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 (요10:1-15)
본문
선한 목자에 대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본문 요한 복음에 나와 있는 선한목자에 대한 비유는 예수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일단 “선한목자”하며는 머리속에 “지팡이와 어린양”이 떠오릅니다. 의로운 지팡이로 어린양이 되는 성도들을 양육하시는 것입니다. 명종(明宗) 때 정승 박순(朴淳)도 지리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는데, 지팡이 짚고 산길을 걸으면 산새들이 그 지팡이 소리를 알고 몰려들었으며 바위에서 낮잠을 자면 다람쥐들이 소매나 바지가랑이 속을 들랑거렸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를 짚으시고 푸른 초장을 걸어가시는 소리를 듣고 몰려와야 합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론의 지팡이는 불모의 땅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생명의 지팡이요, 로마 집정관의 지팡이는 자유의 지팡이로서 그것에 손을 대게 함으로 비로서 노예는 해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자의 지팡이는 어떤 지팡이 입니까 양떼의 영혼을 건져주시기 위한 치리자의 지팡입니다.
1.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선한 목자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입니다. 진리는 이론적이라면 생명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론은 반드시 실제가 따라가야 합니다.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면 그 이론은 타당성이 없는 것입니다. 철학이론이 아무리 뛰어나도 생명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생명이라고 선포하셨듯이 생명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생명을 가져오는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고, 얻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기회인줄 믿습니다.
(2) 선한목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빌2:6)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내려 오시더니 종의 형체가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요한복음 10장 11절에 있는 말씀대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고난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양들을 위한 선한 목자의 참 모습입니다.
1. 예수님은 양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는 절대로 여러분의 영혼이 목적하시는 그 아름다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바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좋은 곳, 영원한 곳, 기쁘고 즐거운 곳으로 이끌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선한 자는 선한 곳으로 인도하고 악한 자는 악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선한 곳은 선한 자들이 모여 사는 천국이요 악한 곳은 악한자들이 모여 사는 지옥입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 다” 시31:3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 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임이니라” 주님은 여러분들의 모든 형편과 사정과 상황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선 그야말로 “뻔할 뻔” “텔레비 테”자 입니다. 약점도 아시고 부족함도 아시고 갈등과 고민과 남모르는 비밀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는 정확히 아시기때문에 정확한 길을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아는 자가 정확히 고쳐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90년도)에 정부에서 “특명 사정반”을 조직한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란 말의 뜻이 “바르게 고친다는 뜻”을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길이 되심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도덕과 과학은 결코 안일하게 살 수 있는 길로는 이끌지라도 생명의 길로 이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아는 자가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줄 우리들은 믿습니다.
(1) 시험하시면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못에 작은 장남감 배를 띄우고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난감 배가 멀리가기 시작하여 손에 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그 배를 잃어버릴까하여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자 그 배 근처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그 배가 그 던지는 돌로 인하여 빠질까 싶어 더 크게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난감 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도 억울한데 돌까지 던지지 더 크게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장난감 배는 마치 큰 파도가 밀려 오는 것같이 물에 빠질듯 빠질듯하면서 기웃뚱, 기웃뚱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점점 연못가로 오더니 그 배를 그 어린아이가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것을 잃어 버릴까 염려합니다. 그리고 큰 풍랑이 오면 빠질 까 두려원합니다. 그러나 큰 파도가 닥치면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돌을 던진 것은 배를 빠뜨리게 하는 것으로 어린아이는 착각을 한 것처럼 시험의 큰 물결이 닥치면 마치 죽을까바, 생명을 잃을까바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더 좋은 것을 주실려고 하는 사랑인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는 안될 것 같아도 잘되는 것입니다.
(2) 어린양을 안아주시면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선한 목자 앞에서 어린양과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도 보고 호랑이도 구경하였습니다. 빵과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구경을 하다가 자시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놓고서 혼자 뛰어 다니면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재미있게 구경을 하다가 보니 자기가 아버지의 손을 놓쳐 그만 아버지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혼자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먹는 것도 맛이 없고 구경도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두려운 마음만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 재미도 있고 즐거웠지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보니 오고갈 곳도 없이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선한목자의 손을 놓치면 의욕이 사라지면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인생의 험한 길, 살기 어려운 길을 걸어갈 때에 누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까 우리가 때때로 열심을 낼 때 내 힘으로, 내 경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칠 때에 우리는 미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고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데, 그곳은 예수님이 예비해 두신 쉴만한 안식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거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어느 거지가 예배 시간에 우연히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 거지가 목사님께 오더니 나는 휴거를 못하니까 휴거하실때 혹시 지갑을 가지고 계시면 던져 놓고 가십시요! 목사님 그러면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휴거하게 하실 때는 아마 “호주머니가 안 달린 흰 옷”을 순식간에 입혀주신 후에 휴거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10절에서 15절까지는 양을 보호하시는 목자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윗이 목동(목자)으로 있으면서 사나운 사자를 물리친 것은 우리 영혼을 악의 권세에서 보호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미성년자는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보호자(Protector)는 법으로 부모를 가르칩니다. 부모는 법으로 여러분 자녀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사실 하나님 앞에 완숙하지 못한 단계에 있기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같은 물질 문명 속에서는 보호를 받을 필요성이 절실해 집니다. 천국에 다녀온 스웨덴 보르그가 누구에게나 보호하는 천사가 둘씩 있다고 하는데 천국에 다녀오고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누가 우리를 악의 권세에서 보호할 수 있으며 이 죄악의 도전에서 우리 마음을 보호하며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시련과 죽음 앞에서 보호할 수 있느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제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자. 주님만을 의지하고 따라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2. 꼴을 먹여 주시는 목자입니다.(요10:7-9) 예배시간은 말씀의 꼴을 먹는 시간입니다. 인간을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제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입니다. 서로 인격이 맞지 아니하면 교제가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사랑을 나누며 꼴을 먹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이 강화도에서 목회 하실 때, 산양을 키워 보았는데 아카시아 잎사귀를 좋아합니다. 끝이 꼬부라진 지팡이로 아카시아 가지를 잡아당겨 그 잎사귀를 따서 먹여주던 생각이 납니다. 아카시아 잎사귀를 주면 양이 좋아서 꼬리를 흔들면서 웃는 모양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욥6:5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겔34: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 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욜1:18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 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꼴망태를 메고 꼴을 베러 나가는 모습은 농촌에서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꼴망태를 메고 말씀의 꼴을 찾으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교회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풀을 뜯던 양이 엉겅퀴만은 피해간다. 쇠꼴 속에 엉겅퀴가 섞여 있으면 소는 아예 입을 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엉겅퀴 같은 놈하면 타협을 모르는 고집장이요, 양보를 모르는 욕심장이이며, 옛 시인들이 세도나 당파에서 소외받고 낙향, 원한을 품고 있는 신세를 곧잘 엉겅퀴로 비교 했다고 합니다. 선한목자는 엉겅퀴들이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양떼들이 길을 잃으면 엉겅퀴가 있는 사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한목자는 양을 보호하시면서 신령한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양이 살찌고 윤택하게 되는 것은 목자에게도 달려 있고 양에게도 달려 있습니다. 양에게 목자는 좋은 꼴을 먹여야 하고 양은 받아 먹어 되새김질을 하여 소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꼴을 먹어야 꼴(사물의 생김새나 됨됨이)이 좋아지는데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꼴이 좋아야 합니다.” 볼 꼴 사나운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볼 꼴 사나운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자인데 말씀의 꼴을 먹지 못해서 볼 꼴 사나운 기독교인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왜 마귀입니까 볼 꼴 사나워서 마귀입니다. 누가 영계에 가니까 천국은 다 날씬하고 미남미녀만 있는데 지옥에 가니까 추남추녀만 있다고 합니다. 그것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럴분! 여러분들은 말씀의 꼴을 먹고 말씀의 자녀, 곧 생명의 자녀가 되십시요! 아멘! 아멘을 안하시는 것을 보니 생명의 자녀가 되시기 실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꼴을 먹고 40년을 지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이며 그것은 바로 말씀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신령한 꼴이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풍성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양들이 먹는 꼴의 양분입니다.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심이라” 선한 목자 아래서 선한 인격을 닮아가는 양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1. 선한 목자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선한 목자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입니다. 진리는 이론적이라면 생명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론은 반드시 실제가 따라가야 합니다.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면 그 이론은 타당성이 없는 것입니다. 철학이론이 아무리 뛰어나도 생명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역사적인 인물 중에서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생명이라고 선포하셨듯이 생명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생명을 가져오는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우고, 얻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며, 최고의 기회인줄 믿습니다.
(2) 선한목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빌2:6)입니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내려 오시더니 종의 형체가 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요한복음 10장 11절에 있는 말씀대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 영광의 보좌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인간의 육체를 입으시고 고난의 자리까지 내려 오셨습니다. 이것이 양들을 위한 선한 목자의 참 모습입니다.
1. 예수님은 양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는 절대로 여러분의 영혼이 목적하시는 그 아름다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바로 여러분을 인도하여 아름답고, 좋은 곳, 영원한 곳, 기쁘고 즐거운 곳으로 이끌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선한 자는 선한 곳으로 인도하고 악한 자는 악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선한 곳은 선한 자들이 모여 사는 천국이요 악한 곳은 악한자들이 모여 사는 지옥입니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 다” 시31:3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계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 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 임이니라” 주님은 여러분들의 모든 형편과 사정과 상황을 훤히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선 그야말로 “뻔할 뻔” “텔레비 테”자 입니다. 약점도 아시고 부족함도 아시고 갈등과 고민과 남모르는 비밀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는 정확히 아시기때문에 정확한 길을 보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정확히 아는 자가 정확히 고쳐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90년도)에 정부에서 “특명 사정반”을 조직한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란 말의 뜻이 “바르게 고친다는 뜻”을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길이 되심으로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도덕과 과학은 결코 안일하게 살 수 있는 길로는 이끌지라도 생명의 길로 이끌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아는 자가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줄 우리들은 믿습니다.
(1) 시험하시면서 인도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못에 작은 장남감 배를 띄우고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난감 배가 멀리가기 시작하여 손에 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그 배를 잃어버릴까하여 엉엉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오자 그 배 근처에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그 배가 그 던지는 돌로 인하여 빠질까 싶어 더 크게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난감 배가 자신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도 억울한데 돌까지 던지지 더 크게 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장난감 배는 마치 큰 파도가 밀려 오는 것같이 물에 빠질듯 빠질듯하면서 기웃뚱, 기웃뚱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점점 연못가로 오더니 그 배를 그 어린아이가 잡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것을 잃어 버릴까 염려합니다. 그리고 큰 풍랑이 오면 빠질 까 두려원합니다. 그러나 큰 파도가 닥치면 더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돌을 던진 것은 배를 빠뜨리게 하는 것으로 어린아이는 착각을 한 것처럼 시험의 큰 물결이 닥치면 마치 죽을까바, 생명을 잃을까바 염려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더 좋은 것을 주실려고 하는 사랑인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는 안될 것 같아도 잘되는 것입니다.
(2) 어린양을 안아주시면서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들은 선한 목자 앞에서 어린양과 같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동물원에 가서 원숭이도 보고 호랑이도 구경하였습니다. 빵과 아이스크림도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구경을 하다가 자시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놓고서 혼자 뛰어 다니면서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재미있게 구경을 하다가 보니 자기가 아버지의 손을 놓쳐 그만 아버지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혼자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먹는 것도 맛이 없고 구경도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두려운 마음만 생겼습니다. 아버지의 손에 붙잡혀 있을 때 재미도 있고 즐거웠지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보니 오고갈 곳도 없이 미아가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선한목자의 손을 놓치면 의욕이 사라지면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 인생의 험한 길, 살기 어려운 길을 걸어갈 때에 누구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까 우리가 때때로 열심을 낼 때 내 힘으로, 내 경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칠 때에 우리는 미아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 고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데, 그곳은 예수님이 예비해 두신 쉴만한 안식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거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어느 거지가 예배 시간에 우연히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 거지가 목사님께 오더니 나는 휴거를 못하니까 휴거하실때 혹시 지갑을 가지고 계시면 던져 놓고 가십시요! 목사님 그러면 교회에 다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휴거하게 하실 때는 아마 “호주머니가 안 달린 흰 옷”을 순식간에 입혀주신 후에 휴거하게 하실지도 모릅니다. 10절에서 15절까지는 양을 보호하시는 목자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다윗이 목동(목자)으로 있으면서 사나운 사자를 물리친 것은 우리 영혼을 악의 권세에서 보호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미성년자는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보호자(Protector)는 법으로 부모를 가르칩니다. 부모는 법으로 여러분 자녀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은 사실 하나님 앞에 완숙하지 못한 단계에 있기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특히 요즈음같은 물질 문명 속에서는 보호를 받을 필요성이 절실해 집니다. 천국에 다녀온 스웨덴 보르그가 누구에게나 보호하는 천사가 둘씩 있다고 하는데 천국에 다녀오고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시16:1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누가 우리를 악의 권세에서 보호할 수 있으며 이 죄악의 도전에서 우리 마음을 보호하며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시련과 죽음 앞에서 보호할 수 있느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이제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자. 주님만을 의지하고 따라가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2. 꼴을 먹여 주시는 목자입니다.(요10:7-9) 예배시간은 말씀의 꼴을 먹는 시간입니다. 인간을 영적 존재로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하기 위함입니다. 교제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입니다. 서로 인격이 맞지 아니하면 교제가 이루워지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사랑을 나누며 꼴을 먹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버님이 강화도에서 목회 하실 때, 산양을 키워 보았는데 아카시아 잎사귀를 좋아합니다. 끝이 꼬부라진 지팡이로 아카시아 가지를 잡아당겨 그 잎사귀를 따서 먹여주던 생각이 납니다. 아카시아 잎사귀를 주면 양이 좋아서 꼬리를 흔들면서 웃는 모양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욥6:5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겔34: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 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욜1:18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 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꼴망태를 메고 꼴을 베러 나가는 모습은 농촌에서는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신령한 꼴망태를 메고 말씀의 꼴을 찾으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교회로 가야 할 줄 믿습니다. 풀을 뜯던 양이 엉겅퀴만은 피해간다. 쇠꼴 속에 엉겅퀴가 섞여 있으면 소는 아예 입을 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엉겅퀴 같은 놈하면 타협을 모르는 고집장이요, 양보를 모르는 욕심장이이며, 옛 시인들이 세도나 당파에서 소외받고 낙향, 원한을 품고 있는 신세를 곧잘 엉겅퀴로 비교 했다고 합니다. 선한목자는 엉겅퀴들이 있는 곳으로 양들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양떼들이 길을 잃으면 엉겅퀴가 있는 사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선한목자는 양을 보호하시면서 신령한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양이 살찌고 윤택하게 되는 것은 목자에게도 달려 있고 양에게도 달려 있습니다. 양에게 목자는 좋은 꼴을 먹여야 하고 양은 받아 먹어 되새김질을 하여 소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꼴을 먹어야 꼴(사물의 생김새나 됨됨이)이 좋아지는데 그리스도 인으로서의 꼴이 좋아야 합니다.” 볼 꼴 사나운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볼 꼴 사나운 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는 자인데 말씀의 꼴을 먹지 못해서 볼 꼴 사나운 기독교인 되어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왜 마귀입니까 볼 꼴 사나워서 마귀입니다. 누가 영계에 가니까 천국은 다 날씬하고 미남미녀만 있는데 지옥에 가니까 추남추녀만 있다고 합니다. 그것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여럴분! 여러분들은 말씀의 꼴을 먹고 말씀의 자녀, 곧 생명의 자녀가 되십시요! 아멘! 아멘을 안하시는 것을 보니 생명의 자녀가 되시기 실으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광야에서 꼴을 먹고 40년을 지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이며 그것은 바로 말씀 자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다 신령한 꼴이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풍성함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양들이 먹는 꼴의 양분입니다.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심이라” 선한 목자 아래서 선한 인격을 닮아가는 양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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