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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왕하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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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왕하1:1-18절)




1. 사람은...


어떤 사람이 밤마다 쇠 공장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상담소를 찾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상담사가 의외의 처방을 내렸습니다. 당장에 그 쇠공장의 주식을 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처방에 따라 주식을 샀습니다. 그러자 쇳소리가 크게 나면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주가가 오른다는 생각에 시끄러운 소음이 달콤한 자장가로 변했습니다. 잠을 잘 자게 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이 찾아 왔을 때 자신이 가장 의지할 것을 찾게 마련입니다. 또한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 속사람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뼛속까지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혈관 속에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하고 우리의 DNA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DNA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잘 담아내는 말이 바로 세계관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디까지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가를 잘 드러내 주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 열왕기하를 시작하는 사람은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입니다. 남쪽의 아하시야는 아합의 외손주입니다. 그리고 북쪽의 아하시야는 아합의 장남입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의 동생이거나 누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쪽의 아하시야에게 북쪽 아하시야는 외삼촌이 되는 셈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만 같은 것이 아니라 인생도 흡사했습니다. 불행한 일은 아달랴가 여호람의 아내로 시집와서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의 인생도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철저하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습니다. 누구 때문에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참 부끄러운 인생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 사가는 왜 이 소중한 지면에 이런 인생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본문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하시야가 처한 상황


우선 본문은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직면한 두 가지 문제를 이야기 합니다.


첫 번째는 외교적으로 힘을 잃어 모압이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이 상황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이 처한 역사적인 심판이라는 문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신대로 이스라엘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려움은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지면에 사마리아에 있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써야 하는 열왕기 기자의 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하시야의 통치에 대해서는 열왕기 상에 간략하게 썼습니다. 한 마디로 아버지 아합의 길을 답습하여 우상숭배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불과 2년을 통치하는 동안 말입니다. 그런데 열왕기하가 시작되면서 바로 그럼 그 2년 동안 뭘 했느냐 이것 밖에 한 것이 없다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역사가가 글을 쓰는데 오는 본문과 같은 이야기 밖에는 쓸 것이 없는 인생이라면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아무튼 아하시야가 한 일이라고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큰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위급한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 의술로 치료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는지 모릅니다. 왕궁 어의들과 용하다는 의사를 다 동원했어도 차도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는지 찾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가장 긴급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 때문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이 때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묻기를 선택했습니다. 바알세붑은 파리의 대왕이라는 뜻으로 형상이 파리처럼 생겼거나 혹은 파리가 전한 질병으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믿었던 에그론의 우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아하시야의 신앙이요 사는 법이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 보다 바알세붑을 더 신뢰한다고 신앙 고백한 것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의지할 신으로 바알세붑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어려울 때 누구를 선택합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돈입니까? 가족입니까? 힘 있는 사람입니까? 그때 의지하는 그것이 내 신앙의 무의식이며 세계관입니다.



3. 하나님은...


자 이런 아하시야에게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묻든지 그대로 죽어 지옥에 떨어지든지 무관심하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보내어 따지십니다. 이스라엘에 신이 없어 에그론의 신인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열왕기 기자가 이 사건을 기록한 이유, 또 하나님이 엘리야를 보내셔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질병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볼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이 질병은 우연에 의거한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락 난간에서 떨어진 아하시야는 아합 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서곡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쉬워서 다시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라는 사인을 엘리야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작은 신호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 고백에도 불감증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시야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에그론을 가는 사람들을 막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는 어떤 선택을 합니까?


사람들이 돌아오자 아하시야가 묻습니다. 왜 돌아온 것이냐는 것이지요.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생김새를 묻습니다. 생김새를 들어보니 엘리야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확인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아하시야는 오십부장과 군사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 보냈습니다. 첫 번째 기회에 대한 아하시야의 답변인 것입니다.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긍휼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를 보내 엘리야를 체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엘리야의 반응이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 지로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오십 부장은 부르기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왕의 권위를 더 높게 책정하고 엘리야에게 조롱 섞인 말로 비아냥거리면서 말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왕의 권세를 등에 엎고 하나님의 사람을 하찮게 취급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하시야가 하나님을 멸시하는데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고 두려워 할리 만무합니다. 이 사건은 아하시야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며 모욕당하실 수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닙니까? 아하시야가 회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여러분! 정상적인 군주라면 아무리 자신이 아프고 힘들어도 자신의 생떼같은 부하가 51명이 몰사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이라도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하시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런 돌아볼 수 있는 영적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 오십 부장과 50명의 군사들이 또 엘리야에게로 난입했습니다. 아마 좀 더 난폭했을 수 있습니다. 동일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그리고 엘리야의 이어지는 일갈도 같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너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결과는 같았습니다. 또 다시 51명의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실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고 말입니다. 역시 아하시야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맙니다. 역사에는 이렇게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사랑하심에 삿대질을 해대는 미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아하시야가 2년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죽은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대적하고 회개하지 않은 자신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 올라간 오십 부장은 사태를 올바르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엄위로우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긍휼을 구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려가 다시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으리라.” 이게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4. 위기의 순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기록함에 있어서 기록할 내용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징계로 다락 난간에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대적하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렇게나 취급되어도 좋은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신들처럼 취급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아하시야와 같은 인생에게도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냥 놓아두면 우상을 섬기다가 죽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를 보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무엇을 의지합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은 그가 잘나서도 아니며 그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기회를 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면 더 큰 확신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라는 도전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한 번 뿐인 인생을 이렇게 끝까지 허탄한 신화를 쫓다가 죽음을 당한 이런 사람도 하나님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기회를 거부하고 심판을 받아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2년 통치의 뒷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것! 이것이 이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여기서 뭉러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의지합니까? 그분이 하나님이 맞습니까?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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