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나는 새를 보라 (마6:26-32)
본문
인간을 제외한 동물이나 식물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염려할 줄 모릅니다. 예수님은 새에 대한 예를 들면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제거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새은 아시다시피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부께서 기르신다고 하였는데 여러분!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지 않겠는가 때때로 우리들은 미물보다 못할 때가 있습니다.새를 비롯한 모든 동물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평화롭고 먹을 것이 없어도 하늘을 향하여 불평하지 않습니다. 선악이 무엇인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종족을 보호하시며,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성경에 새는 마귀로 비유되고 있으나 본문에 예수님이 바라보라고 한 새는 마귀로 비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서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26절에 “공중에 새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무한대의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 우리들도 새처럼 훨훨 날아 보았으면 할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를 보라고 하신 의도는 새를 보고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새는 공중을 자유로히 날아 가지만 믿음이 없고 창조주를 모릅니다. 창조주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새보다 못합니다.
(1)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가장 고귀한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위해 힘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새는 하나님이 기르시지마는 새뿐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본능적 활동을 알지 생명의 존엄성을 알지 못합니다.
1 새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동물과 다른데 그것은 힘들고 땀을 흘리는 일일지라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도 농사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먹고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새도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우는 인간이 새보다 더욱 귀한 자로서 하나님이 기르시면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줄 믿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무위도식하는 먹고 대학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앞으로 구원받아 에덴을 회복할 때는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 올시다. 타락한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인격을 가지고 구원 받으면 타락 이전의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까 농경업이 생긴 것은 타락 이후입니다.
2 본문의 공중의 새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에 우리들이 심지 않으니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씨를 뿌려 주시고 심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은 공중의 새와 같이 날라갑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새처럼 자유를 동경합니다. 참 자유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옵소서 새는 심지도 않으나 하나님이 기르시니 사랑의 씨조차 뿌리지 못한 마음에 영원한 생명나무를 심어 주옵소서”라고 고요히 하나님께 공중나는 새를 보며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영육간에 농사 짓는 일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염려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시고 계신가 안 가지고 계신가 스스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이렇게 외쳐 고백해 봅니다. “새들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며 관심을 갖거늘 하물며 사랑의 씨를 심어 주시며 기르시는 하나님이 내 영혼의 신령한 경작자이시며, 창조주 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3 새는 거두지 않습니다. 추수를 하지 않으니 겨울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염려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은 공중나는 새와 같으니 사랑의 열매를 스스로 거둘 줄 모릅니다. 마음을 거두시는 분은 심판자 하나님이십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다가 영혼의 생존을 경휼히 여기기 쉽습니다.
영혼의 생존을 위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를 마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우리들은 염려할 것이 없고 기쁨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공중 나는 새처럼, 염려없이 자유로이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새처럼 추수할 줄 모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주관하듯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 영혼의 생존을 위해 힘쓴 자는 성령님의 씨 뿌림을 받았으니 성령님의 열매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내 마음에 열매를 거두는 날 하늘에는 영광의 노래로 충만하리 나는 그 때 주님께 외치리라 나는 심을 줄 모르나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심으셨나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라났으니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나이다 나는 새처럼 아무것도 모르나 주님이 기르셨나이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4 창고에 모아드리지 않습니다. 새는 보금자리는 있어도 창고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것을 우리들이 모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모아주셔야 합니다. 거두는 것과 모으는 것은 서로 다르니 거두는 것은 사랑의 결과요 모으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진실로 우리들이 모을 것은 재물과 양식이 아니니 땅의 창고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창고에 모으는 것이니 봉사요, 사랑이요, 헌물입니다. 마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나 자신을 위해 모으는 것은 잃어 버리기 쉬우나 하나님이 모으는 것은 잃어 버리지 않고 더욱 더 풍족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행실을 모으시고, 상급의 조건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유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5 새는 부지런히 공중을 날아 다닙니다. 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합니다. 부지런한 자는 하나님이 양육해 주십니다. 성경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날개가 있어 힘껏, 마음껏 날아다녀도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마음에 성령님의 힘이 있어서 성령님의 날개를 달고 새처럼 부지런히 영의 양식을 구하는 자가 되십시요!
(2) 눅12장24절에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만 그곳에는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나와 있는데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고 했으니 까마귀를 잠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좋은 새도 많은데 예수님은 왜 하필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까 까마귀는 영적으로 죄인과 또는 사단을 상징하고 있는 새입니다.
첫째로 까마귀는 농작물을 해칩니다. 타인이 애써 키워 논 마음의 열매를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된 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2 시체를 먹는 불결한 새입니다. 40일이 지나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 날려 보내니 시체를 뜯어 먹느라고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시체를 좋아하니 영적으로 볼 때 죽음을 좋아하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까마귀 같은 죄인도 사랑하는 데 하물며 인간을 사랑으로 키우시고 돌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2.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본문에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동물도 귀하게 여기는 데 하물며 인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존귀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왜 귀한 존재인가를 함께 생가해 봅시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귀한 존재입니다.(창1:26)(고전11:7)(골3:10)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의미로 가시적(可視的)인 존재가 아니라 내형적이고 불가시적입니다. 따라서 신인 동형설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으로 지,정,의를 의미하며 영의 형상(Image)를 말합니다.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1 知的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지적 능력으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는 인간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는 누구나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아기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되어 있는데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므로 말씀의 젖을 사모하지 못합니다.
2 인간은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적 능력을 있으니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누구나 다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사랑과 감정을 빼면 그야말로 두발가진 동물에 불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추상명사는 사랑입니다. 국어사전에도 역시 사람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깝게 기록된 단어는 사랑입니다. 철학자 풀라톤은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를 “쭉지 없는 두발가진 동물”이라고 정의를 내리자 이 소문을 듣고 디오게네스 철학자는 쭉지 뜯은 닭 한마리를 가지고 풀라톤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것이 선생이 말한 인간인가요”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 때 풀라톤은 다시 보충해서 말하기를 “둥글 넓적한 발톱을 가진 쭉지 없는 두발가진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3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의 의로움, 도덕적인 의로움, 우리들에게는 다 필요합니다.
여러분! 공중나는 새는 지, 정, 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알아야하고, 정, 사랑해야 하고 의, 옳은 일을 행해야 하는데 거기에 신(信)이 하나 더 붙어 지정의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서 공중에 나는 새보다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됩니다.
(2) 인간의 가치관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부여 받았고 생명을 잘 다스리며, 또 주신 생명을 잘 활용해서 창조적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기대와 축복 속에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인간 그 자체가 복된 존재입니다. 육신의 장막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여러분들은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육이 분리되기 전에 믿음이 무엇이냐를 알아야만하고 믿음속에서 영혼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공중나는 새”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2 참 생명은 믿음에 있습니다. 공중나는 새보다 귀한 것은 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는데 있습니다. 30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믿음 안에서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믿음이 있는 분이 염려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만 있다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생명보다 더 고차원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보배입니다. 참으로 생명의 가치는 영혼안에 내재하는 그리스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에게 주신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발해서, 공중에 나는 새보다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깨달을 때 염려가 사라지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1. 26절에 “공중에 새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무한대의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 우리들도 새처럼 훨훨 날아 보았으면 할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새를 보라고 하신 의도는 새를 보고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새는 공중을 자유로히 날아 가지만 믿음이 없고 창조주를 모릅니다. 창조주를 모르고 사는 인생은 새보다 못합니다.
(1)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은 가장 고귀한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위해 힘쓰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새는 하나님이 기르시지마는 새뿐아니라 모든 동물들은 본능적 활동을 알지 생명의 존엄성을 알지 못합니다.
1 새는 농사를 짓지 않지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농사를 짓고 사는 것이 동물과 다른데 그것은 힘들고 땀을 흘리는 일일지라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들도 농사를 짓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먹고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새도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우는 인간이 새보다 더욱 귀한 자로서 하나님이 기르시면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될 줄 믿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이 무위도식하는 먹고 대학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 믿음을 가지고 살 때 앞으로 구원받아 에덴을 회복할 때는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 올시다. 타락한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도록 되어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인격을 가지고 구원 받으면 타락 이전의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까 농경업이 생긴 것은 타락 이후입니다.
2 본문의 공중의 새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공중의 새는 심지 않는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에 우리들이 심지 않으니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에 씨를 뿌려 주시고 심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내 마음은 공중의 새와 같이 날라갑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새처럼 자유를 동경합니다. 참 자유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옵소서 새는 심지도 않으나 하나님이 기르시니 사랑의 씨조차 뿌리지 못한 마음에 영원한 생명나무를 심어 주옵소서”라고 고요히 하나님께 공중나는 새를 보며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은 영육간에 농사 짓는 일로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염려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시고 계신가 안 가지고 계신가 스스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 이렇게 외쳐 고백해 봅니다. “새들도 하나님께서 기르시며 관심을 갖거늘 하물며 사랑의 씨를 심어 주시며 기르시는 하나님이 내 영혼의 신령한 경작자이시며, 창조주 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3 새는 거두지 않습니다. 추수를 하지 않으니 겨울에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염려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은 공중나는 새와 같으니 사랑의 열매를 스스로 거둘 줄 모릅니다. 마음을 거두시는 분은 심판자 하나님이십니다. 육체의 생존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다가 영혼의 생존을 경휼히 여기기 쉽습니다.
영혼의 생존을 위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를 마시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우리들은 염려할 것이 없고 기쁨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공중 나는 새처럼, 염려없이 자유로이 날아 다닐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새처럼 추수할 줄 모른다 해도 하나님께서 공중의 나는 새를 주관하듯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서 거두실 때 영혼의 생존을 위해 힘쓴 자는 성령님의 씨 뿌림을 받았으니 성령님의 열매를 거두어 주실 것입니다. “내 마음에 열매를 거두는 날 하늘에는 영광의 노래로 충만하리 나는 그 때 주님께 외치리라 나는 심을 줄 모르나 주님께서 생명나무를 심으셨나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라났으니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나이다 나는 새처럼 아무것도 모르나 주님이 기르셨나이다.”라고 주님께 말씀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4 창고에 모아드리지 않습니다. 새는 보금자리는 있어도 창고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것을 우리들이 모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모아주셔야 합니다. 거두는 것과 모으는 것은 서로 다르니 거두는 것은 사랑의 결과요 모으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진실로 우리들이 모을 것은 재물과 양식이 아니니 땅의 창고에 모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창고에 모으는 것이니 봉사요, 사랑이요, 헌물입니다. 마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여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나 자신을 위해 모으는 것은 잃어 버리기 쉬우나 하나님이 모으는 것은 잃어 버리지 않고 더욱 더 풍족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행실을 모으시고, 상급의 조건으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잠3:9-10 “네 재물과 네 소유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5 새는 부지런히 공중을 날아 다닙니다. 새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합니다. 부지런한 자는 하나님이 양육해 주십니다. 성경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는 날개가 있어 힘껏, 마음껏 날아다녀도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마음에 성령님의 힘이 있어서 성령님의 날개를 달고 새처럼 부지런히 영의 양식을 구하는 자가 되십시요!
(2) 눅12장24절에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만 그곳에는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나와 있는데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고 했으니 까마귀를 잠간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좋은 새도 많은데 예수님은 왜 하필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까 까마귀는 영적으로 죄인과 또는 사단을 상징하고 있는 새입니다.
첫째로 까마귀는 농작물을 해칩니다. 타인이 애써 키워 논 마음의 열매를 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된 자도 하나님은 사랑으로 돌아 오기를 기다리며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입니다.
2 시체를 먹는 불결한 새입니다. 40일이 지나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 날려 보내니 시체를 뜯어 먹느라고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는 시체를 좋아하니 영적으로 볼 때 죽음을 좋아하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까마귀 같은 죄인도 사랑하는 데 하물며 인간을 사랑으로 키우시고 돌보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2.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본문에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동물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동물도 귀하게 여기는 데 하물며 인간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존귀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인간은 왜 귀한 존재인가를 함께 생가해 봅시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니 귀한 존재입니다.(창1:26)(고전11:7)(골3:10) 하나님의 형상은 외형적인 의미로 가시적(可視的)인 존재가 아니라 내형적이고 불가시적입니다. 따라서 신인 동형설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으로 지,정,의를 의미하며 영의 형상(Image)를 말합니다. 엡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1 知的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은 지적 능력으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는 인간임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는 누구나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찾지 않는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린아기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도록 되어 있는데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므로 말씀의 젖을 사모하지 못합니다.
2 인간은 동물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적 능력을 있으니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이 누구나 다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사랑과 감정을 빼면 그야말로 두발가진 동물에 불과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추상명사는 사랑입니다. 국어사전에도 역시 사람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깝게 기록된 단어는 사랑입니다. 철학자 풀라톤은 사람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를 “쭉지 없는 두발가진 동물”이라고 정의를 내리자 이 소문을 듣고 디오게네스 철학자는 쭉지 뜯은 닭 한마리를 가지고 풀라톤을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것이 선생이 말한 인간인가요”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 때 풀라톤은 다시 보충해서 말하기를 “둥글 넓적한 발톱을 가진 쭉지 없는 두발가진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3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의 의로움, 도덕적인 의로움, 우리들에게는 다 필요합니다.
여러분! 공중나는 새는 지, 정, 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알아야하고, 정, 사랑해야 하고 의, 옳은 일을 행해야 하는데 거기에 신(信)이 하나 더 붙어 지정의에 믿음을 더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서 공중에 나는 새보다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게 됩니다.
(2) 인간의 가치관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생명에 있습니다. 생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부여 받았고 생명을 잘 다스리며, 또 주신 생명을 잘 활용해서 창조적 생명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기대와 축복 속에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입니다. 인간 그 자체가 복된 존재입니다. 육신의 장막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여러분들은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육이 분리되기 전에 믿음이 무엇이냐를 알아야만하고 믿음속에서 영혼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영혼이 성장하지 못한다면 “공중나는 새”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2 참 생명은 믿음에 있습니다. 공중나는 새보다 귀한 것은 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찾는데 있습니다. 30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여러분! 믿음 안에서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믿음이 있는 분이 염려 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음만 있다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생명보다 더 고차원의 생명을 주십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 소유하신 생명과 같은 보배입니다. 참으로 생명의 가치는 영혼안에 내재하는 그리스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결론:여러분! 여러분들은 인간에게 주신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고 개발해서, 공중에 나는 새보다 더욱 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임을 깨달을 때 염려가 사라지고 가치있는 존재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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