기 그리고 행동의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관찰을 잘해서 집단주의의 군중심리에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권위있는 교수가 남녀 학생들을 모아 놓고는 용기와 관찰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컵에 든 것은 오줌일쎄! 나는 여러분들이 실험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알고자 한다. 우선 이 컵에 손가락을 담갔다가 핥을 테니 제군들도 따라서 하기 바란다. 이리하여 한사람씩 학생들은 죽는 상을 하면서 손가락을 담갔다가 핥았습니다. 모든 학생이 끝나자 교수는 학생들은 용기는 100%였으나 관찰은 제로다. 나는 손가락을 오줌컵에 담그긴 했으나 햛은것은 다른 손가락이였다. 학생들이 새삼스럽게 구역질을 하자 교수는 학생들! 그리 걱정하지 말게 컵의 물은 물감을 탄 수돗물 이였으니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집단의식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하나님의 역사적 심판에 의해서 그들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을 가지고 뭉치는 것은 마치 젖은 모래를 가지고 뭉치는 것과 같아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성과 같게 됩니다.김일성의 바벨탑도 이제 서서히 무너질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4) 바벨탑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해 줄 아는 어리석은 계획입니다.
1 “다시 홍수가 나도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거나, 혹은 깨닫지 못한 불신앙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노아에게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후손들에게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약속을 받아들일만한 바벨탑 건설 주동자인 니무롯이라면 애초에 바벨탑을 건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2 바벨탑이 태양신을 섬기는 제단이였을 것으로 봅니다. 태양신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 이 땅에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2. 그러면 현대의 바벨탑은 어떤 양상으로 변화되어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1) 과학 만능주의는 현대의 바벨탑입니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또 해결할려는 의식이 커지고 있습니다. 마음까지도 과학적으로 분석할려고 하는데 그것이 심령과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인간 창조도 유전 과학적으로 해결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냄새를 분별할 수 있는 컴퓨터가 등장하고 노인의 근육을 젊은 청년의 근육으로 만들어냅니다. 이제 유전자 코드를 연구해서 늙지 않는 세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쏘련에서 실제로 어디선가 땅을 9마일을 드릴로 파고 들어갔을 때 마귀의 형상을 한 거대한 새가 나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며 이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뜨거운 불덩어리 속에서 괴로워하는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망원경으로 천사들이 실제로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은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속임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물적인 세계로 떨어뜨리려는 계획입니다. 1950년경에 불트만은 현대 신학에서 “비신화화”를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성경을 신화로 볼 것이 아니라 과학의 눈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1 과학주의자는 마리아의 성령님잉태설을 부인할뿐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을 비 과학이라고 하여 부인합니다. 과학주의자는 철저한 증명을 요구하지만, 성경말씀은 증명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되고 믿음의 눈으로 받아 들여야 할 내용들입니다. 성경에는 확실한 증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증거입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부활입니다. 증명을 철저히 요구하는 과학이면서 어째서 증거가 부족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국의 교과서는 진화론에서 창조론으로 바뀐 교과서들이 많다고 합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이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는데 이는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매 생령이 된지라”하는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또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지만 신앙은 죄의 문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미국에 보스톤에 본부를 둔 기독교 과학 교회가 있습니다. 유력한 일간지로 “크리스챤 사이언스 모니터”(기독교 과학 감독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없고 평신도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예배 모임도 민주적인 원칙으로 전회원들의 의사에 따른다고 합니다. 전세계에 약60 교회 이상을 확보하고 있는데 서울 필동에도 있다고 합니다.
(2) 황금 만능주의가 현대의 바벨탑입니다.
1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돈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그 열매는 돈 주고 살 수가 없습니다.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좋은데 아주머니 보다는 호주머니에 있는 머니가 제일 좋더라”라는 허황된 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미국말에 럭키머니(Luckey Money)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돈”이 있습니다. “럭키머니”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럭키 바이블”입니다. 돈이 행운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이 심령 속에 있을 때 행운을 가져다 줍니다.
2 황금만능은 우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서 섬겼던 금송아지는 황금만능과 우상의 가증된 모들(Model)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통일교는 황금만능을 이용한 인간 우상을 내세우고 있는 종교입니다. 한 때 단군 신전을 세운다는 말이 유행처럼 이 땅에 퍼져서 기독교인들이 서명운동까지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통일교에서 계획을 세워 정부에 서류를 만들어 건의를 한 것이라고 어느 교역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고 그는 그 모든 서류를 복사한 것을 가지 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총을 만들어 팔아서 물질적으로만 발전한 통일교입니다. ㉡ 사단이 지상에 내려와서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우상에게 경배하도록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데, 사단은 666표를 주어 그 표를 받지 못하면 상거래를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666표는 우상은 물론이지만 돈과 연결된 악마의 표시인데 이와같이 황금만능으로 유혹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3) 인본주의(Humanism)가 현대의 바벨탑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라고 한 것은 인본주의임을 증명하는 성경구절입니다. 유교, 불교, 마호멧, 종교는 인본주의 종교입니다만 기독교는 신본주의 종교입니다. 유교, 불교, 마호멧교의 교주는 다 인간이지만 기독교의 교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 신인줄 믿습니다. 신본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의 이름대신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사26:9에 보면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4) 세속신학은 보이지 않는 현대의 바벨탑입니다.
1 신학자 틸리히(Paul.Tillich)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성(聖)과 속(俗)의 구별을 없이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계시를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그 도구를 이용할 때 거룩해 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틸리히는 “숨은 교회(Latent Church)”와 “나타난 교회(Manifest Church)”로 나누고 종교를 믿는 종교인, 유대인, 무신론 인본주의자들을 숨은 교회의 교인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신학자 하밀톤(William.Hamilton)은 “기독교의 새로운 본질”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신이 사망한 이 때에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바같 즉, 세상이다. 우리는 신이 없어서 추악한 이 세상 속에서 사랑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와같이 세속화 신학자들은 거룩됨과 세속성의 구별을 없애므로 구별된 하나님 자녀의식을 없앨려고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실존”을 부인함으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영원성을 없앨려고 했던 것은 사단의 역사로 현대의 바벨탑을 쌓는 데 더 크게 부채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탑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벨탑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병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병은 치료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병은 치료되는지 치료가 되지 않는지 잘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빙하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은 암초나 빙하가 항해를 하는 자들에게는 더 무서운 것입니다. 노아 이후 니므롯의 바벨탑보다는 20세기 바벨탑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단은 이 지상에 새로운 바벨탑을 세우기 위하여 이미 이 지상에서 준비 중에 있는 실정이고 이제 곧 이 지상에 내려 올 것이고, 이에 따라서 하나님은 그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하늘의 천사와 무서운 불을 이 땅에 보낼 것입니다. 그러한 때가 점점 닥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기위하여 힘써야 할 것이며, 종말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은 믿음의 눈을 떠서 자신의 생명 탑을 쌓아 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깨어 믿음을 지켜 지금까지 간직해온 믿음의 분량을 안탑갑게도 사단의 바벨탑 우상에 유혹되어서 쏟아뜨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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