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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속 보배 창고 (신28:12)

본문

우리들 모두가 영혼의 눈, 즉 영안을 뜨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무한한 보배 창고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내부 속에는 신령하고도 영원한 보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신령하고도 영원한 보배는 누가 베풀어 줍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줄로 믿고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영혼몸 속에는 생명의 혈맥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맥과 통해야 합니다. 생명의 맥, 그것을 발견하고 개발해 나간다면 인생을 보다 멋있게, 그리고 풍부하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영혼몸 속에서 원하는대로 무엇이나 끌어 낼 수가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아멘! 청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만-어떤 목적을 향하는 길목에서 노력이 없다면 귀한 성공과 승리의 결실을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보배도 노력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하였다는 비유는 바로 밭을 가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삶의 방식대로 착실하게 가꾸어질 때 겨울 광야 같은 공허한 느낌이 사라지고 어디서인지 살아 숨쉬는 인생의 맛을 느끼게 된다. 여기 젊은이들이 있지만 정말 뜨거운 피가 끓어 오르는 창창한 시절에 무슨 흔적을 남겨 이 시대를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 될까 아니 차라리 흔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증거를 남겨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한 보여 줄 흔적보다는 오히려 마음 속에 보이지 않는 증거가 더 바람직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증거, 영혼몸의 증거가 바로 귀중한 보배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지만, 성령님의 인침을 믿음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보배입니다. 믿음의 증거가 없는 보배는 일시적인 것으로우리들의 추구하는 참되고도, 궁극적인 보배가 아닙니다. 먼 훗날에 “아니 내가 그 때는 왜 귀한 시간을 헛 바람처럼 날려 보내었던가라고 한숨쉬며 후회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먼 훗날이 오는 그 때에 쓴 웃음을 짓는 이그러진 얼굴보다는, 승리의 찬가를 부르면서 그 옛날 젊은 날의 부푼 꿈을 안고 지나온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서 한편으로는 미래의 때를 생각해 본다면 가슴이 뿌듯해 지는 느낌이 들것이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훗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잊으시기 전에 일찍 일찍 하나님을 찾으시고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정신적인 창고가 있고, 영적 세계는 신앙적 창고가 있고, 육적 세계는 본능적 창고가 있습니다. 창고의 역할은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심령속에 있는 메모리 영역 안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가 (정신 세계)의 지성과, (영적 세계)의 감정 즉 사랑과 (육적 세계)의 이성이 하나가 될 때 무한한 세계로 향한 문이 열려 집니다. 자기 자신의 내부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좌절하고, 낙심하고, 실패를 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부닺히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좌절과, 낙심, 실패의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실패로 끝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참 저 사람은 실패자야! 허우적거면서 쓴잔을 마시는 인생을 좀 보게나” “우리들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바로 실패자입니다. 남을 이해 못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이해 못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자신의 참된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몸 속에 생명의 창고와, 연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인간 그 자체가 가장 위대한 연구실이요, 작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광맥, 혈맥을 자기 몸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제 여러분들은 나이도 많이 들고 했다고 낙심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나는 뭐 이제 나이도 많은데” 라고 스스로 포기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파푸아 뉴기니 산간 지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가 몇 살 먹었니 집에선 다섯살이구요, 학교에선 여섯살이래요, 버스를 탈 때는 세살밖에 안되요. 나는 나이가 한개인데 너는 세개씩이나 가지고 있네
그런데요 생일은 한번밖에 한차려 먹어요! 누가 저보고 나이를 물으면 저는 나이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할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라고 물으면 제 영혼의 나이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영원하기때문입니다. 구원파에서는 구원 받은 날을 영혼의 생일이라고 합니다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구원받은 날은 하나님이 아시는 일이지 인간은 모르기때문입니다. 구원은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기때문입니다.
1. 생명의 열쇠를 가진 자만이 심령 속에 보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의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속에 있습니다. 생명의 열쇠를 먼저 찾은 다음에 그 다음 자기 심령 속에서 남이 알지 못하는 보배를 간직해 놓아야 합니다. 예를들어 봅시다. 쇠붙이에 자석을 통과 시키면 그 쇠붙이는 자기 중량의 12배나 되는 무게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 자력을 제거하면 그 쇠붙이는 새의 깃털과 같은 핀침도 들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 영혼몸 속에 있는 무의식 창고를 자물쇠로 잠그고 있지나 않습니까 무의식 창고에 신앙의식을 채워놓으셔야 합니다. 성령님의 힘과 인도를 받아서 성령님의 방법대로 살면 보배로운 창고의 키(Key)를 얻을 수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듯이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지혜의 영이 담겨져 있는 생명의 열쇠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생명의 열쇠가 들려져 있고 그것이 누구에게 주어지느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행운의 키가 아니라 사랑과 노력으로 주어지는 열쇠입니다. 마치 지성소의 문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열려져 있는 것처럼 그리스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창고를 열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창고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창고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생명의 보배가 있는데 먼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열쇠를 꺼내지 않고는 예수님의 마음의 창고를 도무지 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아이로니컬하게도 가까이 있는 심령적 보물을 놓아두고 멀리서 눈에 보이는 보물을 찾아 헤메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람이 늙어가고 변합니다. 금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사람의 세포가 늙어가니 상대적으로 금의 가치도 변해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불루릿지(Blue Ridge) 산맥에 140년 간이나 묻혀 있는 보물이 있다고 해서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고는 부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양식 푸닥거리를 하고 가서 보물을 찾아 볼려고 하기도하고, 신통력으로 예언가의 말을 듣고 찾아 가기도 하고, 별 짓을 다해서 일확천금으로 벼락 부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찾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는 이 순간에도 찾고 있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곳 보물 단지에 묻혀 있는 돈은 자그만치 한국화페단위로 210억원(3000만불)이나 된다고 하니 동양인 서양인 흑인 할 것없이 찾고 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3장으로 된 보물지도는 이미 공개가 되었는데 지도가 그려져 있다면 벌써 찾을 수 있었겠습니다만 안탑갑게 숫자들로 기록되어 있어서 그것을 해독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영혼몸은 불루릿지의 보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창조적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에이 멘! 미국의 죠셉 머어피 목사는 말하기를 대체로 인간에게는 두가지 형(形)이 있는데 첫번째가 자력을 지닌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도록 애초부터 선택을 받아 태어 났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자신감이 있어”(I can do)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력을 지니고 있으니 끌어 당기는 힘이 있듯이 매력적인 삶이 될 것이고, 또한 축복도 사랑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활은 끌어 당기는 힘이 강해야 밀어 내는 화살도 힘차게 날라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자력이 빠진 사람은 공포와 의념으로 가득차 있어 “축 늘어진 수양버들처럼 하느적 하느적 거리며 빌빌 거리는 삶으로 “내 운명은 이런데” 대부분 불교 국가가 못사는 이유가 운명론에 사로잡히기 때문 입니다. 새로운 용어 인지 나와 있는 기존용어 인지는 잘 모르지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운명 창조론”입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앞으로 각자의 인생을 통해 나타나야만 합니다.
2. 잠재 의식 속에 존재하는 절대성, 곧 하나님의 속성을 찾아 냅시다. 우리들의 영혼 속에 있는 창고는 잠재의식들이 보물처럼 빛이 나고 있습니다. 금보다도 귀한 것, 무엇입니까 곧 개발되지 못한 힘의 의식은 바로 창조의 힘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하나님이 소유하신 그 힘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질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이락과 다국적 군간의 전투가 왜 벌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보배를 찾을려고 그다지도 싸울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을 아랍국이 결코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모여 너를 치는 자는 너를 인하여 패망하리라(사54:156)”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어 아랍국이 이스라엘을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과 애굽이 1967년도에 6일 전쟁을 싸운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자인 한 사람이 이스라엘 신문에 이런 보도를 낸 적이 있습니다. 밤 9시경 하늘에서 가랑비같은 불비가 내려서 아랍군대가 도망을 치는 중 공중에서 난데없이 천사장 같기도 하고 예수님 같기도 한 엄위한 모습으로 나타나 아랍군대들을 노려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랍군대는 누구의 명령도 없이 혼비백상하여 개개인이 도망을 치다보니 어느사이에 홍해 바다가에까지 후퇴를 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싸우지 않고 시내광야를 모두 점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영혼몸을 가지고 부지런히 노력해서 무엇인가 귀한 보배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힘의 일부를 가지고 노력으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영혼몸의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술이나 과학은 유에서 유를 만들어 내지만 인간은 그 정신적인 힘과 신앙의 힘과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창조의 단계로 들어 설 수 있는 영원한 존재 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제한된 육안으로 막힌 것만 볼 것이 아니라 무한한 영안으로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막힌 것도 열린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미국의 필박사(Norman V.peale)는 잠재의식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비결 세가지(쓰리 P)를 말씀했습니다.
(1) “그림을 그리라”(Picturize) 머리 속에 그린 그림은 잠재의식 속에서 그대로 남게 되어 그것이 운명에 미치는 작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과학자들은 사람의 상상력이 레이져 광선과 같은 힘이 있다고 하는 데 그것보다 더 큰 힘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기도하라”(Prayerize) 기도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하나님께 상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3) “실현하라, 현실화하라, 깨달아라”(Realize)하는 것이 필박사의 목표 달성 세가지 비결입니다. 잠재의식과 절대성을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마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여기서 “밭”은 잠재의식과 같고 “발견된 감추인 보화”는 절대성, 절대적인 진리, 그러면 절대적인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기도문을 외우다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주기도문은 불과 56 단어에 불과하고, 십계명은 297단어 그리고 미국의 독립선언문도 겨우 300단어, 인데 유럽 공동시장의 오리알 수출에 관한 규정은 무려 2만 6천 9백 11단어에 달한다고 합니다. 복잡할 수록 별거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성이 무엇이냐 하는 다시 말씀드리자면 잠재의식 속에 있는 절대성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기때문에 하나님의 속성 또는 성품이 잠재의식 속에 파묻히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죄를 지을 수록 밭에 감추어진 보물은 더 깊이 파묻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사단의 편에 섰을 때 하나님의 속성을 먼저 사단을 빼어 버릴 것입니다. 두가지 인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고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전도를 통해 신자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빼앗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전도를 해도 먹혀 들어가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죠셉 머어피 목사는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는 힘의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학자들은 교회를 떠나서 “심령 개발법”이니 “두뇌 개발법”이니 하지만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이니
왜냐하면 심령개발, 두뇌개발 아무리 연구한다고 해도은 믿음을 통해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3. 인간의 근본적인 힘, 원초적인 힘을 이용해서 심령 속에 보배를 발견하도록 합시다.
(1) 무아지경에 이르도록 힘써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무아지경이란 “내가 없고” 즉 “무아”이고 “지경” 극치에 이른 경지를 말합니다. 영어로는 “Ecstasy”로서 번역되는 데 “무아경” “황홀” “미칠듯한 기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아지경이 요가나 불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무아지경(無我之境)은 진정한 의미는 자기 자신은 가려지고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령의 보배는 그리스도인데 무아지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을때 얼마나 기쁘면 미칠듯한 기쁨으로 해석을 했겠느냐 그 말입니다.
(2) 본질적이면서 원초적인 힘은 사실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는 힘입니다. 깊은 마음 속에는 누구나 다 원초적인 힘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거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죄의 형상으로 가리워 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아직도 생명과일을 먹던 잠재의식이 남아 있는데 그 잠재의식이 바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본능적인 힘입니다. 믿음의 본능이 누구나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3) 잠재 의식 속에 있는 원초적인 힘이 꿈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기까지는 그의 잠재 의식 속에 꿈을 통한 원초적인 힘을 믿고 있었습니다. 꿈과 믿음이 일치될 때 현실화(Realization)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꿈”은 그것이 현실화 될 때까지 그대로 잠재의식 창고 속에 갇혀서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꿈은 그것이 실현될 때까지 믿음이 잠재의식 창고 속에 있는 꿈을 끌어내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촉진제 역활을 하게 되는 것이 올시다. 잠재의식 속에 있는 힘, 즉 원초적인 힘은 믿음으로 개발되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은 “필” 박사가 말한대로 그림을 마음으로 그리고, 기도하면 현실화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벽에 붙어있는 그림은 일단 그림을 그린 후 손질이 끝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그려진 그림은 잠재의식 속에 반영될 때까지 계속 잊어서는 안되고 또한 벽에 붙어있는 그림과는 달리 계속 생각으로 고쳐 나갈 수도 있는 것이고 변화시켜 나갈 수도 있습니다.
4. 우리는 우리들 심령 속에 있는 보배 창고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깨닫고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열쇠를 받고 창조의 기능을 부여 받도록 합시다.
(1) 여호와를 경외할 때 심령 속에 있는 보배창고가 열립니다. 사33:6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희 보배니라” 잠2:4 “은을 구하는 것같이 지혜와 명철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라” 과수원을 하던 스펄전이 하루는 창문을 통해 이웃 사람이 사과 몇개를 훔쳐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사과 한 두개를 먹어보고 쓰고 신맛을 느끼자 얼굴을 찌프리고는 더 이상 사과를 따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스펄전은 바구니에 사과를 잔뜩 담아 이 사람의 집에 찾아가 바구니를 전달하였습니다. 그러자 사과를 훔쳐 먹은 사람이 고백하기를 이미 사과를 맛보았는데 너무 쓰고 시어서 먹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스펄전이 말했습니다. “사실은 사과를 훔쳐 먹으려는 사람을 쫓아 내기 위해 과수원 입구에 맛이 시고 쓴 야생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러나 과수원 안에는 정말 맛이 좋은 사과가 이처럼 많이 있답니다. 회개 하고 깊은 신앙을 소유하십시요! 기독교 신앙을 처음 가질려고 할때는 먹을 만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애 버릴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은 은혜의 장소로 갈수록 먹을 만한 성령님의 열매들이 얼마나 풍성한가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2) 히스기야의 창고와 솔로몬의 창고에는 없는 것이 없이 풍부했지만 히스기야왕의 경우 교만해져서 마음의 창고에 있는 보물을 얻지 못함으로 하나님이 병으로 칠려고 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보면 전무후무한 부귀공명을 누렸고 지혜로웠지만 결국 그도 마음의 창고의 결정적인 생명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솔로몬은 마음의 창고에 있는 보배들을 꺼내어 쓴 것이 오늘날 잠언 전도서로 남아 있긴 하지만 원초적인 창조의 생명적인 기능을 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생명의 열쇠를 가진 자만이 심령 속에 보배를 찾을 수 있습니다.
2. 잠재 의식 속에 존재하는 절대성, 곧 하나님의 속성을 찾아 냅시다.
3. 인간의 근본적인 힘, 원초적인 힘을 이용해서 심령 속에 보배를 발견하도록 합시다.
4. 우리는 우리들 심령 속에 있는 보배 창고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를 깨닫고 최선을 다하여 생명의 열쇠를 받고 창조의 기능을 부여 받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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