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31)
본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것이 그대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창1:4,10,12,18,21,25,31)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좋은 것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기뻐하는 것,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심히 아름답게 보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있습니다. 성도의 의무는 오직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어떤 것을 보시고 기뻐하실까요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작품, 내 새끼는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저희는 저희 아이들이 제일 아름다워 보입니다. 나를 닮았고, 내 몸을 통해서 태어난 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지만 나보다 더 귀한 나의 분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위해 엄마는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아기들의 옷을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아기가 그 옷을 입었을 때 엄마는 더욱 아기가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이 그곳에서 만든 것이라며 작품을 가져와 한껏 자랑합니다. 제가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고 애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 수준에서 한껏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작품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하나님 수준에서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십니까 그 말도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비교할 때 어울리는 말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되는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과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강원도 한적한 시골이었던 정동진 역이 TV에서 모래시계 가 방영되고난 뒤에 유명해졌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출을 보고자 사람들은 밤새 기차를 타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연인들끼리 지켜보는 일출은 서로의 마음을 솟아오르는 해돋이만큼이나 일렁이게 하는가 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서기를 원합니다. 여행을 할 때 제일 기분이 안 나는 것은 혼자 하는 여행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혼자 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중국의 계림, 미국의 그랜드 캐년, 스위스의 알프스, 북한의 금강산 등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합니다. 일생에 한번은 꼭 가보고 싶습니다. 이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곳이며 우리는 그곳에 가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혼자라면 저는 모든 것을 거절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아름다운 곳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창조사역이 전적인 하나님만의 놀라운 섭리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의 완벽한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 수준에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만큼 그고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을 보면 눈썹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의 문외한이 제가 눈썹을 그리면 그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거장의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 자신만의 모습, 그 영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스스로를 아름답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욱 추하게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사람이 볼 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겨난 것은 신구약 중간기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선민인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고통을 끝없이 겪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보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일어난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1 그들은 완벽한 십일조를 했습니다. 기독교 방송에 나와 상담을 하는 사람들의 질문내용들을 들어보면 십일조에 관한 상담이 많습니다. “
경제위기를 만나서 벌이가 없는데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소득의 1/10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익본 부분만을 해야 합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십일조를 하기 싫은 사람들의 상담전화입니다. 하자니 아깝고 안하자니 께름칙하기 때문에 상담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안해도 된다는 동의를 목사님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에누리없이 철저하게 했습니다.
2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눅18:12)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금식에 열심이었는지 예수님에게도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힐난했습니다.(마9:14)
3 자신의 형편을 고려치 않고 구제에 힘썼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선명회와 한국통신이 ARS 전화를 통해 불우이웃과 결식아동 돕기 운동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꾸러기집에 다니는 저희 아이들이 전화 수화기에 스티커를 갖다 붙였습니다. 700-0400 다이얼을 누르면 자동으로 전화요금으로 1000원이 가산되고 그 돈은 한국선명회로 지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700-0400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이웃을 도왔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이 전화를 하라고 했다며 걸핏하면 그 다이얼을 눌러대는 것입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이러다가 우리집 거덜나겠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스티커를 떼버렸습니다. 이게 우리들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생색만 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형편을 생각지 않고 남을 돕는 구제에 적극적으로 힘썼습니다.
4 하루에 상당한 시간을 기도하는 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결사적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이 모든 계명들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을 세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합니다. 둘째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의 열심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독사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 자식이라는 뜻이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너희에게는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획득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전면 부정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십일조, 구제, 금식, 기도생활에 힘써온 자신들을 죄인으로 정죄한 예수가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메시아가 오면 자신들의 신실한 믿음을 인정해주고 세리와 창기를 향해 진노의 채찍을 들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을 안해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도저히 메시야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돈, 명예, 권세, 학문, 지위 등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은 하찮게 여기십니다. 그럴 때 인간은 화가 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를 십자가로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일평생 한 벌 무명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팔 년 동안 자리에 눕지도 않고 의자에 기대어 앉지도 않았습니다. 돌아다니거나 가부좌하고 수도에만 정진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은 몸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한 바가지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는데도 그가 구원받지 못했느냐고 반문합니다. 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열심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잘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울수록 주님의 공로를 부정합니다. 자기의 공로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에 출석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전 재산을 드려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설사 주님을 위하여 순교의 잔을 마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구원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으려 하면 회칠한 무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므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주님만 자랑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십시오.
3.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는 인간의 의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기 성경에는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5-6) 말했습니다. 인생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굳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완전하시고 선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워지고 선한 존재가 되어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일체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자신이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려 하는 일체의 시도를 다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한 믿음만 인정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로마 백부장의 믿음도 자기를 부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 우리는 아름다움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아름답게 보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것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일체의 시도를 다 물리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내 공로가 얼마나 주장되고 있습니까 내가 전혀 주장되지 않을 때, 완전히 꺾어지고 부정될 때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주님만을 붙잡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어떤 자세로 기도하십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18:13) 했습니다. 통회하는 세리와 창기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전적으로 자기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정, 끝없이 되살아나는 나를 죽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자랑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주장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갈6:14)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만 의지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을 높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베드로를 높이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갔을 때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가 뛰어나와 땅에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그곳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높여 그 앞에 제사하고자 합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분개하며 막았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존귀 영광 받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그 모습만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세계가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작품, 내 새끼는 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저희는 저희 아이들이 제일 아름다워 보입니다. 나를 닮았고, 내 몸을 통해서 태어난 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니지만 나보다 더 귀한 나의 분신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를 위해 엄마는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아기들의 옷을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아기가 그 옷을 입었을 때 엄마는 더욱 아기가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이 그곳에서 만든 것이라며 작품을 가져와 한껏 자랑합니다. 제가 볼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에 자부심이 있고 애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 수준에서 한껏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만든 어떤 작품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하나님 수준에서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십니까 그 말도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를 비교할 때 어울리는 말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은 얼마나 되는 것이었을까요 하나님은 그 아름다움을 인간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과 함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강원도 한적한 시골이었던 정동진 역이 TV에서 모래시계 가 방영되고난 뒤에 유명해졌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출을 보고자 사람들은 밤새 기차를 타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연인들끼리 지켜보는 일출은 서로의 마음을 솟아오르는 해돋이만큼이나 일렁이게 하는가 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곳에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서기를 원합니다. 여행을 할 때 제일 기분이 안 나는 것은 혼자 하는 여행입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혼자 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중국의 계림, 미국의 그랜드 캐년, 스위스의 알프스, 북한의 금강산 등은 빼어난 절경을 자랑합니다. 일생에 한번은 꼭 가보고 싶습니다. 이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곳이며 우리는 그곳에 가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혼자라면 저는 모든 것을 거절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아름다운 곳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던 이유는 창조사역이 전적인 하나님만의 놀라운 섭리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의 완벽한 역사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 수준에서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빠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만큼 그고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그림을 보면 눈썹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상해 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의 문외한이 제가 눈썹을 그리면 그것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거장의 작품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그래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개입되지 않은 하나님 자신만의 모습, 그 영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름다운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이 스스로를 아름답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욱 추하게 보십니다.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사람이 볼 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겨난 것은 신구약 중간기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선민인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고통을 끝없이 겪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보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일어난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의 신앙생활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봅시다.
1 그들은 완벽한 십일조를 했습니다. 기독교 방송에 나와 상담을 하는 사람들의 질문내용들을 들어보면 십일조에 관한 상담이 많습니다. “
경제위기를 만나서 벌이가 없는데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소득의 1/10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익본 부분만을 해야 합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십일조를 하기 싫은 사람들의 상담전화입니다. 하자니 아깝고 안하자니 께름칙하기 때문에 상담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안해도 된다는 동의를 목사님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에누리없이 철저하게 했습니다.
2 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눅18:12)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금식에 열심이었는지 예수님에게도 우리는 금식하는데 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힐난했습니다.(마9:14)
3 자신의 형편을 고려치 않고 구제에 힘썼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선명회와 한국통신이 ARS 전화를 통해 불우이웃과 결식아동 돕기 운동을 펼친 적이 있습니다. 꾸러기집에 다니는 저희 아이들이 전화 수화기에 스티커를 갖다 붙였습니다. 700-0400 다이얼을 누르면 자동으로 전화요금으로 1000원이 가산되고 그 돈은 한국선명회로 지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700-0400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이웃을 도왔다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선생님이 전화를 하라고 했다며 걸핏하면 그 다이얼을 눌러대는 것입니다.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이러다가 우리집 거덜나겠다.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스티커를 떼버렸습니다. 이게 우리들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생색만 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기 형편을 생각지 않고 남을 돕는 구제에 적극적으로 힘썼습니다.
4 하루에 상당한 시간을 기도하는 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고, 결사적으로 이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걸고 이 모든 계명들을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구원의 조건을 세 가지로 꼽았습니다.
첫째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어야 합니다. 둘째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말씀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중에서도 바리새인의 열심은 자타가 다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독사의 자식이란 말은 마귀 자식이라는 뜻이요,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너희에게는 천국의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구원을 획득한 사람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전면 부정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십일조, 구제, 금식, 기도생활에 힘써온 자신들을 죄인으로 정죄한 예수가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메시아가 오면 자신들의 신실한 믿음을 인정해주고 세리와 창기를 향해 진노의 채찍을 들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을 안해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들을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도저히 메시야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돈, 명예, 권세, 학문, 지위 등 하나님을 떠나서 추구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은 하찮게 여기십니다. 그럴 때 인간은 화가 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를 십자가로 몰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성철 스님을 보십시오. 일평생 한 벌 무명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팔 년 동안 자리에 눕지도 않고 의자에 기대어 앉지도 않았습니다. 돌아다니거나 가부좌하고 수도에만 정진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은 몸을 화장했을 때 사리가 한 바가지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는데도 그가 구원받지 못했느냐고 반문합니다. 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떠난 열심입니다. 인간이 볼 때는 잘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세울수록 주님의 공로를 부정합니다. 자기의 공로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평생 교회에 출석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전 재산을 드려 주님 앞에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설사 주님을 위하여 순교의 잔을 마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직 구원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습니다. 그것으로 구원받으려 하면 회칠한 무덤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므로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주님만 자랑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십시오.
3.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는 인간의 의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욥기 성경에는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25:5-6) 말했습니다. 인생들에게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굳이 상대방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완전하시고 선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워지고 선한 존재가 되어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1 하나님 안에 우리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일체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부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자신이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받으려 하는 일체의 시도를 다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믿음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자신을 전적으로 부정한 믿음만 인정하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보십시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막7:28) 로마 백부장의 믿음도 자기를 부정한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7:7) 우리는 아름다움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아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아름답게 보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것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일체의 시도를 다 물리치십니다.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내 공로가 얼마나 주장되고 있습니까 내가 전혀 주장되지 않을 때, 완전히 꺾어지고 부정될 때 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창세기 32장의 야곱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주님만 의지했습니다. 주님만을 붙잡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어떤 자세로 기도하십니까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18:13) 했습니다. 통회하는 세리와 창기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전적으로 자기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정, 끝없이 되살아나는 나를 죽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자랑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주장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은 아름답게 보십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갈6:14)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자랑할 만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도, 자랑하지도, 전하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만 의지함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을 높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베드로를 높이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고넬료의 집에 베드로가 갔을 때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가 뛰어나와 땅에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 바울 일행이 루스드라 성에 들어가 그곳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병자를 고쳤습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바울 일행을 높여 그 앞에 제사하고자 합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분개하며 막았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존귀 영광 받으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는 그 모습만이 아름다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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